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알아. 그래서 막 설레.
뭘 알게 된 지는 확실치 않아. 하지만 분명히 나는, 몰랐던 뭔가를 알게 됐어.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무언가를.
이상하지? 뭔지도 모르면서 안다고만 말하는, 이런 바보 같은 상황을 당신은 이해할까?
이런 것과 비슷할까?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세상이 달라져 버렸어. 잠에서 깬 게 아니라 어리고 작은 세상에서, 무지몽매하게 있던 조금 전까지의 내게서 깨어난 거지. 가까이에서 늘 작동하고 있었지만 몰랐던 세상의 질서가 갑자기 보이기 시작해. 내가 변한 건지 나를 둘러싼 것들이 달라진 건지 알 수 없지만, 보이고 들리는 것들은 그대론데 내가 그걸 이해하는 방식은 전과는 완전히 달라.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더 멋진 말, 나중에도 가슴에 남겨둘, 그런 문장으로 전하고 싶어서 오래 고민했고 몇 번을 쓰고 지웠어. 어떻게 해도 내 마음 그대로가 아닌 것 같아서, 내 부족한 상상과 어휘가 아쉬워.
그래도 나는 알아. 내가 그만큼 자랐다는 걸. 아직도 멀었지만, 덕분에 아주 많이, 완전함에 가까워졌다는 걸.
모든 건, 당신을 알아서, 당신을 위하는 내 마음을 알아서.
- S.H.
“아직도 성혼(成婚)을 거부하고 법이 정한 20년 이상의 희생을 배우자에게 간구하며, 사회가 보장한 더 큰 세상으로의 도약을 거부하는 패배자가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왜 헤어지지 못합니까? 이제는 무척 소수이기는 합니다만, 그들은 우리 사회가 공공의 영역에서 치료하고 구제해야 할 환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연단에 선 발제자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기현은 그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을 향해 내뱉는 비난 같았다.
“지금까지 제시한 여러 분야의 수치들은 우리가 30년 전 시행한 ‘성혼’ 제도가 분명 우리 사회의 존속에 필요한 많은 부분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각계각층의 복잡다단한 의견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고, 각각의 주장이 결코 쉽게 타협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어서 사회적 합의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쳤지만, 벌써 오래전에 구닥다리가 된 전근대적 생활방식에서 새로운 관계 정의로 옮겨가는 사회 전반의 현실을 한발 앞서 시스템화함은 물론, 예측 가능한 여러 부작용을 보완할 장치까지 과감히 제도화함으로써,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효과는 최대화하고 새 제도로 인한 부작용은 최소화한, 그야말로 건국 이래 최고의 정책이 아니었나 합니다.
결혼에 20년이라는 시한을 두는 것으로 ‘영원’이라는 부담이 사라졌고, 20년이라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시간 동안 서로에게 집중하게 되어 부부간 애정도가 높아졌으며, 가정에서부터 가부장적 문화를 벗어던질 수 있게 함으로써 고질적 병폐였던 사회적 성불평등의 문제도 자연히 개선되는 상승적 피드백이 일어났습니다. 이혼율이 10% 이하로 떨어졌고, 20년의 결혼생활을 완료한 성혼 이후의 안정적인 삶을 국가로부터 보장받기 위해 대부분 가정이 2자녀 15년 양육 의무를 지키면서 0.5까지 곤두박질쳤던 출생률이 1.8까지 올라왔습니다. 아직 인구 추이가 순증으로 돌아선 건 아니지만, 당장의 국가 존립 위기는 극복했다는 뜻으로, 그간 엄청난 예산 투입과 캠페인, 여러 가지 제도개선에도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던 인구정책을 성공시킨 단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겠습니다.
단지 국가를 위한 제도가 아닙니다. 여러 수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무엇보다 중요한 국민 개개인의 행복도가 증진되었습니다. 빈발하던 노령 부부간 갈등, 그런 속에서도 건강과 경제적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동거하면서 생기는 사고들, 그로 인해 자식 세대까지 전가되던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전업자녀(專業子女)’로 불리며 부모 세대에 의존하던 젊은이들의 자연스러운 독립을 유도하고 그 책임을 국가가 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 노년 세대까지 모두 각자의 삶에 충실할 수 있게 된 점은 획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겠습니다. 가정에서의 갈등이 줄어든 만큼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사건 사고도 줄고 모두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에 집중, 발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들 동의하시듯, 이 제도가 계속 유지 발전될 수 있도록 세심한 부분까지 가다듬는 것이 국가 발전과 국민 행복을 증진하기 위한 최선이라는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상대편의 발제가 단정적인 끝을 향해 가는 동안, 기현은 테이블에 올려둔 핸드폰을 반복해서 확인했다. 소혜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멀리 내다볼 수 있다면 좋겠어. 남들이 못 보는 걸 보는 혜안을 원하는 게 아니야.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그 속에서 나는 어떤 위치까지 갈 수 있을지, 그런 건 난 별로 궁금하지 않아. 너와 나. 우리가 어떻게 변해갈지, 너 하나로, 나 하나로, 그런 거 말고, 서로가 아닌 우리가 어떻게 나이 들어갈지, 난 그게 무척 궁금해.
이제 우리가 함께 할 시간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겠지. 우리가 모르고 살아온 인생의 반과 똑같진 않을 거야. 아니, 같아서는 안 되지.
다만 아름답기만을 꿈꾸지는 않아. 기쁨과 행복만을 바라는 순진한 마음뿐이라면, 나뿐 아니라 너까지 힘들게 될 거야. 안 그러면 좋겠지만, 덜 아프면 좋겠지만, 혹시 어려움을 겪더라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 네게 내가 있고, 내게 네가 있다는 것만으로 힘을 낼 수 있기를, 서로에게 충분히 기대어 지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야.
네가 있다는 것을, 내가 있다는 것을, 숨 쉬는 것처럼 잊지 말길.
- K.H.
“민 교수님! 민기현 교수님!”
사회자의 다급한 멘트를 듣고서야, 기현은 마이크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일부러 힘을 빼고 템포를 죽인 기현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장내에 퍼졌다.
“네, 수치상 이견의 여지가 없는 건 분명합니다. 이런 발제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하는 건 무모하겠지요? 설득은 더 어려울 테고요. 그런데 제가 지금부터, 그 어려운 일을 좀 해볼까 합니다.”
기현은 잠시 말을 끊고, 탁자 위에 준비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수치라는 거, 정확합니다. 게다가 편리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는 수치로는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대부분은, 누구나 느끼고는 있으나 겉으로는 표현이 잘 안되는 것들이지요. ”
기현은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건조하게 말하려 애썼다. 하지만 건너편에 앉은 상대 패널은 물론, 앞선 발제에 큰 박수로 호응한 청중들도 그에게 동조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달에 결혼 19년이 완료되고 다음 달이면 20년차가 시작될 거였다. 성혼을 하지 않고 계속 살려면 적어도 혼인 만료 10개월 전에는 속혼의향서(續婚意向書)를 법원에 제출해야 했다. 두 사람의 합의가 자발적이라는 것과 속혼 이후 계획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꼼꼼한 검증을 통과해야만 법원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미완혼(未完婚)으로, 국가가 성혼 가정에만 주는 사회보장 없이도 충분한 삶을 이어갈 수 있다고 판단되더라도, 법원은 100일간의 숙려기간을 지정했다. 만에 하나 선택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한번 결정하면 되돌릴 수 없으니까. 속혼 자체는 나중 언제라도 이혼 절차를 통해 종료할 수 있지만, 그때 가서 성혼자에게 주어지는 각종 국가지원을 다시 신청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성혼을 포기하고 속혼을 선택한 순간, 성혼에 따른 사회보장 역시 포기해야만 했다. 결혼 20년이 되는 날 두 사람이 함께 구청에 가서 간단한 서류를 내고 상징적 선언만 하면 되는 성혼에 비해 속혼은 절차가 너무 까다로웠다. 그만큼 국가도 권하지 않고, 사회적 시선도 따가웠다.
구청에서는 성혼을 선언하는 커플을 축하하는 행사가 매일같이 열렸다. 그간의 충실한 결혼생활에 대한 격려와 다가올 새 삶의 출발을 응원하는 자리. 가족, 지인들이 몰려와 색종이를 뿌리고 폭죽을 터뜨렸다. 다 같이 사진을 찍고 나면 보통은 예약해둔 피로연장으로 몰려갔다. 거기서 주인공 두 사람은 각자의 계획과 자녀들의 진로를 발표했다. 참석자들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기본 책임을 다한 성혼자를 격려하고, 부모의 품을 떠나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는 자녀들의 장래를 축복했다. 그 하루는 온전히, 성혼을 이룬 가족을 위한 날이었다.
기현도 벌써 몇 번, 지인의 성혼 피로연에 참석한 경험이 있었다. 지난 20년의 결혼생활이 좋았든 아니든, 그 긴 시간 동안 각자가 얼마나 좋은 배우자였고 부모였는지 상관없이 누구나 그날의 주인공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삶의 전반기 중요한 숙제를 마치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생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희망에 차 있었다. 기현도 사람들 속에서 그들을 축하하고 축복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의 헛헛함은 외면할 수 없었다. 즐거운 자리에서 티를 낼 순 없었지만, 20년이라는 세월, 두 사람이 정성을 들여 주고받은 그 시간의 무게가 오직 국가와 사회 시스템을 위한 복무일 뿐인가 하는 서글픔이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기현은 핑계를 대고 성혼식 초대를 피했다. 그만큼 다가오는 자신의 결혼 만료일에 대한 압박은 커져만 갔다.
새 삶을 축복한다고들 하지만, 기현은 새롭지 않은 그대로가 좋았다. 아이들이야 소혜와 기현 두 사람의 성혼 여부와 상관없이 독립할 나이가 되었다. 어차피 신혼과 같은 폭발적인 감정교류는 없고, 각자의 일이 있으니 매일 같은 집에서 마주하지도 않겠지만, 굳이 두 사람 사이의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하고 단절시키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고생을 하고도 앞으로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말똥말똥한데, 소파에서 코 골며 자는 당신! 이건 경고장이야. 알아 둬!
경고 하나!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당신은 몰라. 그래도 안다고 하겠지? 그래서 내가 미리 경고하는 거야. 앞으로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오늘 내가 아팠던 거만큼 당신도 아팠다고 얘기하면 가만 안 둬! (물론 당신도 아팠겠지. 안 아팠다는 거 아냐. 내 손 잡고 우는 거, 나 봤다! 내가 산통으로 정신없다고 못 본 줄 알았지? 안 들키려고 고개 돌려 눈물 훔치는 것도 다 봤지. 그래도 그건 마음이 아픈 거고, 애 낳는 고통이랑은 비교불가!)
경고 둘! 내가 이렇게 아프고 힘들여 낳은 우리 햇콩이한테 잘 못하면 정말 가만히 안 둬! 나 오늘부터 애도 낳아 본 대한민국 아줌마야! 이제 무서운 거 없는 거 알지? (사실 오늘 금방 난 거 보고 못냄이라 좀 실망했는데,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착한 아이로 키울 거니까, 당신도 최선을 다해서 협조해야 해. 알았지?
아, 우리 엄마도 나 낳고 이랬겠지? 나 낳을 때 열두 시간인가 틀었다고 하던데, 울 엄마는 나 낳고 이런 생각도 못하고 그냥 기절했을까? 아, 엄마 보고 싶다. (그치만 있다가 엄마 와도 그런 얘긴 하지 마. 나중에 내가 할 거야. 당신이 먼저 하면 스포일러다. 보기만큼 입이 가벼운, 특히 우리 엄마 아빠한텐 더 그런 여보야, 명심해!)
나, 내가 생각해도 너무 대단한 거 같아. 제왕절개 안 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근데 좀 불안하기도 해. 내가 정말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키우는 건 낳는 거보다 더 힘들다는데, 정말 딱 나 같은 애면 어떡하나 싶기도 하고. (그럼 그땐 당신이 잘 다독여야 된다. 나 발작 버튼 눌렸을 때 당신이 내게 하는 것처럼. 믿는다, 믿을 거야.)
근데, 사랑해. (아, 경고장에 이런 거 쓰면 안 되는데. 뜬금없겠지만, ‘섬뜩하게’ 사랑해. 결국 나한테 잘 못하면 큰일 난다는 말이야.)
사랑해.
- S.H.
드러내놓고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보니 친한 몇몇 말고는 그런 고민을 나눠보지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성혼을 포기하겠다고 얘기하면 일단 어딘가 흠결이 있거나 잘못된 길로 빠지는 사람으로 전제하고서, 어김없이 가르치려 드는,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대화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나마 그건 기현을 아끼는 사람들 경우였다. 제삼자 얘기처럼 말을 꺼내면 아예 객관적인 시각으로, 불륜 사연을 대하듯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차라리 불륜은 당사자들 간의 사생활이라 치부하고 말겠지만, 성혼 거부는 사회적 합의에 대한 외면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반사회적이고 무책임하다는 낙인까지 덧씌워졌다.
소혜를 사랑해?
누가 됐든, 기현이 어렵게 속혼 얘기를 꺼내면, 그것부터 먼저 물었다.
사랑?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생각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해봤지만, 대체 뭐가 사랑인지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죽고 못 살아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사랑이고, 그림자처럼 드러나지 않고도 서로를 응원하고 위안받는 것도 사랑이다. 형태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감정이 중요하다는 것.
어떻게 증명하나? 증명할 방법이 있다 해도, 왜 내 사랑을 남들에게 증명해야 하지?
사랑하지, 당연히. 가까이에서 봤으니 알잖아? 내가 얼마나 가정에 충실한지. 그리고 소혜를 얼마나 아끼는지.
기현이 그렇게 답하면, 그럴수록 성혼을 해야 한다고들 했다. 사랑하는 이를 더는 구속하지 말라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기현이 20년간 충실했듯, 소혜도 그랬을 거라고. 소혜도 같은 마음이라면 말릴 수는 없겠지만, 소혜가 아니라 하면 더는 미련을 갖지 말라고. 소혜를 사랑한다면, 설령 소혜가 속혼을 원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되는 거라고.
서로 얘기는 해 봤어?
속혼의향서를 작성하자고, 어렵게 얘기를 꺼낸 게 지난 달이었다. 함께 차린 저녁을 먹은 뒤, 늘 하던 대로 루이보스 차를 마시며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특별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 소혜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기현은 생각했었다. 소혜 앞에서 이미 여러 번 성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밝혀왔고 소혜도 거기에 딱히 뭐라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혜의 얼굴이 일순 굳으며 특유의 미소가 사라지고, 분노와 슬픔과 원망이 섞인 눈빛이 기현에게 꽂히고 나서야 기현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지난 결혼 생활 내내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기본은 솔직함이었다. 가감 없는 솔직함. 더도 덜도 유추할 필요 없이 말하고 보여주는 그대로인 숨김없음. 그것이 서로 확인하고 약속하는 절차 없이도 이해하고 지켜지는, 암묵적으로 동의한 둘 사이의 첫 번째 규칙이었다. 가끔 지나친 솔직함에 서로 상처받기도 했지만, 그건 숨기고 가장해서 생길 더 큰 문제들에 비하면 훨씬 가벼운 것이라는 데 두 사람 다 동의했다. 그러니 솔직한 생각의 표현이 갈등으로까지 발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기현과 소혜는, 숨기는 것보다는 드러내는 것에, 외면하는 비겁함보다는 직시하는 용기에 더 높은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믿어 왔었다. 그러니, 속혼에 찬성하지 않더라도 그런 말을 꺼내는 것조차 거부하는 소혜가 기현은 낯설었다.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입술만 떨다가 결국 한마디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소혜를, 기현은 황망히 바라만 봤다.
소혜는 방문을 잠갔다. 기현이 두드렸지만, 저쪽에서 넘어오는 건 흐느낌뿐이었다. 소파에서 새벽까지 뒤척이다 설핏 잠들었는데, 깨어보니 소혜는 없고 식탁에 메모가 있었다.
먼저 출근해. 당분간 회사 근처에서 지낼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당장은 통화가 무용할 것이었다. 기현은 우선, 메시지를 보냈다. 짧게, 진심을 담아.
그래, 알았어. 뭐라도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저녁에 전화했지만, 소혜는 받지 않았다. 그 후로 기현은 여러 번 메시지를 보냈다. 짧게, 길게. 자신의 마음과 그간 생각해 온 것을 나름 잘 전달하려 애쓰면서. 잘하는 일인지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벌써’라든가 ‘어느새’ 같은 말은 쓰지 않을래. 우리가 함께 한 지난 10년을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순 없거든.
이미 다 커서 충분한 어른인 줄 알았는데, 그동안 우린 또 많이 자란 것 같아. 내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된 거라면, 그건 내 곁에 당신이 있었기 때문이야.
많은 일이 있었어. 사소하고 별것 아닌 일부터 결코 잊지 못할 기쁜 일, 슬픈 일. 당신과 나, 우리를 닮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는 다 할 수 없어.
손. 나는 그렇게 얘기할 거야. 지난 10년에 대해 딱 하나만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편지를 쓰던, 찻잔을 들던, 아이를 안던, 오이와 양파를 썰던, 그림을 그리던, 운전을 하던, 나를 부르던, 내가 반지를 끼우던, 서로 꼭 잡은, 하얗고 예쁜 당신의, 투박하고 못생긴 나의, 손. 내가 당신을 당길 때도, 당신이 나를 끌 때도, 우리가 놓지 않고 잡고 있던 손.
우리가 맞잡은 손은 함께한 모든 순간에서 언제나 가장 빛나고 있었어.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지. 언제든 당신이 그 손으로 나를 붙잡아 줄 것을. 나는 준비되어 있었어. 저항 없이 당신이 이끄는 대로 가리라. 눈을 가려도, 귀를 막아도 좋아. 당신의 손이 이끄는 곳이라면.
당신과 우리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 K.H.
“나는 당신에게 잘못한 게 없잖아? 그러니 당신은 내게 속혼을 요구할 권리가 없어. 그건 알지? 당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우리도 우리지만, 애들은 생각해봤어? 성혼을 하든, 속혼을 하든, 어쨌든 그건 우리의 선택이니까 우리는 남들이 뭐라 하고 손가락질 한대도 받아들인다고 쳐. 그치만 애들은? 걔들은 다른 애들과 다르게 미완혼 부부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국가 지원에서도 차별받고, 색안경 끼고 보는 시선들을 어떻게 감당하랄 건데? 그건 아니잖아?”
“애들이 아니면, 당신은 나와 결혼을 계속 이어갈 마음은 있고?”
“아니,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 남들처럼 성혼해서 훈장처럼 주어진 남은 삶 동안, 20년간 못 했던 하고 싶은 일들 하면서. 나 그럴 자격 있어. 지난 20년 충분히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정말, 우리 사이에는, 남들과 다른 게 없었나? 나는 있다고 믿었는데. 제도가 묶어둔 거 말고, 제도가 어떻대도 우리 두 사람은 결코 져버릴 수 없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랑? 당신이 말하는 거 그거야? 사랑했지. 지금도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20년을, 그 긴 시간을 시작했고 함께 했겠어? 나라에서 얼마를 지원하든, 사랑이 없다면 그게 가능이나 해? 아니잖아? 지금까지의 시간, 거기에 1년을 더 보태 성혼을 하겠다는 내 마음 말고 어떻게 더 내 사랑을 증명해야 해?”
“정말, 당신은 나 없이 살 수 있어? 정말?”
소혜는 뜨악하게 기현을 바라봤다. 한심하달까, 순진하달까. 20년 가까이 함께 살아온 사람이 맞기는 한가, 하는 표정으로.
“그래. 살 수 있어.”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금까지 지긋지긋하게 싫었던 거 절대 아니지만, 성혼 후에 내게 주어질 삶에 대한 기대에 나 너무너무 설레. 여보, 당신도 그걸 생각해야 해.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새로운 시간이, 새 환경이 시작되는 거라고. 가족의 틀에 묶여 있던 남자가 가장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그냥 당신 한 사람으로 살아 볼 시간이라고. 50이 다 돼서, 드디어 그런 시간이 오고 다들 응원도 해준다는데 그걸 왜 안 하려고 해?”
아니,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 내가 최선을 다해 이루고 지켰던 내 가정에서 내 삶이 다 하는 날까지 늙어가는 거.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보다 우리가 애썼던 것들에서 결실과 의미를 찾으면서 혼자가 아닌 우리의 삶을 함께 정리해 가는 거. 늘 그랬듯이 앞으로도 계속 우리로.
머릿속에 있는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소혜의 단호함에, 어떻게든 얘기를 한다 해도, 그런 말이 의미를 가지긴 어려울 것 같았다.
소혜의 말대로 시간이 걸릴 일이었다. 그러니 진작 논의를 시작했어야 했다. 의견을 모으는 건 지난한데, 시간은 법이 정한 기한을 향해 재깍재깍 다가가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기현은 이런 설득의 적임자였다. 석사 학위부터 교수가 된 지금까지 가족의 형태와 구성원간 유대감의 깊이, 가족 형태의 변화와 사회구조의 상관관계, 그로 인한 문제점과 대책, 가족이라는 단위를 사회 발전의 동력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방편 같은 것을 연구하고 가르쳐왔다. 사회과학대학 가족심리학과 교수 민기현.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 어려웠다. 성혼의 필요성을 남들보다 더 잘 알면서 정작 본인은 거부하고 우기는 위선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이 기현이 기꺼이 성혼제도 공청회의 반대측 패널이 된 이유였다. 진심을 말하고 싶었다. 하나 더, 청중을 설득할 수 있다면, 소혜에게도 진심을 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정부가 매년 개최하는 공청회였다. 원래는 성혼제도가 사회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고 제도를 보완, 개선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도입 30년이 넘어가는 성혼제도가 사회에 충분히 녹아들고부터는 제도에 대한 상찬 일색의 요식적 행사가 되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세계에서도 전례가 없는 방식의 개혁이었고, 그 성과도 작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반대측 발제라고 해봐야 지엽적이고 사소한 문제 몇 가지를 억지로 찾아내 언급하는 것에 그쳐왔다. 결국 서로들 하려는 찬성측에 비해 패널 구하기가 어려웠고, 덕분에 유명세가 높지 않은 기현에게도 섭외 연락이 왔었다.
기현이 하려는 건 무조건적인 반대가 아니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성혼제도가 가져온 긍정적인 변화는 기현도 인정하는 면이 있었고, 제도 자체가 이미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태생적으로 배태할 수밖에 없는 이면이나 그늘이 있기 마련이었다. 성혼제도도 예외가 아닌데, 사회가 암묵적으로 모른 척하는 그 부분을 조명하고 싶었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다. 인간의 생존에는 여러 물리적 조건도 필요하지만, 감정의 보호도 꼭 필요하다. 특히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관계 맺음이 필수인 인간에게는. 그러니 국가의 존폐, 설령 인류의 생존 여부가 달렸다 해도, 어떻게 ‘사랑’과 ‘정’이라는 개인의 감정에 정해진 시한을 강요할 수 있는가? 다수가 찬성한다고 해서 동의하지 않는 소수에게까지 강제할 수 있는가? 아니면 소혜의 말처럼, 성혼을 원하지 않는 자신은 정말 이기적인 사람인가? 기현은 의문을 풀고 싶었다.
“지금 여기 오신 분 중에도 이미 성혼선언을 하신 분이 계시겠지요? 혹시 있으시면 손을 한 번 들어봐 주시겠어요? 네, 따로 질문을 드리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그냥 한 번 파악해 보려는 거에요. 아, 네. 열 분이 좀 넘네요. 여러분들과 깊고 진솔한 얘기를 꼭 나눠보고 싶지만, 오늘은 그럴만한 자리가 아니라 아쉽습니다. 그럼, 혹시 성혼을 거부하고 속혼을 선택하신 분은 계실까요?”
갑자기 장내가 술렁거렸다.
“네, 무슨 소리 하나, 하고 놀라셨을 겁니다. 설령 속혼하셨다고 해도 손들고 나설 리 만무할 텐데, 그러지 못할 걸 알면서 손 들어보라는 저놈은 또 뭐냐 싶으시죠? 그래도 한 번 더 여쭤볼게요. 혹시 안 계십니까, 속혼하신 분?”
기현은 청중을 둘러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네, 역시 없으시군요.”
뭐가 정답일까? 당신도, 애들도, 다 제 하고 싶은 대로네.
어떻게 바꾸고 고쳐주고 싶지만, 잔소리, 잔소리. 그런 사람으로 보일까 봐 얼마나 조심하는지. 그러다 보면 때를 놓치고 어쩔 수 없이 지켜보는 모양의 반복.
문득, 생각해. 귀찮고, 귀찮다….
아침마다 창가에서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잠을 깨우는 비둘기 같아. 하루에도 몇 번씩 어떻게 해 버릴까 싶다가도, 이내 어쩔 수 없다, 생각하거든. 여기서 쫓겨나면 쟤들은 어디로 가나. 나는 쟤들을 쫓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야 하나…. 내가 사랑하고, 내가 낳은 비둘기들.
하지만 언젠가는 날아가겠지. 계속 거기, 안방 베란다 에어컨 실외기 틈에 머물진 않겠지. 시끄럽고 신경 쓰이는 소리는, 사실은 날기 위한 연습인 거겠지? 때가 되면, 먼 곳을 향해 날아오르겠지? 그동안 나는, 깃털과 배설물을 적당히 치우면서, 새끼 비둘기의 머리에 마지막 남은 잔털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야.
당신은 나와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려나? 그렇게 새를 싫어하는데도?
내가 틀렸나? 다 제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다 제 나름대로인 건가?
- S.H.
“여러분, 드라마나 영화 좋아하세요? 소설, 하다못해 친구가 전해주는 이야기도 재미있는 것과 지루한 것이 있죠? 요즘 영화는 진행이 너무 빨라서 잠시만 한눈팔아도 얘기가 확 지나가 버리곤 해요, 그렇죠? 아, 저만 그런가요? 하하. 그런데 이, 재미있는 영화나 드라마와 지루한 것들의 차이가 뭘까요?
여기 한 편의 영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일생을 보여준다고 쳐요. 아니 일생은 너무 기나? 그냥 한 1년 정도를 보여준다고 합시다. 그런데 영화 시간은 길어야 두세 시간이에요. 두세 시간에 1년을 어떻게 담죠? 네, 필요한 것만, 보여주고 싶은 장면만, 임팩트 있고 이야기 전개상 중요한 부분만, 서로 개연성을 갖고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장면만 보여주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것도 현재에서 과거로, 또 미래로, 시간을 막 넘나들지요?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전부를 순서대로, 24시간 그대로 보여준다면 너무너무 지루하겠죠. CCTV 영상을 영화라고 하진 않잖아요?
‘뜬금없이 웬 영화?’ 하시겠지만, 저는 우리 삶이 이 중 어떤 것에 더 가까울까 생각해 봅니다. 죽기 전에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고 하지요? 정말 그런 게 있다면, 그건 정말 영화 같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진짜 삶은 어떤가요? 자고, 먹고, 일하고, 숨 쉬는 우리 일상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건 영화보다는 CCTV라고 해야겠네요.
네, 재미없습니다. 지루합니다. 본 걸 또 보고, 한 걸 또 합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어느 쪽일까요? 멋진 이벤트와 절정의 순간? 기억하기 좋고 얘기하기 좋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분명히 지루하고 재미없는, 기나긴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지루하고 재미없는 시간이 바로 우리 인생을 떠받치는 뼈대가 아닐까 싶어요. 화려한 인테리어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늘 건물을 든든히 지탱하고 있는 기둥과 보처럼요.
여행 좋아하시죠? 멋진 장소 찾아가시고, 유명하고 맛있는 음식도 드십니다. 사진도 많이 찍지요? 폼 나게 포즈 잡고서. 그런데, 다녀오고 나서 나중에, 문득문득 기억나는 건 뭐던가요? 에펠탑이나 자유의여신상 앞에서 사진 찍은 거? 나이아가라나 이과수 폭포의 장관? 아, 외국만 예를 들었네요. 우리나라에도 좋은 곳 많습니다. 어쨌든, 저만 그런지 몰라도, 정말 두고두고 기억나는 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어떤 순간, 목적지를 찾아가던 어느 골목, 계획에 없이 들어선 허름한 식당, 그곳에 앉아서 나눴던 시답잖은 얘기. 그런 것들 아닌가요?”
기현은 청중의 몰입도가 궁금했다. 정말 이런 얘기가 먹힐 수 있을까? 기현은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겁니다. 우리 삶이라는 건, 특히 개개인의 삶은, 모두 어떤 하나의 계획에 의해 재단되어 통제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거예요. 무계획적으로 우연에 의지한 삶을 살자는 게 아닙니다. 계획이 필요하고, 계획대로 실행하고 착오가 생기면 수정해서 또다시 계획을 잡으면서 살아야죠.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어야 합니다. 국가에 의해 강제되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계획은 바람직하지, 옳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과 결혼, 가정과 양육에 관한 것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공권력의 개입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적절해야 하고 최소한이어야 합니다. 다수 국민의 동의가 있다고 해서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떠받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간에게 절대적인 기준은 바로 인간 자체이지 제도가 아니니까요.
앞서도 보고되었고 우리 모두 주지하다시피, 성혼제도가 이뤄낸 성과는 작지 않습니다. 출생율, 중요합니다. 국가 존립의 기본 조건입니다. 그걸 반등시켰으니 국민의 지지를 얻을만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국민 각자에게 행복과 만족으로 작동한다는 증거일 수 있을까요? 오히려 개인의 삶을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의 존속을 위한 기초단위로 만들고, 그런 기능적인 부분만 극단적으로 강조하여, 가정의 구성원이자 국가의 구성원인 개인의 개성을 통제하고 삶을 획일화하는 것은 아닐까요?”
장내가 술렁였다. 혀를 차는 사람들, 비난이나 실망이 역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몇몇은 고개를 끄떡였다.
“성혼제도는 사랑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관계와 가정의 종료를, 시한을 정해 강제하고 있습니다. 결혼과 가정은 스포츠 게임이 아닙니다. 축구는 전후반 90분, 야구는 공수 교대하며 9이닝처럼 한국에서의 결혼은 이유 불문 20년! 이게 맞을까요? 끝을 낼 수도 다시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당사자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결정될 일입니다. 국가의 역할은, 어떻게 결정이 되든, 그 결정이 야기할 수 있는 개인의 불안과 위태로움을 상황에 맞게 제거하고 보호하여 사회에 안착하도록 지지하는 것입니다. 그 결정에 관여하는 게 아니라요. 그게 사회안전망 아닐까요? 물론 국가의 좋은 역할이 기본이 되고 사회 전반의 협력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보태져야 더 완전에 가깝게 되겠습니다만, 일단 국가의 역할에 한정해서 얘기하는 겁니다. 지금은 ‘성혼’이라는, 국가가 정한 제도에 관해 얘기하고 있으니까요.
국가가 주는 사회보장의 조건을 채우기 위해 20년 시효의 결혼을 하고 그동안만 사랑해야 한다는 건 국가의 폭력입니다. 여행에 비유하자면, 국가가 짜놓은 일정대로만 다녀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코스, 다른 곳을 여행하려는 이들에게는 일제히 비난을 퍼붓습니다. 왜 너만 튀냐? 그냥 따라오면 되는데! 같이 가야 빠르지 않냐! 네,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목적지에 더 빨리 닿습니다. 군사 작전처럼요. 하지만 우리는 군인이 아닙니다. 오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작전계획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각자가 알아서 계획하고 수행한 다양한 경험을 모아 더 바람직한 방향을 찾고, 그 과정을 누리는 게 삶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군인은 목적을 가진 도구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전체의 목적을 위해 사소한 작은 것들, 사실은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CCTV 같은 일상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저는 묻습니다.
이제 몇 가지 수치와 그래프를 보여드리죠. 앞서 성혼 제도를 찬양하신 발제자께서 다루신 똑같은 사안의 분석이 어떻게 해석되는지 비교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치라는 건 정확하고 편리한 만큼 속기도 쉬우니까요.”
엄마! 나야, 엄마 딸!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럽고, 제일 예쁜 우리 엄마, 생신 축하드려요. 실은 내가 엄마 미역국 끓여드리려고 했는데, 아빠한테 선수를 뺏겼어. 나 엄마 닮아서 뭐든 뚝딱 잘 만드니까, 라면이나 겨우 끓이는 아빠보다는 내가 하는 게 훨씬 더 맛있을 텐데. 아빠 고집이 너무 세서 말릴 수가 없었어. 혹시 맛없더라도 엄마가 이해해. 아니다, 엄마는 아빠가 뭘 하든 다 좋아해 주니까 이것도 맛없을 수 없으려나?
엄마! 저번에 엄마한테 화내고 성질부린 거 미안해요. 나도 엄마 말이 다 맞는 거 아는데, 그런데도 딱 그렇게 안 될 때가 있어. 나중에 꼭 후회하면서도, 당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 같아. (이건 누굴 닮은 거? 나는 엄마 아빠 딸이니까, 분명 두 분 중 한 분일 텐데. ^^)
다음부턴, 혹시 그렇다 해도 엄마하고 차분히 얘기하고 엄마 얘기를 잘 들어볼게요. 꼭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한다고는 약속할 수 없지만,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애쓸게. 그리고, 엄마가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설명도 해볼게요. 엄마가 속상해하는 거, 나 싫어요. 나 때문에 그런 일 안 생기도록 할게. 그러니까 엄마, 엄마도 전처럼 환하게 자주 웃어줘. 엄마 웃을 때 제일 예뻐.
생신 축하드리고요, 선물이 별거 아니라고 실망 마시고! 내가 나중에 돈 왕창 벌어서 엄지손톱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 끼워드릴 거니깐! ㅎㅎ
장내가 정돈되기를 기다려 기현은 발제를 이어갔다.
“성혼제도가 진정 우리 사회가 자발적으로 원한 문화일까요? 혹시나 그건, 어쩔 수 없이 떠밀린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문제가 된 우리 사회 구조의 변화를 본질적으로 되돌릴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이 제도를 받아들였을까요?
대안은 있냐고 묻는 분 계실 겁니다. 네, 이상적이고 현실성 없는 얘기일 수 있습니다. 공권력으로 강제하는 것처럼 당장 가시적인 효과를 낼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어디까지나 어쩔 수 없어서 선택한 차선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차선은 차선일 뿐입니다. 차선을 선택하고선 거기에 안주하고, 그 차선을 더 공고히 하려고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계속 최선을 찾아야지요!
이제 정말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을,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가는 일을, 한 번뿐인 일생의 설계를, 법이 강제한 대로 따라야만 할까요? 그게 맞을까요? 그것이 아무리 국가, 아니 인류의 존망에 관한 일일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충실한 구성원이어야 하지만, 삶의 본질마저 포기하고 생산과 소비의 사회적 기능에만 특화된 부품이 될 순 없습니다. 제도의 장점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이면에서 무시되고 외면받은 인간 본연의 가치를 살펴야만 합니다.
성혼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사회적 합의라면, 당장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라도, 보완은 꼭 필요합니다. 속혼을 선택하는 사람에게도 성혼을 선언하는 사람과 똑같은 사회보장을 해야 합니다. 성혼제도를 국민 대부분이 진정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지난 30여 년 동안 우리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면, 사회보장을 볼모로 강제하지 않더라도 당연히 많은 사람이 그쪽을 선택할 겁니다. 사회보장의 차별을 없애자 속혼을 선택하는 사람이 증가한다면, 그건 공권력에 떠밀려 제도에 순종해온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겠지요. 정말 그렇다면, 우리가 성혼제도로 해결하려 했던 여러 사회 문제들을, ‘성혼’이라 꾸며 부르는 ‘강제 이혼’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풀어야 한다는 방증이 되지 않을까요?”
경청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힘주어 말하는 순간, 기현은 알았다, 소혜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소혜와 자신은, 부부 사이는, 지금 기현이 역설하고 있듯이, 논리와 이성에만 기반한 설득으로만 움직일 수 없다. 사랑은, 감정은, 결코 그런 게 아니니까. 소혜의 선택이 아무리 제도의 반복 세뇌에 경도된 것이라 해도, 그걸 되돌리는 건 오랫동안 누적된 둘만의 교감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었다. 한 번의 멋진 브리핑이 아닌, CCTV 같은 일상에서 켜켜이 쌓아온 무엇. 사랑, 익숙함, 혹은 정, 편안함이나 길듦, 때론 밉지만 떨칠 수 없는 미련 같은 것. 이미 만들어져 있을 뿐 새로 보탤 수 없는 것. 좋았던 기억을 되짚는다 해도, 미래에 대한 부푼 약속을 늘어놓아도, 바꿀 수 없는 것들. 속혼을 반대하여 기현에게 조언하던 이들도, 기현 자신도, 감정에 기반한 사랑을 형식의 모음인 제도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을, 기현은 그때 깨달았다.
기현의 눈에서 초첨이 흐려지고,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우리가, 우리가 속혼 가정을 일컬어 말하는 ‘화목혼’이나 ‘참가정’이라는 말, 사실은 그 말이 속혼인에 대한 낙인을 무마하려는 분칠 같은 것이라는 걸 다들 압니다. 하지만 정말 큰 미화는 ‘성혼’이라는 말 자체죠. 20년을 채운 이혼을 어떻게 결혼의 완성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혼인의 완성이라는 게 정말 있기는 한 걸까요? 어떤 결혼을 진정 완성된 형태라 할 수 있나요? 숙고해볼 문제입니다만, 간단치 않으니 일단 차치하겠습니다.
어쨌든 속혼을 선택한 사람은 사회 낙오자로 공공연히 비난받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있어도 주어질 엄청난 대가를 포기하고 그 선택을 했는데 말입니다. 그런 대가를 치르고라도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고, 그런 선택을 해야만 하는 그들의 마음을, 우리 사회는 진정 경청해볼 수는 없을까요? 주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하고, 같아지기를 강요하는 일, 이제는,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렵게 발제를 마무리 지은 기현의 고개가 꺾였다. 맞지만 무효한 말이었다. 공청회장의 스피커를 통해 소혜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당신 말 틀리지 않아. 그래도 난 내 생의 후반을 다르게 살아볼래, 당신 없이.
자리에 돌아오는 기현의 무릎에 힘이 빠졌다. 다행히 넘어지지 않고 곧 걸음을 수습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원 없이 사랑할 것을. 진절머리가 나도록. 다시는 거들떠도 보고 싶지 않도록. 다시는 못 볼 것처럼. 정말 20년이 끝인 것처럼.
기현은 자포자기의 심정을 떨쳐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소혜에 대한 미련일까? 지난 20년 자기 삶에 대한 고집일까?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틀에 맞춰 시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인가? 어쨌든 확실한 건, 기현은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머리는 버티고 있지만, 가슴에서는 이미 지난 20년, 결혼 전 소혜를 만났던 시간까지 24년이, 간단히 부정되고 있었다.
이제 날아가도 좋다, 새여.
고단하고 아팠으나 결국 나는 너의 주인이 아니었으니 나의 허락은 그저 빈 독백이겠지만, 이제 날아가도 좋다, 새여.
친구는 필요치 않다. 서로에게 의지함이 사랑이라 여겼던 오류를 이제야 고친다.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전부가 아니라면.
절뚝였으나 고개 들고 걸었던, 함께라 당당했던 날들은 이제 추억조차 하지 않겠다.
다만, 네 자유를 옭아매지 않은 나를 두고두고 기억하련다.
이제 날아도 좋다.
날아가려무나, 새여.
-K.H.
소혜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고, 얼굴은 목도리 안으로 거북이처럼 움츠렸다. 응달인 민원실 입구를 지나는 바람이 매서웠다. 왁자하고 들뜬 성혼 무리를 피하려고 일부러 오후를 택했다. 곧 구청 업무가 끝날 시간이었다.
기현을 발견한 소혜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추운데 들어가 있지. 오래 기다렸어?”
“뭐, 별로.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덜 추울 때 결혼할 걸 그랬어.”
그런 것까지 계산했다면, 결혼할 수 있었을까?
기현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소혜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기현은 더 뭐라 하지 않았다.
“그럼, 가볼까?”
소혜가 민원실을 향해 돌아서며 외투 주머니에서 장갑을 떨어뜨렸고, 뒤따르던 기현이 얼른 주워 건넸다.
민원서류 테이블에서 성혼신고서를 찾은 기현이 먼저 서명했고, 그동안 번호표를 뽑아 온 소혜도 서명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번호가 나오는 화면을 지켜봤다. 딩동, 딩동! 순서가 된 사람들이 서둘러 각자의 창구를 찾았다.
“네, 접수 완료되셨어요. 두 분은 이제 성혼자이십니다. 여기 서류에 각자 적으신 번호로 국가에서 제공하는 사회보장에 대한 안내가 갈 거예요. 꽤 많으니 잘 챙겨 보세요. 그래도 뭐, 요즘은 다들 계획을 잘 세우시니까.”
필요한 설명은 두 사람이 낸 서류를 확인하고 몇 가지 도장을 찍는 동안이면 충분했다. 서류를 서랍에 넣고 나서야 창구직원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보았다.
“축하드립니다.”
형식적인 인사. 팡파르나 색종이 꽃가루는 없었다. 담당 직원 말고는 민원실의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거창한 성혼식도 잡지 않았다. 소혜의 배려였다. 아무래도 기현은, 그런 건 피하고 싶었다. 당분간 가끔은 만날 일이 있을 것이다. 기숙학교에 있는 아이들 행사나, 언제까지일지는 몰라도 생일 같은 각자의 이벤트에서. 그러니 완전히 마지막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어디로 가?”
구청 입구에서 기현이 물었다.
“사람들하고 약속 있어. 식은 안 했어도 다들 오늘인 줄 아는데, 그냥 못 넘긴다고 해서.”
“태워다 줘?”
“아니, 일부러 차 안 가져왔어.”
어깨를 움츠린 사람들이 소혜와 기현을 지나쳐 갔다. 짧은 겨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자!”
기현이 소혜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현의 손과 표정을 번갈아 보더니, 소혜도 손을 뻗어 악수했다. 흔들지는 않고, 그저 잠시 쥐고만 있었다.
아무것도 흐르지 않았다. 기억도, 감정도, 미련도, 분노도, 희망도, 회한도, 사랑도. 두 사람을 건너 오가지 않았다. 아니, 너무 많은 것이 오갔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제는 더 알 수가 없을 거라고 기현은 생각했다. 이제 더는 내가 이 사람을 안다고 생각할 수 없겠다고, 기현은 생각했다.
끼익, 꺽!
그때, 검은 세단 하나가 난폭하게 두 사람을 지나 구청으로 돌진했다. 기현은 반사적으로 소혜를 인도 쪽으로 끌어당겼다. 차는 민원실 앞에 멈췄고 말끔하게 멋을 부린 한 쌍이 급하게 내렸다. 뛰어! 이러다 늦겠다!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남자가 재촉했다. 꽃다발을 든 여자는 새빨간 킬힐을 신고도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는 중에도 커플의 얼굴에는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아들로 보이는 청년도 서둘러 차를 대고 두 사람을 쫓았다. 정장에 카메라를 들었고 멋지게 빗어 웨이브 진 머리칼이 날아갈 듯 신나 보였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서야, 기현은 세단 뒤에 붙은 글씨를 보았다.
오늘, 성혼했어요!
(202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