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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거북이 또로독! 핸드폰에서 얼음 구르는 소리가 났다. 윤희는 들고 있던 달걀 상자를 냉장고에 대충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은행 앱의 팝업에는 마이너스로 시작하는 빨간색 숫자들이 떠 있었다. 카드값. 잔액의 반이 빠져나갔다. 장바구니에 남은 우유와 어묵을 마저 넣으려 냉장고를 다시 여는데 달걀 상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원래도 단단하지 않은 걸 불안하게 감싼 것에서 나는 둔탁한 파열음. 금세 누렇고 진득한 액체가 꿉꿉한 장판 위로 새어 나왔다. 윤희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지저분하게 퍼지는 달걀물만큼 천천히 식탁 위의 두루마리 휴지로 손을 뻗었다.  또로독! 또 한 번 얼음이 굴렀다. 신용카드 앱이었다. 귀하의 청구금이 성공적으로 인출되었습니다! 그 ‘성공적’이라는 말에 장을 보며 가라앉혔던 짜증과 무력감이 되.. 2024. 12. 28.
안경을 닦다 딩동!  두 시가 다 되어 가는 새벽, 매일 같이 듣는 엘리베이터 소리가 유난히 신경 쓰인다. 정적을 깨는, 가볍지만 삭막한 소리. 보통은, 가벼우면 경쾌하기 마련인데 외려 건조하고 어둡다. 기분 탓이겠지. 누구에게나 똑같은 소리일 터인데, 아이들 귀에도 이리 들리면 어쩌나 싶다. 정말 그렇다면, 이사라도 가야 하는 게 아닐까? 아이들에게는 달리 들릴 수도 있겠지. 출발선의 육상선수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나가는 아이들을 보면, 녀석들에게는 이 소리가 출발신호처럼 설레고 긴장되는 느낌인지도 모른다. 나의 달리기는 이미 익숙한 만큼 지겹기도 한 반환점 근처, 이제 막 출발선상에 있는 아이들과 나를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쩌면 아이들은, 그런 소리 따위 있는지 없는지 아예 관심 밖일지도 모르.. 2024. 10. 29.
벤지 죽기 전에는 개를 키울 수 없을 줄 알았다. 생각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음 기댈 놈 하나 곁에 두기를 항상 바랐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도 늘 있었다. 아파트에 살았고, 개를 돌보는 데 필요한 하루 몇 시간도 빼기 힘들었고, 결정적으로 아내가 개를 무서워했다. 은퇴 후 시골에 내려오고 나서는 건강과 나이가 걸렸다. 입양할 강아지보다 내가 더 오래 산다는 보장이 없었다. 건강수명을 따지면 더 그랬다. 통원으로 시작하겠지만 결국 집보다 병원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질 때쯤에는 제대로 돌보지 못할 테니까. 나는 이미 30년 넘게 혈압약을 먹어왔고, 콜레스테롤과 당뇨 수치도 경계에서 간당간당했다. 노안이 심했고 해마다 떨어지는 체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내 개의 마지막을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서준이 강아지를.. 2024. 8. 7.
나는 자랑스런 “할머니가 뭐라고 하든, 아니라고 하지 마. 그냥 네, 네 하고, 그런가 보다 해.” 자리에 앉자마자 이어폰을 끼고 차창 밖만 보는 하린에게, 은희는 작심하고 주의를 줬다. 하린이 한쪽 이어폰을 빼며 되물었다. “뭐라고?” “할머니. 오랜만에 만나는데 괜히 따지고 딱딱한 말 오가는 거 싫어. 할머니 건강도 그렇고, 이제 뭐라 한다고 바뀔 수도 없는 연세야. 할머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너도 알지?” KTX는 통로까지 가득 찼다. 설에 맞춰 내려가는 건 몇 년 만이었다. 매년 설은 시댁에서 쇠고 대구에는 설 다음 주말에나 다녀오곤 했었다. 큰집에 교통사고가 없었으면 이번에도 그랬을 텐데, 명절에도 하린이 큰아빠가 퇴원할 수 없었다. “아들도 없는데 설은 무슨, 이번에는 그냥 쉬는 걸로 하자.” 덕분에 설.. 2023. 11. 30.
성혼선언 이제, 나는 알아. 그래서 막 설레. 뭘 알게 된 지는 확실치 않아. 하지만 분명히 나는, 몰랐던 뭔가를 알게 됐어.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무언가를. 이상하지? 뭔지도 모르면서 안다고만 말하는, 이런 바보 같은 상황을 당신은 이해할까? 이런 것과 비슷할까?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세상이 달라져 버렸어. 잠에서 깬 게 아니라 어리고 작은 세상에서, 무지몽매하게 있던 조금 전까지의 내게서 깨어난 거지. 가까이에서 늘 작동하고 있었지만 몰랐던 세상의 질서가 갑자기 보이기 시작해. 내가 변한 건지 나를 둘러싼 것들이 달라진 건지 알 수 없지만, 보이고 들리는 것들은 그대론데 내가 그걸 이해하는 방식은 전과는 완전히 달라.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더 멋진 말, 나중에도 가슴에 남겨.. 2023. 10. 19.
안녕 유코 타케우치 유코가 죽던 날 재희는 처가에 다녀왔다.  차로 두 시간 남짓 거리의 처가에는 쉰 그루 정도의 사과나무가 있었다. 고정적으로 사람을 쓰기는 애매했고 일흔이 넘은 장인이 혼자 관리하기에는 힘에 부쳐, 해마다 추석 전에 처형네와 날짜를 맞춰 수확을 함께했다. 제대로 된 일꾼에는 턱없이 모자랐어도 정례적인 처가 방문의 좋은 구실이었다. 코로나로 조심스러웠지만, 그건 사람의 일일 뿐 나무는 변함없이 때맞춰 결실을 맺었다.  꽃 필 무렵의 우박과 여름 끝에 잇단 두 번의 태풍으로, 이번에는 품질이나 양이 기대에 못 미쳤다. 그래도 꼬박 반나절은 과수원에 매달려야 했는데, 실한 것들은 따로 모아 판매용 상자에 담고 나머지는 되는대로 비닐봉지에 담아 트렁크에 한가득 실었다. 상처는 있어도 먹는 데는 아무 지.. 2023. 10. 10.
안개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았다. 역 광장에 뜬 그믐달 위로 지나는 구름 빛이 짙었다.  마지막 승객이 빠져나가자 역무원은 서둘러 쇠문을 닫아걸었다. 사람들은 채 깨지 못한 밤 기차의 피곤을 안고 각자의 걸음을 서둘렀다.  신평(新平)에 서는 그날의 막차였다. 고향 이름을 내건 식당들도 하나둘씩 불을 끄고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인근 도시 아침 장으로 시골 아낙들을 실어 갈 첫 전철이 새벽을 깨울 때까지 역은 잠들 것이다. 굼뜬 장꾼만 남은 파장 무렵처럼 쓸쓸한, 자정 가까운 시골 역. 처음은 아니지만 초행 보다 낯선 곳. 어중간한 술기운 때문인가? 분명 그 속인데도 녹화된 화면이나 사진을 보는 것처럼, 선우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손을 뻗어 만지려 하면 눈앞의 모든 게 스르르 흩어져버릴 것 같은, 신기루.. 2023. 7. 24.
계절 건너기 나는 어떡하든 그 계절을 지나 볼 요량이었나 보다.  하늘은, 쉼 없이 맑았고 어디로든 쉽게 가슴을 부벼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분명 시간은 한 해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지만 아직도, 봄인 듯 새 햇살처럼 눈부신 송곳이 촘촘히 내리쬐는 낮이 이어지는 가을이었다.  어떡하든 지나 볼 요량이었다, 그 계절을. 굳이 무얼 이루어 내어 혼자를 위로하려 하거나, 도저히 감당 못 할 것들에 부딪혀 보려는 식의 무모한 계획은 없었다는 말이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난 오후에, 문득 놀이 지는 걸 바라보다가 어기적이 팔을 뻗어 그 하늘에 난장(亂掌)을 내 지르듯, 그저 그렇게 살아 보려 했다는 것이다, 어떡하든. 이유 없음이었다.  하지만 계절은, 봄 하고도 끈적거리듯 늘어지는 늦봄에나 어울릴 모래바람을 일구.. 2023. 7. 19.
노포(老鋪)를 꿈꾸며 고등학생 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다 이야기가 거기까지 이어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께 이런 얘기를 드린 적이 있다.  “엄마, 나는… 갑자기 예전 일들이 떠오르는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대부분 좀 부끄러웠던 기억이라 혼자서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아이고, 그런 건 엄마 나이쯤은 넘어야 하는 일인데. 니는 아무래도 애늙은이인갑다!”  별일이 다 있다며 신기하게 여기셨는지, 벌써부터 그러면 어쩌냐며 측은해하셨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들 얼굴을 한 번 더 공들여 살펴보셨던 건 분명하다.  요즘 들어 특별한 계기가 없는데도 오래전 추억을 되짚어 보는 때가 잦다. 심지어 예전 어느 때 하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 내지 못한 말을 뒤늦게 혼자서 중얼거려 보기도 한.. 2023. 7. 15.
눈삽 이 약을 포함한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는 중대한 심혈관계 혈전 반응, 심근경색증 및 뇌졸중의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으며, 이는 치명적일 수 있다. 투여 기간에 따라 이러한 위험이 증가될 수 있다. 심혈관계 질환 또는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 인자가 있는 환자에서는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의사와 환자는 이러한 심혈관계 증상의 발현에 대하여 신중히 모니터링하여야 하며, 이는 심혈관계 질환의 병력이 없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환자는 중대한 심혈관계 독성의 징후 및/또는 증상 및 이러한 증상이 발현되는 경우 취할 처치에 대하여 사전에 알고 있어야 한다.. . . . . . 2. 다음과 같은 사람(경우)은 이 약을 복용하지 말 것.1) 위장관궤양이 있거나 징후가 있는 환자, 또는 그 재발병력이 있는 환자2.. 2023. 7. 11.
창, 밖에서 눈을 뜰 수가 없다. 아마도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그 거리를 짐작할 수가 없다. 바이올린이 분명하다. 그리 격정적이지 않으면서도 열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바이올린 선율이 팔분음표와 십육분음표를 넘나들며 들려오고 있다. 아니, 들려온다, 는 것보다는 마치 선율이 내 정신을 표적으로 하여 어느 곳으로부터 발사되어 날아오는 것 같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내가 숨어 있던 지하실의 문을 술래가 갑자기 열어젖혀졌을 때, 비밀의 어둠을 일거에 날리며 지하실의 모든 구석구석을 꼼꼼히 더듬던 숨바꼭질 시절의 그 선명한 빛처럼, 그것이 바이올린이라는 것을 감지함과 동시에, 내 온 정신으로 번져 빠르기도 짐작할 수 없는 속도로, 선율은 내 미망(迷妄)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 방울 떨.. 2023. 7. 9.
여섯 잔의 커피도 아닌데 “여보, 나 지금 지원이 학원 때문에 같은 반 애들 엄마들이랑 밖인데, 자기 아직 집에 안 왔지? 혹시 나 집에 없다고 전화할까 봐. 내가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왔거든…….”  낯선 번호의 전화 너머에서 들리는 아내의 목소리에 대해 가졌던 의문이 풀린다. 아내의 목소리가 그리 밝지 않다. 무언가 피곤한 일인 게 분명하다. 저녁도 다 지난 시간에 애들 둘을 데리고 다른 엄마들과 만나야 하는 일이라면 좋은 일일 건 없는 것이다. 세상사 그렇듯, 갑자기 일어나는 일과 예상 못한 일들의 구십 퍼센트는 나쁜 일이다. 사람들도 그걸 알기에, 철이 들어갈수록 새롭게 만나는 사람을 우선 경계부터 하고 보는 것 아닌가? 결국 진정한 열린 마음의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집에 와보니 아홉 시가 넘었는데도 불이 .. 2023. 7. 4.
베이더와 나의 눈길 지금도 눈이 내린다. 벌써 삼 일째다. 오려면 에서처럼 엄청 와서 쌓이면 좋겠는데, 고작 이렇게 내려서는 눈 장난 같은 건 못한다. 길이 질척해져서 걷기만 더 힘들다. 걸으면서 나는 자꾸만 고개를 숙인다. 눈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빠를 따라가겠다고 한 건 나 혼자다. 이모와 할머니가 같이 살자고 했을 때, 처음에는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아빠까지 그러는 게 좋겠다고 하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바로, 아빠 다리를 꼭 붙들어 안고 펑펑 울어버렸다. 내가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른다. 분명한 건 아빠가 좀 미웠다는 거다. 아빠는, 같이 살자고, 적어도 한 번은 내게 말해줘야 하는 거였다. 아빠라면. 아빠니까! 겨우 처음 만난 아빠를 영영 다시 볼.. 2023. 6. 30.
문지방 “이놈! 문지방에서 썩 내려오너라!”  어린 시절 들었던 할아버지의 호통이 불현듯 떠올랐다. 방학이면 며칠씩 가 있던 시골집에서나 들어봤던 것이다. 출근 전 집에서 있었던 일에 정신을 쏟으며 걷다가 높은 문턱에 발이 걸려 속절없이 휘청거리고 난 다음이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 보행통로 입구에는 족히 사십 센티미터는 되는 턱이 있다. 그 높이가 보통의 계단 한 단보다 높으니 키 작은 아이들은 그 문턱을 밟지 않고 지나기 어려웠고, 어른들도 부주의하게 다니다가는 발끝이 걸리기 일쑤였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옷을 두껍게 입은 오늘은 걸음이 평소 같지 않아서 그 문턱을 디디고 넘으려던 요량이었으나, 늘 다니던 익숙한 길이라 소홀히 내뻗은 발이 무언가에 걸린다고 느끼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가까스로 무너지.. 2023. 6. 27.
심인 씨의 버스 타기 탕탕! 탕!  버스 차체는 생각보다 튼튼한 편이 못되어서 그리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찌그러질 듯한 양철판 소리를 토해냈다. 하지만 심인 씨에게 그런 정도의 공공의 안전성을 고려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꼭 끼지 않아 헐렁한 구두가 발에서 빠져나가지 않도록 발가락을 잔뜩 구부려 힘을 넣은 채로 이미 십여 미터를 허둥지둥 뛰어왔다. 그의 오른손에는 세일즈용 팸플릿을 가득 담아 배가 부른 낡은 가방이 들려 있었고, 목에는 엘니뇨 탓에 한 달은 빨리 온 무더위로 흘러내린 땀을 닦느라 느슨하게 풀어놓은 넥타이가 급히 뛰어오는 통에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눅눅한 습기 탓인지 심인 씨의 적당히 살이 붙은 몸체에서 흘러내리는 땀은 심인 씨를 옥죄는 열기를 제대로 식혀주지 못하고 있었다. 심인 씨의 생각에 버스.. 2023. 6. 24.
명견 “대체 나를 어떻게 알고 이따위 걸 들이미는 거야! 생각을 좀 해 보라고. 아무리 식견이 없기로서니 그런 정도의 생각은 할 수 있어야지. 어찌…….”  변 사장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혀를 몇 번 차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사실 변 사장에게는 더없이 불쾌한 일이긴 했다. 기분 같아서는 사진을 던져 버려야 했지만, 그런 정도의 사람에게 쉽게 흥분하는 것은 결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는 일이 아니라는 판단 덕에 자제력이 살아났다. 실망의 표시인지 화를 참는 것인지 모를 깊은 숨을 한 번 내쉬고는, 탁자 위에 어지러이 널린 사진을 모아 건네주며 늘 그랬듯 혈통을 강조하는 것을, 변 사장은 잊지 않았다.  “왜, 거, 어디에다 내놓아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그런 혈통을 가진 개를 구해 달라고.. 2023. 6. 21.
종소리 갑자기 소나기가 뿌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비를 피해 나무 밑, 처마 밑으로 바쁘게 뛰어들었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공깃돌이 비에 젖었다. 아이들이 놀이를 위해 운동장에 그렸던 오징어나 뼈다귀 모양의 금도 빗줄기에 지워졌다. 그래도 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젖은 돌은 마를 테고 지워진 금은 다시 그리면 그만이었다. 옷이 젖는 것도 문제될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감기 걸린다고 목사님께 혼이 날 게 분명하기 때문에 비를 피하는 것뿐이다.  “야 광수, 마지막에 넣은 거 골인이다. 딴 말 하지 마라.”  빗물에 젖지 않게 하려고 축구공을 감싸 안은 채 뛰어가며 창호가 광수에게 다짐하듯 이야기했다. 한 눈에 봐도 족히 몇 년은 차댔을 낡은 공이었지만 창호는 보물이라도 다루듯 처마 밑으로 들어오자마자 공에 .. 2023. 6. 18.
약국 단상(斷想) 할아버지는 오늘도 할머니의 몸살 약을 사러 오셨다. 다시 뵙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르신의 표정이 염려한 만큼 어둡지 않아 반가움과 함께 조금은 안심이 된다. 늘 사 가시는 할머니의 약을 드리며 여쭤보니, 지역 2차 병원에서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라고 해서 낼모레 올라가 보기로 했다고 하신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게다. 늘 그랬던 대로 별걱정 없는 표정으로 다녀오마고 돌아서신다. 엊그제, 할아버지가 본인의 내과 기침약 처방전을 가지고 오셔서 약을 받으시며 CT 사진과 방사선과 소견서를 보여주시는데, ‘lung cancer’라고 쓰여 있었다. 자세히 설명할 수도,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저 기침이 감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고, 병원에서 지시한 대로 자식들과 상의해서 정밀검사 받아.. 2023. 6. 15.
Sink Condition 두 손으로 얼굴에 거푸 찬물을 끼얹으며, 그는 전날의 탐탁지 않았던 술자리와 한 해 한 해 다른 숙취의 무게감을 생각했다. 회사일도 차질을 빚겠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자신을 향해 날아들 아내의 날카로운 말들과 차가운 시선이었다. 실망이나 염려와는 거리가 먼, 낮고 건조해서 더 마음을 헤집는 목소리. 이미 출근했을 터이니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할 것이었다. 바로 오늘 저녁이든 내일, 아니면 조금 더 묵혀둔 며칠 뒤가 되었든, 아내가 이런 꼬투리를 지나칠 리 없었다. 아내의 질책이 실망의 표현이라면 아직도 자신을 향한 기대가 남아 있다는 것에, 염려해 주는 것이라면 아내의 어디 한 조각 정도는 여전히 그가 사랑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사실에 일말의 위안을 삼을 수 있겠다 .. 2023. 6. 12.
En la costa del sol 아침에 눈을 뜨면, 조금 열린 창으로 들어온 미풍이 가볍게 늘어진 하얀 커튼을 흔들고, 그 나풀거림 사이로 눈 부신 햇살이 간간이 부서지는 방을 꿈꾸어 본다. 창 너머로 하얀 모래밭과 투명한 바다가 펼쳐져 있거나, 전나무나 낙엽송 사이 오솔길을 배경으로 산비둘기가 쌍쌍이 날아들지 않아도 좋다. 허나, 어디가 되었든 반드시 일말의 애잔함이 있어야 한다. 화려함을 뒤로 하고 시들어가는 봄꽃이나, 푸르름의 끝자락에서 곧 떨어져 내릴 낙엽이나, 박명(薄明)에도 아직 불을 밝힌 채 외로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가로등이나, 멀리 떼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무리나, 조금은 창백한 얼굴로 걸어가는 소녀 같은. 그러면 나는 부스스한 얼굴로, 아직 눈곱을 그대로 붙인 채로, 죽은 듯 잠든 동안 헝클어진 머리 그대로, 혼자서 나.. 2023. 6. 9.
그런가 보다 볕 좋은 휴일 오후다. 아직 이른 감이 있긴 해도 봄은 봄이다. 원래는 약국에 필요한 소품이 있어 목공작업을 할 생각이었지만, 봄맞이 나들이가 썩 구미에 당긴다.  올해도 어김없이 홍매화가 어여삐 피었다는 통도사는 어떨까? 근처 울산대공원이나 태화강변 산책 정도도 좋겠다. 하지만 창밖 멀리 시선 한 번에 이내 들뜬 마음을 접는다. 건너편 아파트도 뿌옇게 흐리고, 그 뒤에 앉은 산은 아예 풍경에서 사라지고 없다.  미먼! 약칭인지 애칭인지, 사람들이 미세먼지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한탄이나 자조가 담겼을 그 말이 나는 자꾸 ‘미망(迷妄)’처럼 들리고 읽힌다. 공기가 탁해지는 만큼 세상도, 정신도 그렇게 흐릿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까닭이다.  나들이는 포기하고, 창가에 신문지를 펼치고 손톱깎이를 가져와.. 2023. 6. 6.
가을 저녁 1 전화가 갈 것이다, 한국에서. 이미 어둑해진 브리즈번의 저녁. 우현이는 침대에 엎드린 채 벌써 몇 번이나 고쳐 쓴 에세이를 한 번 더 보고 있을 것이다. 엄마가 없는 틈에 온라인 게임에 빠진 형에게 전화를 받으라 소리치겠지만, 짜증 섞인 대꾸도 듣지 못하고 거실로 나와 직접 받게 되겠지. “헬로?” “여보세요? 혹시 차준환 씨 가족 되세요? 여기 한국, 의성경찰섭니다.” “네. 우리 대디 이름이에요, 차… 준환.” “아, 대디? 거기 혹시, 어른 안 계시니?” “예 암, 마미는 지금 안 왔고, 스티븐하고 저밖에 없어요.” “스티븐? 스티븐은 누구야?” “브라더, 형.” “형은 몇 살이지?” “삡띤.” “피프틴? 열다섯? 그럼 형은 됐고 혹시 아버지 주민등록번호 찾을 수 있으면 좀 불러봐 줄래?” “주.. 2023. 2. 15.
오동꽃 지면 이팝나무 가로수에 하얀 꽃이 만개했다. 겨울이 너무 길다 싶던 게 어제 같은데 콧잔등에는 벌써 땀이 맺혔다. 그래도 외근이 일찍 끝난 덕에 바깥 풍경을 향한 은주의 시선에 오랜만의 여유가 묻어 있었다.  신호를 따라 무심코 좌회전할 때, 보라색 꽃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큰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자주 오가는 길이었지만 기억에 없는 오동나무. 전부터 거기 있기는 했던 건가 하는 의문과 오동이란 원래 모양이 저리 제멋대로인가 하는 생각이 은주의 머릿속에 잇달았다.  웬만한 크기의 나무라면 저마다 차이는 있어도 어느 정도의 품격 같은 걸 갖추게 마련 아니던가? 흐드러지게 꽃을 달고 있는데도 외롭고 측은해 보이는 나무라니. 처음도 아닌 오동꽃이 새롭고 낯설었다. 때 이른 더위에 열어 둔 차창을 넘는 황사처럼 뜻.. 2023. 2. 15.
먼 하늘을 날다 나는 시를 쓸 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 자신이 미워집니다.  ․ ․ ․ ․ ․ ․ ․ ․ ․  사람은 언제나 봄에 옵니다. 내게는 그랬습니다. 봄이면, 기습적으로 다가드는 계절의 변화만큼이나 사람은 갑자기 다가옵니다. 초등학교 때의 친구들도 열여섯 해 전의 봄에 내게로 왔고, 내가 태어난 때가 봄이었으므로 부모님도 내게는 봄에 왔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제게 온 것도 봄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멀리 있습니다. 당신의 주위를 맴돌 때에도 내가 지금 당신에게서 떠나온 것만큼의 거리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기 시골 역 근처의 허름한 여인숙 방에, 모서리는 벌써 다 삭고 이제는 누렇게 연탄 온기가 남긴 자국만을 간직한 비닐 장판에 엎드려 당신과 더 가까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당신이 있는 도시에는.. 2023. 2. 15.
나비 초여름부터 폭염이 계속되고 있었다. 냉방이 충분하지 않은 장례식장에는 지하 공간 특유의 습한 공기가 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였다. 조문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취기 오른 소리로 얘기를 주고받는 서넛을 빼고 나면 손님 떠난 상을 치우는 이도 없이 이미 무덤 속인 듯 적막했다. 문상을 온 사람들은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훔쳐냈지만, 상복을 입은 은재는 미동도 없이 이틀 내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야이야, 니도 인자 쫌 드가가 쉬이라. 이만하믄 올 만한 손님들 다 댕기 갔고, 낼도 일이 많다. 암만 차 타고 간다 캐도 산에 가는 기 쉬운 기 아이다. 기숙아, 야 쫌, 현지이 애미 쫌 델꼬 드가라. 쪼매라도 눈 좀 부치구로."  시어머니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시누이가 한 손으로 은재의 손을 잡고.. 2023. 2. 15.
배꼽 이건 그저 우리 집, 뭐 하나 특별한 것 없는 세 식구에 관한 소박한 이야기다. 굳이 얘기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세상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궁금해하지도 않을 가족. 별의별 자질구레한 사연이 다 나오는 한낮의 라디오 같은 데서도 좀처럼 들을 수 없을 이야기. 그래서 나는 쓴다, 내 말을 믿을 이가 몇이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사실, 나 역시 바로 어제의 일들조차 아주 오래된 기억처럼 아련하기도 하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대도 아쉬울 건 없다. 적어도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가져 줄 관심,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낙원 인공위성 궤도처럼 똑같은 코스를 순환하는 마을버스의 출발점은 어디일까? 어디라도 시작이고 어디라도 끝이 되는, 그래서 참 안정적이지만 그만큼 밋밋하고 갑갑한. 어쨌거나 사람들이 가장 많이 타고.. 2023. 2. 15.
거울 봄볕이 눈부신 오후였다. 아버지는 일부러 그렇게 아늑한 날을 골랐을 것이다.  내가 대문을 들어서는 기척에도 아버지는 한동안 정성 들여 거울만 닦으셨다. ‘다녀왔습니다’ 하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당신을 지켜보던 내게 잠시 눈길을 주셨지만 이내 손에 쥔 걸레를 깨끗이 빨아 한 번 더 꼼꼼히 닦고서야 마무리하셨다. 아버지가 거울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신 뒤, 텅 빈 마당은 어느 한옥의 고즈넉한 오후 풍경처럼 조금 쓸쓸해졌다. 나는 왠지 그 일련의 과정에서 아버지의 온 생애를 본 것만 같았다. 짧고도 긴 시간이었다. 천성이 조심스러운 아내는 내가 보지 못한 그 오후의 일을 전해주며 염려와 곤혹이 섞인 표정으로 치매라는 말을 꺼냈다. 작정하고 닦는다면 십 분이면 충분할 일을 한 시간이 넘도록 붙잡고 계셨으니 아내가.. 2023. 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