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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계절 건너기

by FeelSeoGood 2023. 7. 19.

  나는 어떡하든 그 계절을 지나 볼 요량이었나 보다.

  하늘은, 쉼 없이 맑았고 어디로든 쉽게 가슴을 부벼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분명 시간은 한 해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지만 아직도, 봄인 듯 새 햇살처럼 눈부신 송곳이 촘촘히 내리쬐는 낮이 이어지는 가을이었다.

  어떡하든 지나 볼 요량이었다, 그 계절을. 굳이 무얼 이루어 내어 혼자를 위로하려 하거나, 도저히 감당 못 할 것들에 부딪혀 보려는 식의 무모한 계획은 없었다는 말이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난 오후에, 문득 놀이 지는 걸 바라보다가 어기적이 팔을 뻗어 그 하늘에 난장(亂掌)을 내 지르듯, 그저 그렇게 살아 보려 했다는 것이다, 어떡하든. 이유 없음이었다.

  하지만 계절은, 봄 하고도 끈적거리듯 늘어지는 늦봄에나 어울릴 모래바람을 일구는 듯, 미처 추스르지 못하고 있던 내 미망한 생활들 사이로 불쑥불쑥 틈입해 왔다. 그러면 언제나, 나는 못내 어쩔 수 없는 표정을 하고는 그 계절의 틈입을 밀쳐 내었지만, 기실 내 속내는 오랫동안 떠돌다 돌아온 남편에게 안기는 조강지처마냥 그 계절을 수음(手淫)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렇게라도 그 계절을 지나갈 수 있다면 말이다. 어쨌든 가을이었다.

  그날도 그랬었다. 별 뾰족한 이유도 없이 힘들게 계절을 건너려 하는 것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으며, 거기에 더하여 조금의 우울함이나 짜증이 겹쳐 있는 날이었다. 스쿨버스를 타기 위해 주욱 늘어선 줄 가운데에서 하필이면 그런 때에, 그녀는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어찌 저럴까……. 또록또록 눈동자 빛나는 폼이,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그 쾌활함에라도 흠뻑 취할 수 있을 웃음이었다.

  깜빡이를 켜고서 천천히 길 가장자리로 차를 붙였다. 이미 나를 알아보고서 다가온 그녀가 생글거리고 있는 웃음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옆자리에 앉았다. 그건 일종의 시위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의식적으로 똑같은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전날 그녀는 하루 종일을 표정 없는 맨얼굴이었었다. 그녀의 피부는 그리 고운 편이 아니어서 깨끗한 얼굴로 관찰되는 적이 별로 없었음에도, 그런 세세한 여드름 따위에는 아예 신경도 쓰이지 않을 만큼 얼굴을 전체적으로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그런 맨얼굴 말이다. 속으로 감당하기 힘든 의지를 숨긴 듯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표정. 그런 채로 고개를 십오 도쯤 숙이고 시선을 땅바닥 어디쯤에 박아둔 채로 다니면 영락없이 가슴속에 상처로 일군 딴 세상을 간직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추적이며 비까지 오는 날이면 더없이 감상적인 얼굴이 됐었다.

  그런 그녀가 아침부터 생글거리며, 하필이면 그런 때에 더없이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그 전날과 같은 그녀의 암잔(暗殘)한 모습에 내가 호감을 느껴 왔음을 부인하지는 않겠지만, 굳이 표정 하나에까지 ‘하필이면’을 붙여가며 탓하는 것은, 단지 내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표정 때문이 아니라 그 계절의 내 미망(迷妄)이 더 큰 원인이었으리라. 또 거기에 더한 그날의 미망이 그랬으리라.

 

 

  가을에 방이 나갔다. 안채에 딸려, 마루로 통하는 나무 문과 골목에서 그 방으로 들어가는 대문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방이었다. 마루 쪽으로 달린 나무 문만 잠가 버리면 그대로 한 칸짜리 독채가 되는 방이어서 애당초 세를 놓을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던 것이다. 원래는 형이 주욱 써 왔었는데 졸업을 하며 형이 서울에 직장을 잡아 버린 까닭에 주인 없이 되어 버렸다. 봄부터 빈방으로 있어서 전세금 융통할 꿈에 기와집을 지었어도 벌써 몇 채는 지었다 허물었을 어머니의 속을 무던히도 끓이더니 결국 가을이 되어서야 임자를 찾은 것이다. 나는 그날 그 방의 도배를 하려고 어머니께서 벌여 놓으신 일에 잠시 동원되어 시키신 일을 다 해 놓고서 등교하는 길이었다.

  빈방으로 반년 남짓을 뭉그적거리다 보니, 가족마다 각자 딱히 쓸모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쉬 버릴 수도 없는 잡동사니들을 쌓아 두는 방 정도로 그 방을 활용하고 있었다. 잡동사니를 쌓아 둔다, 하고서도 ‘창고’가 아닌 ‘방’이라고 해야 할 만큼 그리 지저분하고 퀴퀴하지 않았던 것이, 가끔 시골에서 친척들이 들르거나, 서울서 형이 다니러 오면 으레 그 방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도배를 하기로 한 그날까지도 대부분의 그런 잡동사니들이 그대로 방안에 버티고 있었는데, 우선은 치우고 보아야 할 일이었고 그 정리 작업이 내 몫이 된 거였다.

  칠 년째 사용하고 있는 빨간색 금성 진공청소기, 그와 나란히 놓인 실내용 빗자루, 먼지떨이, 형의 기타, 달 데가 없어 놓아둔 거울, ‘아메리칸 스트림라인’이라고 적힌 영어 회화 테이프 한 질, 책꽂이 하나를 띄엄띄엄 메운 책들, 모퉁이의 이빨이 빠져 달아난 책상, 병풍, 바둑판, 낡은 스테레오 한 대, 뭐 그런 것들이었다. 방 가운데 서서 주욱 둘러보고 나니 다른 것들은 모두 도배를 하는 동안 잠시 마루로 옮겨 놓았다가 소용이 닿는 데로 각각의 위치를 찾아주면 될 것이었으나, 정작 책꽂이에 와서는 막막했다. 대부분이 형이 보던 책이었는데, 띄엄띄엄 꽂혀 있다고는 하나 책꽂이의 큰 부피를 봐서는 책이 족히 오십 권은 되어 보였으며 책꽂이째로 옮겨갈 만한 여유 공간이 집안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책꽂이라는 것이 합판으로 만들어 나뭇결무늬의 시트를 붙여 놓은 것으로, 이미 접착제로 붙여 놓은 틈이 갈라져서 보수를 할 요량으로 쳐댔던 여러 번의 못 자국이 성가시게 드러난 데다 아래쪽에는 옷가지를 수납하는 커다란 서랍까지 세 개나 달고 있는 것이어서 가구로 놓아둘 볼품조차 없는 것이었다.

  책꽂이는 버리기로 했다. 책은, 열 시까지는 학교에 가야 했으므로, 급히 훑어보며 버릴 것과 남겨 둘 것으로 구분하기로 했다. <인형의 집>, <세일즈맨의 죽음> 같은 희곡 몇 권과 <설사 슬픔이거나 절망이라도>, <나의 칼 나의 피>, <노동의 새벽> 같은 시집 몇 권, <그대, 청년의 때에>, <북녘일기>, <황석영 북한 방문기>와 같은 책 몇 권과 <바비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와 <부자의 경제학과 빈민의 경제학> 등이 마루로 통하는 문 앞에 쌓였고, 그 나머지 책들은 골목으로 통하는 대문 쪽에 쌓였다. 나머지 책이라는 것들은 대부분 나도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보았던 형의 수많은 참고서였는데, 영어만 해도 열두 권의 문법책, 수학은 정석 등등 여덟 권, 게다가 국사, 세계사 등의 상식에 도움이 되리라 해서 버리지 않고 남겨 두었던 몇 권의 책들로, 어떤 것은 날짜 지난 신문을 버리려고 쌓아 놓듯 옆으로 뉘어 차곡차곡 쌓인 채였으나, 운 좋은 몇 권은 그 책을 보던 당시의 손길 그대로 조심스레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그나마 벌써 몇 번의 정리를 통해서 소용이 닿지 않으리라고 생각되는 책들을 버렸음에도 질기게 살아남아 있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훌훌 추억 삼아 책장을 넘겨보며 이미 소용을 잃어버린 그런 참고서들을 쉽게 버리는 것에 은근한 죄의식을 느꼈다. 이상했다, 다들 그렇게 하고, 또 졸업을 직전에 둔 고등학교 삼 학년 교실에 가보면 온통 쓰레기로 버려져 있기도 할 책들이었는데도 나는 정말 그 책들을 버려야 하는지, 아니 내가 버릴 수 있을 건지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마치 맹신하는 교리서(敎理書) 쯤이나 되는 양, 아니면 인생을 꽉 거머쥐고 있는 전능한 잣대나 되는 양 끼고 다니던 그런 책들을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천덕꾸러기인 것을. 그럼에도 가슴 한구석에는 무언가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버려야 한다니……. 나는 여전히 고등학교 때의 맹신을, 무감각한 이끌림을, 그저 그렇게 만들어지는 모범생의 기억을 향수(鄕愁)하는 것일까.

  남겨 두기로 한 책들을 내 방으로 옮겨 놓고서 밋밋한 기분으로 그 나머지 책들을 버리려는데, 도배하러 온 기술자가 내게 부탁하듯 말한다. 거, 버릴 거요? 그럴 거면 게 두시오. 우리 아들이 학교에서 폐품 가져오랄 때마다 옆집에서 신문 더미를 얻어다 주는데, 버릴 거면 차라리 그런 데는 쓰겠수다.

  안아 올리던 책들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머리를 감고 늦은 세수를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아등바등 매달렸던 그 공부라는 것들이 이제는 새로운 용도를 찾았다. 열여덟이나 열아홉 먹은 아이들이 목숨 걸고 외우고, 전국적으로 똑같은 내용의 수업을 받아 적었던 깨알 같은 글씨가 남아 있는 그 책들은, 요즘은 구하기도 그리 쉽지 않은 초등학교 숙제용 폐품이 되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의 죄의식 대신에 묘한 상실감이 스며들었다. 오히려 버렸다면 별생각 없이 지났으리라. 차라리 그런 데는 쓰겠수다…….

  나는 외출할 채비를 끝내고서, 이미 학점을 이수한 전공 책들을 죄다 뽑아 안고 가서는, 대입 교리서(敎理書)에서 쓰레기로, 쓰레기에서 이제는 폐품으로의 유용한 용도를 찾은 고교참고서들 위에 쌓았다. <대법영어>, <바른수학>, <수학의 정석> 등의 위에 <세계문화사>, <철학개론>, <통계학>, <유기화학>, <현대생약학>, <생리학> 등의 책이 쌓였다. 그리고 도배 기술자에게 한 마디를 보탰다. 이것도 그런 데는 쓸 만할 겁니다.

  그래서였나, 그녀의 생글대는 얼굴이 그리 내키지 않았던 나는 학교까지의 삼십 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바람은 서늘했으나 햇볕은 여름처럼 따가운 날이었다. 나는 연신 그 햇빛을 핑계로 상을 찡그리며 운전을 했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 껌 씹을래요?”

  “…….”

  대꾸 없이 고개만 돌렸다. 우선은 사양하고 보는 것이, 누군가에게 무엇이든 권유를 받으면 드러내는 내 특징이었으나, 그런 대답도 없이 그저 묵묵부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이에도 핸드백인지 책가방인지 모를 작은 가방에서 하얀 종이로 포장이 된 껌을 꺼내는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 여전히 생글거렸다. 거기다 이제 껌마저 짝짝 씹을 양인가…….

  그녀의 밝은 표정은 괜스레 나를 주눅 들게 했다. 그것이 내가 햇빛을 핑계로 얼굴을 찡그렸던 이유였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 대해 그저 방관하는 쪽에 속하고 있었는데, 물론 내가 알기로 그녀를 철저히 단속하는 특별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에 대한 나의 자신감 부족 때문이 아니었고, 그저 내가 그녀에 대해 가지고 있는 호감을 스스로 즐기고 있는 데에 기인한 것이었다. 뭐냐 하면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나에게 국한된 것이지 굳이 그녀와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밝은 표정에 나는 어색해하고 있었다. 또한 그렇게 어색해하는 나에게 더 불만이었으리라. 상실감……, 뭐 그런 것이었다.

  묘한 분위기.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표정은 딱 두 가지였다. 대부분을 그렇게 있는, 표정 없는 맨얼굴과 그 맨얼굴에 가끔 채색이 되는 것 같은 순진한 웃음. 어떤 모양으로 만나든 어딘지 모르게 그 표정에는 경계심이 느껴졌으며, 숨기고 있는 한 꺼풀 너머의 세상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특별히 아무런 설명 없이도 가려진 모든 것이 확연히 이해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오고 있었다, 그녀로부터, 나는.

  그녀에 대해 그렇게 막연한 나만의 생각은 아마도 산다는 것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그 계절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함께, 삶이나 계절 따위에 대해 내가 보여주는 입장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는데,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어떡하든 건너야 한다는 것, 굳이 특별한 어떤 대책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 것이었다.

 

  나는 절대 자유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활에서도, 그 계절에서도, 또 그녀에게서도.

 

 

  무한궤도라는 것이 있다. 양자역학을 공부하다 보면 에너지 준위라는 것-나는 그런 것을 ‘대충은 전공했다’ 해도 좋을 만큼 거기에 대해 많이도 배워야 하는 입장에 있었으나, 감히 ‘…라는 것’이라는 말을 사용함을 망설이지 않는다.-이 나온다. 전자가 위치할 가능성이 집중적으로 높은 부분을 찾아내어 차례대로 번호를 매겨 놓은 것이다. 핵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면서 1번 궤도, 2번 궤도, 3번 궤도……. 그런 식이다. 그리고 그렇게 번호를 매기다 보면 핵으로부터의 전자에 대한 구속력이 소실되어 버리는 무한 번째의 궤도 즉, 무한궤도라는 것이 나타난다. 핵과 무한궤도 위의 전자 사이의 인력은 이론상이긴 하지만 완전한 0이다. 인력뿐만 아니라 그 외의 아무것도 없음이다. 어떠한 영향도 서로 미칠 수 없다는 말이다. 전자(電子)는 그 핵에 구속되어 있는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닌, 서로 유관하지도 무관하지도 않은 상태. 버리지 않아도 되고 취하지 않아도 되는, 부정하진 않지만 초월할 수 있는, 그야말로 멋진 상태!

  나는 그 무렵 그러한 무한궤도를 꿈꾸고 있었다. 작위(作爲)라는 핵으로부터, 인간 군락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생산물인 가식이라는 핵으로부터, 그런 작위와 가식을 벗어 버릴 수 없다고 강요하는 운명이라는 핵으로부터 절대 자유의 무한궤도로의 역이(逆離)를 꿈꾸고 있었다.

  그건 결국 궤도이탈이었으며, 나는 기꺼이 외로운 자유전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역이에 필요한 무한의 에너지를 비축할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그만큼 그 계절을, 그녀의 밝은 웃음을 건너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무한궤도를 이야기하면서도 이미 ‘이론상으로’라는 수식어를 썼듯이 그저 희망에 그치기 쉬운 그런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에…….

  “왜 그래요? 뭐 화났어요?”

  차가 꾸역꾸역 밀리기 시작했다. ‘껌 씹을래요?’라고 한 후에도 그녀는 몇 마디를 더 했을 것이다. 물론 많은 말은 아니었을 테고, 단지 한마디 하기 위해서 전후사정과 그 말에 따라올 반응에 대한 대답을 몇 번이고 생각한 후에나 꺼내놓는 그런 이야기를 아주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인 양 했을 것이고, 나는 여전히 인상을 펴지 못하고 묵묵부답이었다. 그런 그녀가 드디어 내 상황에 대해 아는 척을 했던 것이다. 뭐, 화났어요? 결국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거면서.

  좀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꺼내 놓지 않는 것에서 나와 그녀는 어느 정도 닮아 있었다. 물론 주어지는 환경에 따라 분위기를 타고 이런저런 농지거리도 할 줄 알았고,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말도 없이 맹한 채로 앉아서 순진한 척하고만 있지 않는 것 역시 공통점이었지만 정말 속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자신의 잣대에 비추어 어느 정도의 한계를 넘는 개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전혀 내색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런 식의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단지 그녀와 나 단 둘 뿐이라는 것은 아니다. 멀리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같은 과(科) 안에서도 그저 주위를 꼼꼼히 둘러보기만 하면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특기할 것은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끼리는 대부분 서로에게 무관심함에도 그녀와 나는 그렇게까지 무관심하다든가 모른 척하며 지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왜 그래요?’라는 말로 단지 그런 종류의 관심을 내게 표시한 것이었다.

  스스로의 속내를 잘 내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왜 자기와 똑같은 생활 양태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무관심한 ‘척’을 하며 어떨 때는 냉랭한 시선이나마 그런 상대를 향한 눈길조차 던지기를 피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나로서는 짐작만 할 뿐인데, 그건 아마도 거울 보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비슷한 심리일 것이다.

  굳이 얼굴이 못생겼다느니, 키가 작다느니 따위의 외모적 강박(强迫)이 아니더라도 거울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객관적으로 그럴듯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 중에도 아주 사소한 것들에 대한 심리적 요인으로 그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건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에서 비롯한 것인데, 그 혐오감의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의 모습을 실제의 자기보다 과장되게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늘 생각하던 스스로의 모습과 다른, 현실의 자신을 거울을 통해 마주해야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고통인 것이다. 그런 경우 그들은 결정적인 자기혐오를 느끼는 것이다. 거기에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자신에게서 그런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거울만 없애면 된다고 생각해 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과장된 자기 인식에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는 발버둥일 뿐이다. 스스로도 실제와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듯이, 대부분의 경우에 타인들과 잘도 어울리면서도 결정적인 것에서는 자기를 숨기고만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자신과 똑같은 성향의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을 만나게 되고, 그런 혐오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울을 회피하듯 자신과 비슷한 상대를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역시, 발버둥이다.

  하지만 그녀와 나는 달랐다. 이건 전적으로 내 생각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내가 그녀에 대해 시시콜콜한 구석까지 알지 못하고 그녀 또한 나에 대해 아는 것이 몇 가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그러한 식으로 회피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고 할까? 그랬다, 분명히 그녀와 나는 그렇게 닮아 있었음에도 말이다.

  아마 그녀도 내가 햇살을 핑계로 얼굴을 찡그리고만 있는 이유를 이미 짐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건 아침에 세 나간 방을 정리하면서 그 책들을 도배 기술자에게 폐품으로 넘겼다는 것을 몰라도, 내가 이 계절을 단지 건널 수만 있기를 꿈꾸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해도, 그녀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나 역시 그녀의 표정 없는 맨얼굴을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앞 차의 후미등이 빨갛게 밝아지는 것을 보며 사이드 블레이크를 당겼다. 그녀를 살폈다. 조심조심 껌을 씹고 있다. 더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진 않았다. 무릎 위에 책을 하나 펴 놓긴 했으나 시선은 그 위에 늘어놓은 글자에 초점을 맺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귀에 꽂아둔 이어폰 소리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어폰은 검은색이었는데, 그녀의 갈색빛이 도는 머리카락-그때 마침 몇 올의 머리카락이 귀 뒤에서 빠져나와 이어폰과 겹쳐져 있었다.-에 비추어 무척이나 검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답답했다. 이 계절 들면서 찾아온 병이 또 도지는 것 같았다.

 

  여름이 끝나가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횟수가 늘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언제나처럼 종결어미를 미리 생각해 두고 주어와 목적어를 계산하는 식의 조리 있는 형식이 되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일이 많아졌으며, 가슴께 어딘가가 오래도록 베개를 가슴팍에다 대고 엎드려 책을 읽고 난 후처럼, 가끔 저려오곤 했다. 그리고 해 질 녘이 되면 원래부터 있던 난시가 점점 더 심해져서 천마로를 걸어 나오며 만나는 사람이 혹시 아는 사람은 아닐까 하여, 아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면 나중에라도 서로 얼마나 황망해질까 하여, 지나치는 사람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꼼꼼히 뜯어봐야만 했다. 그러고 나면 멀리 육 차선 큰길 건너편 건물에 붙어 있는 붉은 네온사인 글자마저도 흐릿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불현듯 깨닫는 것이다. 아, 또 이 계절이구나…….

  매년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항상 앓아 오던 것인데도 나는 대뜸 깨닫지를 못하고 병이 꽤나 깊어지고 난 후에야 그것을 깨닫는다. 뭐 미리 알아챈다고 해도 딱히 병을 치료할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어떡하든 그 계절을 견디어 건너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 견딤이라는 것이,-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쩌면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 될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이러한 병은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굳이 나만 이렇게 특별히 티를 낼 것은 없는 것이다. 더구나 무언가 대단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 견딤이라는 것이…’라고 시작하다니 말이다.-어떤 것일는지 나는 생각해 보았었다. 그저 건너야 한다, 견뎌야 한다,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세뇌하면서 가지게 된 자연스런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 의문에 자연스레 뒤따라서, 만약 그 정체를 알 수만 있다면 내가 이 계절이면 앓는 병에 대한 원인치료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대체 그 정체가 무얼까…….

  막연한 생각이었다. 막연한, 막연한, 막연한, 그래 그런 어둠이었다. 그저 어둠이라고 설명하고 말기에는 부족한, 눈을 감고 가만히 그 병(病)이라는 놈을 들여다보면 다만 확연히 느껴지기는 하지만 무어라 표현하기에는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어둠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끊을 수 없는 어떤 형태로 함께 나온 것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또 그 어둠에 더하여 한 번의 숨을 쉴 때마다 한 꺼풀씩 더 쌓여가는 고독이지 싶기도 했다. 존재하므로, 나는 숨 쉬고 있으므로. 사람들 각자의 심각성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우리 삶의 숙제로 주어진 그 무엇이었다.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느냐, 가 얼마나 상처받고 얼마나 힘겹게 견디며 사느냐, 인 것이다.

  결국 내가 힘들어 할 수 있는 동안에는 그 힘듦의 이유를 어찌해 볼 수 없고, 내가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견뎌야만 하는 원인을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유 없음’이었고 ‘그저 그렇게’였다. 내가 있는 이상 꼬리표처럼 나를 따라다닐 병이었으니, 나는 다만 그 병을 잘 토닥여 사귀어 두는 수밖에, 더 이상의 최선이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걸 알고 있을까? 그 견딤이라는 것을, 그 의미를 생각하고 있을까? 그러면서도 저렇게 생글거리고 웃을 수 있을까? 늘 그렇게 ‘이유 없음’을 말하면서도 그럴 때마다 나 여전히 삶에, 세상에 무기력하지 않음을 확인하려 하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마냥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그녀에게.

  아마도……, 그녀는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녀의 암잔한 표정 속에서 읽을 수 있듯이, 초점 잃은 눈동자 깊은 시선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 역시 이미 멈추지 않고 숨 쉬어야 함의 고독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살기 위해 부지런히 지느러미를 놀려 앞으로 나가야만 하는, 아가미가 없는 상어의 고독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숨 고르기의 방법을 알고 있을까? 혹시나 어느 때고 그 숨쉬기가 곤란해질 때, 아니면 그 고독의 무게가 너무 힘겨울 때, 그래서 아예 숨쉬기 자체를 포기하고 싶을 때, 다시 원래의 숨결로 돌아오기까지 겪어야 할 숨 고르기를 할 줄 알까? 아직은 나도 제대로 모르는 것이지만, 내가 그녀의 숨 고르기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시선은 책 어딘가에 두고 이어폰은 양 귓바퀴에 꽂고 앉은 그녀를 보면서.

  그녀를 살폈다. 내가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 함을 나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그녀를 조목조목 따져서 분석하며 이해하는 것이 아니듯, 그녀에게 나를 설명하는 것도 그런 식의 구체적 방법이 아닌 한꺼번에 옮겨가는 느낌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었다. 나를 이야기함도 그저 그렇게, 이유 없음인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녀를 방관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굳이 요구하거나 이야기하지도 않고,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지도 않으면서, 그저 그녀대로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망양(望洋)엘 가본 적 있니?”

  그녀는 의아했으리라. 하지만 너무도 갑자기, 그것도 생각 끝에 나온 말이라 거의 중얼거림에 가까운 내 작고 낮은 목소리에 이어폰을 낀 그녀는 그리 민감하지 못했다. 그저 조금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달싹거리는 내 폼을 잠시 바라보았을 뿐, 신호를 받아 넓어진 도로를 신나게 달려 나가는 차들로 가득 찬 전방을 이내 주시하는 나를 그녀 역시 방기(放棄)한 채 다시 책 위에 시선을 얹었다.

 

 

  바다를 생각했다, 문득. 보고 싶었다. 푸른 물결보다 검은 물결. 폭풍주의보의 바다라도 차라리 좋았다. 산다는 것이 잔잔한 물결의 휴양지로의 바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무능력한 채로 아무것도 어쩌지 못하고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하는 폭풍주의보가 내려진 바다도 있다고 항변하는 그 격정의 바다.

  나는 그런 바다를 정확히 두 번 실제로 보았었다. 한 번은 서귀포에서였고 나머지 한 번은 망양에서였다.

서귀포의 바다는 부모님을 따라 가족 모두가 갔었던 제주도 여행에서, 여행이라기보다는 관광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패키지 투어에서 우연한 기회에 보았던 짧은 경험이었다. 나흘의 일정 중에서 이틀째, 폭풍주의보가 섬 전체와 주변의 바다에 내려졌고 엄청난 양의 비 때문에, 그날의 한라산 등반 일정이 모두 취소되었었다. 묵던 숙소에서 서귀포는 그리 멀지 않았고, 그날 나는 그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부모님 중 어머니의 선택-아버지는 평생을 가야 그런 낭만적인 행동을 하실 분이 아니다. 정확히 누구의 생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족 전체가 폭풍으로 격렬히 흔들리는 바다를 보러 간다는 것은, 당시 상당히 낭만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어머니의 생각일 것으로 추정은 하지만 그것 역시 여행 중에 느끼곤 하는 평소와는 다른 설렘이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이었으리라. 그때의 바다는, 집이 아닌 타지(他地)에 있다는 불안함에 겹쳐 어린 마음에 그저 두려움으로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망양. 방학이면 한 주일씩 가 있곤 했던 큰할아버지댁이 있는 곳. 그곳에서 작년에 보았던 바다. 기억하기로 아주 어리던 때부터 그곳에 가곤 했는데도 폭풍으로 모든 것이 정지된 바다를, 나는 작년 스물두 살 되던 해에 처음 볼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바다를 보는 것, 누군가 있다 하더라도 그 존재를 본능적으로 무시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그런 바다를 보는 것은 분명 새로운 경험이었다. 언제나 한정된 해안선을 경계로 그 이상을 넘어올 수 없던 바다가 그렇게 모든 것을 표현하려는 듯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다. 잔잔한 파도 속에서도 꾸준히 내비치던, 그 속에 숨어있는 웅대한 비밀에 대한 지극히 작은 암시 하나에도 나는 이미 두려워하고 있긴 했지만, 전혀 새로운 것을 대하는 양 나는 그 앞에 서서 완전히 무장해제를 하고 서 있었다.

  나름대로 스물둘이라는 나이를 앓던 나는 그 앞에서 막연히 서 있기만 했다. 방파제 끝으로 나가보지도 못하고 그저 포구 깊숙이 안전한 곳에 서서,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눈으로 들이치는, 바닷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방울을 온통 맞으면서 낮인데도 어두운 바다를, 격랑의 순간을 가만히 대하고 있었다. 오히려 바다에겐 평소에 알고 있던 잔잔함이 아닌, 이런 거센 일렁임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비밀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바다는 잔잔해졌다. 거짓말처럼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밤이라, 어두운 것은 폭풍 속의 낮과 다를 게 없었지만 바다는 불과 몇 시간 전의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어 두고서 잔잔해졌던 것이다.

  그 밤바다 속에서 나는 보았다. 내게로 곧장 다가오는, 결코 찬란하지 않지만 끊어지지 않는 빛을 발하는 무언가를. 비단잉어. 나로서도 그것이 실제인지 환상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비단잉어였다. 큰할아버지댁이 있는 망양에서 역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자주 가 보았던 성류굴에 십 년 전까지도 살던 비단잉어가 거기, 폭풍이 지나간 밤바다 속에서 나를 향해 유유히 헤엄쳐 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또, 낮에 격랑의 바다를 마주하며 그랬던 것처럼 막연히 그 모습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막연히 나이를 앓던 내 가슴 또한 잔잔해졌다.

  그때 하필 왜 그 비단잉어가 내 눈에 가득 차 들어왔는지 알 수는 없다. 나는 다만 아주 어릴 적에 성류굴 안을 흐르는 물속에서 유유히 헤엄쳐 가던 그놈들을 보았을 뿐이었고, 이제는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그 굴속의 심연(深淵)에서 그놈들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다만 그날 앞서 내가 보았던 것들과 공통점이 있다면 한 가지, ‘물의 이미지’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나름의 흔들림 속에서 무섭게 일렁이는 바다를 내 속에 각인시켜 둔 후였고 또한 그렇게 쉽게 평소의 모양으로 돌아가는 거대한 바다의 움직임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십몇 년 전의 비단잉어들, 어두운 굴속에 설치된 옅은 조명 속에서 쇠난간을 잡고서 고개를 수면 가까이 붙여서야 겨우 찾아내었던 어릴 적 나만의 비밀인 그놈들은, 그때 역시 어두운 물속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바다를 생각했다. 그 비단잉어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이미 그곳에 없는 것이지만, 다시 한번 그렇게 조우(遭遇)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책에서 눈을 떼고 창밖을 보다가 내 시선을 느꼈던지 그녀 역시 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빛 속에 무언가 반짝임이 있었다. 반짝임. 멀리, 무언가, 이리로, 다가오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잠깐의 마주침 속에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굳이 조목조목 설명해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아니 그렇게 따져서 설명하면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 대해 가지고 있는 변명과도 같은 막연한 감정처럼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그 순간에 그녀에게 그대로 옮겨 심고 있었다.

망양엘 가면 바다가 있다. 어디에나 있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여름이면 사람들 몰려와서 그 계절을 위해 바다가 아닌 다른 곳에서 쌓아 두었던 서글픔과 더러움과 눈물과 찌든 때를 그 한 계절 동안 죄다 풀어 버리고 가는, 멀리에는 수영한계선을 그어 놓은 플라스틱 로프가 부표에 걸쳐 파도를 따라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고, 빨간 모자를 쓰고 딱 벌어진 상체에 착 달라붙는 하얀 면 티셔츠를 입은 구릿빛 안전요원이 사람들로 복잡한 해변을 다니며 가끔 호루라기를 불어대곤 하는 그런 바다가 있다.

  하지만 그건, 그 바다의 낮일 뿐이다. 다만 낮에는 그런 모습인, 별로 다를 것도 없는 바다라는 말이다. 그런 낮이 지나 밤이 오고 바다의 새벽이 되면, 그때 망양의 바다는 무언가 다른 말을 한다. 애초에 우리가 영원한 숙제로 간직하고 있을 그 무언가에 대한 해답을 은근히 보여주려는 것 같다.

  밤에, 파도가 밀리는 모래 위에 서서 그 파도의 느낌을 맨발 그대로 느끼면서 멀리 바다의 어둠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어둠, 수평선이 어디쯤인지 다만 짐작으로만 알 수 있는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시원(始源)을 보았다. 그것이 무엇의 시원이 되었어도 좋다. 내가 때마다 앓고 있는 그 병의 시원이든, 아니면 산다는 것의 의미에 관한 시원이든, 존재의 시원이든, 그 어둠은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서, 모든 것의 해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시원을 보고 나서는 성류굴엘 가야 한다. 이미 흔하디 흔한 관광지로서의 명성도 대충 다 잃어버리고, 수십, 수백만 년에 걸쳐 녹이고 쌓여 만들었을 제 살덩이에 단지 기껏 육칠십 년 남짓의 시한부 인간들의 손때만 남고, 그들의 부주의에 기인한 생채기만 남은 자연, 그런 성류굴이다. 그 굴속에 흐르는 물 위로는, 예전에 놀던 비단잉어의 수면에서의 뻐끔거림 대신 지금은 과자봉지와 수박껍질만이 떠다니고 있는 성류굴이다.

  하지만 어느 구석, 채 전등이 밝혀지지 않은 검은 심연을 마주하고 서면, 세상의 근원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진다. 종유석이니 석순이니 하는 다른 것은 다 보지 말고, 오직 하나 굴 내부를 흐르는 물속을 들여다보라. 되도록이면 관광용 조명이 만들어 내는 빛이 닿지 않는 곳을, 그 물속에 잠기어 있는 깊고도 잔잔한 암흑을 보아야 한다. 그 속에서 망양의 밤바다가 살짝 보여 주었던 시원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성류굴의 어둠, 망양 밤바다의 어둠. 그 시원을 향한 꿈, 시원을 향한 수수께끼, 암호, 은밀한 신호, 그런 무한궤도.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영원히 그곳에 존재하는 해답을 볼 수 있다.

  그 어둠에 대한 공포. 어쩌면 내 생명이, 존재가 왔을 그 어둠. 내 생명의 근원이며, 지금 내가 산다는 것으로 많이도 힘들어하며, 웃고 눈물 흘리는 것의 영원한 이유인 그 어둠. 나는 애초에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진공, 그런 어둠, 그렇게도 농밀(濃密)한 고요였을 것을, 나는 왜 두려워하는가? 그런 질문과 마주치면 오싹해진다. 길게는 수 억 년이 흐르는 생명의 진화기 동안, 그리고 짧게는 내가 태어나 커 왔던 스물몇 해 동안, 오히려 친근해야 할 그 시원에 대해 두려움을 가져야 할 만큼 나는 많이도 변해 버렸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무언가가 맑게 열리는 듯한 개운함을 느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혼몽 속의 개운함, 계속되는 방황 속 어디에선가 정언명령(定言命令)으로 나를 부르는 이끌림. 내가 굳이 이 계절을 견딤으로 건너야 하는 이유를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그렇게 닦달하며 계절을 견딜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꿈꾸던 절대자유를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암흑, 진공, 고요, 시원, 근원, 우리가 이미 거쳐서 온 곳, 영원,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것, 거기에 있는 절대자유.

 

  학교 입구에서 우회전을 기다리며 횡단보도에 멈추어 섰을 때였다, 내가 직진 차선으로 들어선 것은. 그녀는 이미 읽던 책을 덮어 놓았고, 천천히 귀에 꽂은 시리도록 검은 이어폰을 빼다 말고 물었다. 조금의 당황을 담고 있는 목소리였다. 차는 학교를 지나치고 있었다.

  “선배, 학교 안 가요?”

  “…….”

  “학교로 안 가느냐고요?”

  차는 이미 전속력으로 학교를 지나 진량 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망양엘 가본 적 있니? 거기엔 어둠이 있지. 영원(永遠)한 시원(始原)의 어둠이…….”

(1995 영남약대 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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