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약을 포함한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는 중대한 심혈관계 혈전 반응, 심근경색증 및 뇌졸중의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으며, 이는 치명적일 수 있다. 투여 기간에 따라 이러한 위험이 증가될 수 있다. 심혈관계 질환 또는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 인자가 있는 환자에서는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의사와 환자는 이러한 심혈관계 증상의 발현에 대하여 신중히 모니터링하여야 하며, 이는 심혈관계 질환의 병력이 없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환자는 중대한 심혈관계 독성의 징후 및/또는 증상 및 이러한 증상이 발현되는 경우 취할 처치에 대하여 사전에 알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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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음과 같은 사람(경우)은 이 약을 복용하지 말 것.
1) 위장관궤양이 있거나 징후가 있는 환자, 또는 그 재발병력이 있는 환자
2) 위장관이나 뇌혈관 또는 다른 부위의 출혈이 있는 환자
3) 심한 혈액이상 환자
4) 심한 간장애 환자
5) 심한 신장애 환자
6) 심한 심부전 환자
7) 심한 고혈압 환자
8) 이 약 및 이 약의 구성성분에 과민반응이 있는 환자
9) 기관지 천식 또는 그 병력이 있는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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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을 고쳐 쓰고 한 번 더 손에 든 포장 상자 뒷면의 깨알 같은 글씨를 들여다본다. 세 번째다. 성상, 용법, 금기, 주의사항……. 많다. 길다. 꼭 필요한 것들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부를 외지는 못하겠다. ‘국민교육헌장’도, ‘복무신조’도 아니다.
보면 알기는 한다, 당연히. 설명서라는 게 원래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거다. 하지만 그게 왜 그런 건지는 안 나와 있다. 일반인은 그걸 알 필요가 없다. 전문가는 실무에서 그 이상을 알고 있어야 한다. 약리학, 병태생리학, 약동학, 독성학 같은 학문적 영역과 복용자의 나이, 성별, 위생 환경, 식습관, 때로는 경제 수준까지를 총망라한 짬뽕, 요즘 말로 융복합적 판단. 때론 단순한 지시사항보다 그게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내가 이거 먹고 혈압이 올랐다고! 심장병이 있는데 그런 거 확인도 안 하고 이렇게 아무렇게나 약 막 팔아도 되는 거야?”
남자는 십여 분을 따져 물었다.
얘기 도중 몇 번이나 설명을 시도했지만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건 일방적으로 쏟아내어 분이 가라앉고 나서야 가능한 얘기다. 미안하다고, 부작용이 있었더라도 심하거나 비가역적으로 보이진 않으니 차츰 좋아질 거라고, 혹시 다른 이상이 나타나면 언제라도 찾아오라고.
그제야 남자는 반쯤은 포기하듯, 반쯤은 봐준다는 듯 돌아서 나갔다. 여전히 삭이지 못한 화가 뒷모습에서도 읽혔다. 따져보면 오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전후를 살펴 객관적으로 수긍하는 이해를 주고받는 건 불가능한 채로 끝이 났다.
성인: 1회 300mg을 1일 2~4회 경구투여한다(먹는다, 복용한다). 단, 1일 1,200mg을 초과하지 않는다.
읽던 약통을 한쪽에 던지고 다초점 안경을 벗어 들어 한 손으로 눈두덩을 문지른다.
‘많이 아프면 두 알도 먹을 수도 있지, 꼭 한 알이냐. 다른 약은 증상에 따라 가감할 수 있다고도 되어 있는데, 이건 그런 것도 없네….’
부작용에 대한 조치부터 하려고 먼저 남자의 상태를 먼저 확인하려 했으나 그런 말은 소용이 없었다. 도움을 받고자 찾아온 게 아니라 화를 내고 응징하러 온 것이니, 일단 고스란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다. 남자에게 질문은 책임을 피하기 위한 정보수집, 얄팍하고 비겁한 수일 뿐이다. 남자가 일방적으로 쏟아놓는 말 사이에 띄엄띄엄 섞인 힌트를 모아 증상을 짐작해 본다. 다행히 당장 급하게 해야 할 건 없어 보인다.
“한 알, 한 알 먹으라고 약 두 개 틱 던져주고! 뒤에 읽어보니, 글이 잘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치명적일 수도 있다고 적혀 있는 걸 이렇게 해도 되냐고!”
어쨌든 결과가 중요하다. 적절한 방법을 찾아, 되도록 많은 설명과 함께 도움 주려 애쓴 건 다 헛것이 된다. 의도했던 게 아니라 해도, 어쨌든 남자는 피해자다. 과실이냐 고의냐의 판단은 오류를 범한 자의 의도 유무가 아닌,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서 결정된다. 원인을 제공한 쪽에서는 그 둘을 확실히 구분받고 싶지만, 받은 쪽에서는 피해의 경중만 이야기한다. 그리고 언제나, 피해는 침소봉대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쪽은, 삼천 원짜리 약 하나 더 팔아먹을 욕심에 아픈 사람 건강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파렴치한이 될 수밖에 없다.
꾹꾹 누르고 문질러 벌게진 눈두덩으로 창밖 거리를 바라본다. 짧은 겨울 해 넘어가고, 가로등 불빛 아래 마른 잎 다 떨어진 앙상한 가로수가 찬 바람을 힘겹게 버티고 있다. 안쓰럽다. 시선에 분명한 초점이 없다.
결국, 속말을 입 밖으로 중얼거린다.
이제 정말 그만할 때가 됐나…….
문이나 닫자. 집에 가서 가족들과 따뜻한 저녁을 먹고, 연예인들 시시덕거리는 텔레비전 보며 히죽대다 자고 일어나면, 또 하던 대로 살아질 거다.
남자의 야단이 이어지는 동안 직원 둘은 퇴근했다. 쭈뼛대며 눈치를 보고 있는 걸 눈짓, 손짓으로 가라고 했다. 직원이 힘을 보탤 부분은 없다. 오롯이 혼자의 몫이다. 내가 받은 면허 범위 안의 내 책임의 업무였다. 그러는 동안은, 다행인지 아닌지-아니, 다행이겠다-아무도 오지 않았다. 오직 야단맞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그래도 좋은 사람 만난 거다. 어떤 말도, 대응도 소용없는 막무가내가 아닌 게 어딘가. 악의적인 사람, 당장의 증상을 해결하고 앞으로 또 있을 수 있는 부작용을 피할 방법을 찾는 건 뒷전인 채 결국은 보상금이 목적인 사람. 그런 이에게는, 어떻게 되든 수익만 남기려 혈안이 된 장사꾼이나 간단한 겁박에도 움츠러들어 우왕좌왕하는 찌질이, 밖으로 말이라도 나서 알량한 명성 무너질까부터 염려하는 꼰대로만 보일 것이다.
대부분, 어떻게 써야 한다, 이러저러한 건 주의해야 한다는 설명은 건성으로 듣는다. 그냥 돈이나 받고 어서 약이나 달란다. 그럴 때마다, 뭐 하고 있는 건가 싶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다 안다는데, 무슨 말을 하든 관심 없다는 데 붙잡아 둘 수는 없는 일. 닭이 먼저였는지 달걀이 먼저였는지는 모르겠다. 설명하는 쪽에서 바쁘다는 핑계로 귀찮아하고 소홀히 해서 그런 빌미를 준 게 먼저인지, 그런 사람이 많다 보니 결과적으로 소홀해졌는지.
그래도 결국 책임은 분명 이쪽에 있다. 어찌 됐든, 제대로 쓰도록 알려주는 건 이 직업의 의무이니까. 그래서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래도, 무척 억울하다.
환자? 손님? 고객? 처음 한동안은 그런 호칭이 조심스러웠다. 그냥 손님으로 부르자니 편의점 직원과 다를 게 없는 것 같아서. 돈 받고 달라는 물건이나 내주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고 전부 아파서 오는 게 아니니, 마냥 환자라고 부르는 게 어색하기도 했다. 고객은 말하자면 단골인데, 아프거나 몸이 불편해야 오는 사람더러 단골 되라고 하는 것도 민망했다. 생각이 너무 많았다. 졸업하고 처음 가운을 입었을 때는, ‘어서 오세요’ 하는 인사조차 쉽지 않았다. 숫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파서 오는 사람에게 반갑다고, 어서 오라고 할 수는 없다 싶어서. 하지만 이제 그런 인사는 너무 간단하고 익숙하다. 의미를 너무 깊게 담으면 본연의 일에 방해된다는 결론을 냈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적응된 거다. 수도 없이 반복하다 보니까.
하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일은 이거다. 딴에는 중요하고, 필요해서 하는 말인데 제대로 듣지도 않고 얘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무시하고 돌아서는 사람들. 그럴 때면, 목적지까지 조용히 가고 싶은 승객에게 자꾸 말을 거는 택시 기사가 된 것 같다. 승객은 듣기 싫은데, 시끄럽고 귀찮은데, 눈치도 없이 혼자만 계속 떠드는 기사.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상상을 하면 승객의 입장이 십분 공감되어 소리라도 버럭 지르고 싶어진다. 기사 양반! 거 조용히 좀 갑시다!
여기서는? 여기도 다를 게 없다. 다들 원하는 데에 내려주기만 하면 된단다. 돈 받고 약이나 빨리 줘라. 싸게 주면 더 좋다. 승객이 바라는 건 그것뿐이지 않나?
사실 그건 이쪽도 바라는 것이다. 다만 서로가 원하는 운행방식이 다르다. 기사는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길을 찾아가고 싶지만, 승객은 빨리만 도착하면 그만이란다. 그러지 말라고 하면, 가르치려 들지 말란다. 자기도 운전깨나 한단다. 그러니 반성과 개선은 이쪽의 몫이다. 저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 그걸 몰랐던 예전에는 화도 냈다. 누굴 위해 하는 설명 같아요? 누가 더 좋은 효과를 보고, 누가 더 안전해지나요? 그래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공격적으로 전하는 말은 반감만 더 쌓았을 뿐이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고 일부의 특별한 경우라 하기엔 그런 일이 너무 잦다.
그러니 어떻게 부작용을 전부 얘기할 수 있나? 하고 싶어도 못 한다. 머리를 맞대고 같이 읽을까? 귀찮아서가 아니다. 시작도 전에 ‘얼마예요?’ 하고 말을 끊는다. 도무지 듣지를 않는다. 그러면서도 반대로,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는 얘기를 안 해 줬다고 화를 낸다. 오늘이 그렇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나?
에구 이럴 바에는 물어보는 것만 알려주자 생각하고 입을 닫았다가도, 국가에서 주는 면허받은 사람이 그럴 수야 있나 싶어 금세 다시 반복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관심 없고, 이쪽은 화가 나고, 결국 무기력해진다. 도돌이표다. 경험이 부족하거나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려는 배려가 모자라서일 수 있다. 그렇지만 삼십 년을 이 좁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했는데도 여전히 그런 거라면, 아찔하다. 그러니 그만둬야지.
말로만 그러지, 결코 그만두지 못할 거다. 내일이 되면 또 하던 대로 꾸역꾸역 하루를 시작하겠지. 대신 한동안 긴장은 하고 있겠지. 늘 하던 일도 노이로제처럼 두 번 세 번 점검하게 될 거다. 평소에도 별 탈이 없을 만큼 충분히 집중해 왔지만, 그보다 몇 배나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겠지. 타성이나 관성에서 위험이 시작되니까. 그러지 않기 위해 긴장을, 어쩌면 극도의 긴장을 해야 한다. 편집증처럼. 숙명이다.
사람들이 드나들던 앞쪽 출입문을 잠그고, 간판과 진열대, 실내조명을 끄고, 퇴근을 준비한다.
조제실을 점검하고 뒷문으로 나가는데 초록색 눈삽이 보인다. 뒷문 통로 옆 자투리 공간에서 몇 년째 먼지만 쓰고 있다. 출근할 때 제일 먼저 눈에 띄고, 퇴근하며 문을 잠글 때 마지막으로 보는 게 그놈이다. 늘 그 자리에 서 있다. 문 닫은 동안 야간 경비를 서고, 아침이면 간밤의 상황을 보고하려는 것처럼.
가끔 들리는 아내는 녀석을 볼 때마다 입을 댄다. 저거, 저거 한 번은 썼어? 여기서 제일 쓸모없는 게 저걸 거야, 쯧쯧.
한 번도 써먹은 적은 없지만, 효용이 명백한 놈이다. 제대로 눈만 온다면 똑 부러지는 역할을 할 것이다. 허구한 날은 반편이처럼 서 있기만 하지만, 그래도 약속된 기다림이다. 나서서 도움을 주지는 못해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활약할 날을 고대한다. 기회가 온다면, 혼신의 역할을 해 내리라. 어쩌면 나보다 낫다, 오늘만 봐도 그렇지 않나?
여기는 눈 구경이 쉽지 않다. 오죽하면, 푸슬푸슬 흩날리다 바닥에 닿기도 전에 녹아 없어지는 정도로도, 애고 젊은이고, 어린 친구들은 신이 난다. 한껏 들떠서 소리친다. 야! 눈! 온! 다! 수도권 중심인 일기예보는 ‘밤사이 내린 눈이 얼어붙어 길이 미끄러울’ 거라는 리포트를 겨우내 몇 번씩 반복했지만, 여기와는 상관없는 얘기다. 수도권과 여기는 딴 나라다.
수년 전, 2월이 중순도 지났는데 폭설이 왔다. 겨울이 얼마 안 남았다고, 이제 제법 봄 같기도 하다 싶던 어느 날, 아침에 눈 뜨고 바라본 창의 색이 달랐다. 햇볕에 밝은 것도 아니고 구름에 어두운 것도 아닌, 밝기는 한데 빛으로 환한 게 아니라 하얀 도화지를 댄 것처럼 희부연 창. 열어보니, 눈 천지였다.
눈길 운전이 익숙지 않아 우왕좌왕인 차들이 꽉 막은 길을 엉금엉금 뚫고 겨우 출근하고 보니, 약국 앞 인도는 발자국도 없는 뽀얀 눈밭이었다. 예쁘기보다, 덜컥 겁이 났다. 넉가래 같은 건 당연히 없다. 눈이 오지 않는 곳이다, 여기는. 그냥 둘 수는 없고 대용할 것도 마땅치 않았다.
이웃 가게에서 흙삽을 빌려, 급한 대로 눈을 치웠다. 한 번으로는 부족했다. 오래된 내과, 주로 노인들이 드나드는 의원 밑이다. 낙상은 곧 대형 사고다. 통행이 불편할 만큼 궂은날에는 아예 외출하지 않는 게 맞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아픈 데는 더 많은 법이다. 띄엄띄엄이라도, 환자는 계속 있다. 두세 시간 간격으로 치우고 또 치웠다. 그러자니 삽을 빌리고 또 빌렸다. 눈 치우는 일은 원래 중노동이지만 철로 된 무거운 삽이라서 힘은 더 들고 효율은 높지 않았다. 제대로 된 눈삽을 구해야 했다. 가까운 철물점에는 진즉 동이 나고 없었다. 몇 군데 더 다니며 알아봤지만, 그때마다, 그 귀한 걸 당연한 듯 구하냐는, 세상모른다는 시선뿐이었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안 찾던 눈삽이 아침 댓바람에 다 나갔다고, 원래 몇 개 갖다 놓지도 않는 물건이니 다른 데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부랴부랴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일주일 만에 눈삽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 눈은 전부 녹았고 어렵게 구한 눈삽은 쓸모가 없어졌다. 도착한 날부터 링에는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계속 라커룸에서 대기만 하는 스페어 권투선수 꼴이 되었다. 비싸지 않으니 아깝지는 않았어도 비좁은 약국 공간에 자리를 차지하는 애물단지다. 당장은, 역할은 있는데 소용이 없었다. 언제 매인 이벤트가 잡힐지 알 수도 없다. 기약도 없는 섀도복싱(shadow boxing)만 계속이다.
좋게 말해, 좀 꼼꼼한 편이다. 뭐라도 준비가 제대로 되어야 한다. 계획에 없던 일은 싫다.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 눈이 올 수 있으니 눈삽도 있어야 했다.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았고, 그런 날들이 모여서 한 달이, 일 년이 되었다. 그렇게 삼십 년 약국을 했다. 부침은 있었지만, 큰 문제도 사고도 없었던 건 과하다 싶을 만큼 대비한 덕도 있다. 하지만 미리 고백했듯이, 좋게 말해 그렇다는 거다. 사실은 강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변수를 최소화해야 한다. 변화의 여지는 곧 불안이다. 그래서 미지의 어떤 것을 향한 맹목적인 도전 따위는 피해 왔다. 그럴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계산하고 계획해서 가능성이 확인되어야만 시도했다. 덕분에 도박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 타고난 복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현재는 늘 불안하다. 미래는 확정된 것이 아니니까.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는 완벽한 계획으로 모든 것이 관리되어야 한다. 하루를 계획하고, 일주일, 한 달, 일 년을 설계한다. 예정에 없던 일이 끼어드는 건 싫다. 싫다 못해 짜증이 난다.
과거는 더 이상 변할 게 없으니 아련하기만 하다. 후회나 안타까움은 있어도 결코 불안은 아니다. 그래서 현재에 집중하기보다 과거에 천착하는지도 모른다. 노래도 옛 노래가 좋고, 신작 영화는 끌리지 않아 옛날 영화를 보고 또 본다. 가끔은 정체된다 싶기도 하다. 과거 어느 지점에 멈추어 앞으로는 한 걸음도 못 나간 게 아닌가? 하는 일도, 즐기는 문화도, 세상을 판단하는 생각의 틀도, 더는 새로운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기서 멈췄다. 완벽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익숙한 김에 일단 눌러앉았는데,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을 때는 움직여 볼 여력이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한때, 패스트푸드점처럼 약을 내주기도 했다. 의약분업 후 몇 년 동안이었다. ‘어서 오세요!’와 ‘또 오세요!’ 사이에서 조제와 투약과 수납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바쁘고 급해서, 약 받는 사람들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금방 투약한 사람을 밖에서 마주쳐도 못 알아봤다. 복약대 앞에 늘어선 사람들을 다 해결하려면 말도 손도 빨라지는 수밖에 없었다. 두서도 있었고 서툴지도 않았다. 해야 할 건 다 했다고 자신했지만, 습관처럼 정해진 설명만을 반복했으리라. 돈은 더 벌었고, 덤으로 잡생각도 없었지만, 퇴근하고 나면 하루 동안 뭘 했는지 제대로 기억나는 것도, 기억할 만한 것도 없었다. 약을 짓는 순간, 복용 방법을 안내하는 순간, 매 순간 실수 없이 넘겨야 한다는 긴장과 스트레스의 잔상만 또렷했다. 소통 같은 건 생각할 수 없던, 챗봇이나 AI 자판기 같은 시절이었다. 만약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해야 한다면, 차라리 기계가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때의 반사신경도 체력도 아니니까.
큰길 건너편으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비어 있던 터에 새 건물이 올라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건물마다 의원이 생기고 약국도 하나씩 짝을 맞춰 들어왔다. 안과, 소아청소년과, 피부과, 통증의학과, 내과, 산부인과, 비뇨기과, 치과. 알아서들 균형 맞춘 메디컬타운이 만들어진 덕분에 바로 옆에 있던 이비인후과가 그쪽으로 이전하고, 산부인과는 폐업했다. 약국이 한가해졌고 직원을 줄여야 했다. 자발적은 아니었지만, 강력한 업무 다이어트였다. 그게 딱 10년 전이다.
덕분에, 지금은 다르다. 일단 사람을 본다. 눈을 맞추고, 그 사람이 하려는 얘기가 뭔지 듣는다. 간단히, 흔히들 쉽게 쓰는 약을 주더라도, 필요하다 싶은 걸 꼭 일러준다. 자주 오는 사람과는 사는 얘기도 한다. 자대배치받은 아들 면회는 갔다 왔는지, 지난달에 입원한 어머니는 수술 잘 받았는지, 출장은, 여행은 잘 다녀왔는지, 잔치는 잘 치렀고 새 며느리는 예쁜지, 교통사고는 잘 수습됐는지. 큰 소리로 외치는 ‘어서 오세요!’는 없어도 편안한 웃음으로 들어오고, 간절히 ‘또 오세요!’ 하지 않아도 다음에 와서 이야기한다. 여기 물어봐야 마음이 놓여서, 다른 데 못 가겠어….
물론 약국만 변해간 건 아니다. 사람도 똑같은 세월을 지나왔다. 몸무게는 늘 고만고만한데 팔다리 근육은 허리와 배에 살로 가서 붙었다. 살집은 더 불고 팔다리와 머리카락은 가늘어졌다. 눈에 초점이 점점 안 맞더니 약 알마다 인쇄나 각인된 글자는 이제 돋보기 없이는 알아볼 수가 없다. 책 읽기가 불편해서 다초점 안경을 맞춘 게 벌써 대여섯 해 전이다.
힘든 다초점 안경 적응기는 선배들로부터 여러 번 들었지만, 책을 볼 때마다 눈을 찡그리고 팔을 눈에서 멀리 길게 뻗어 내는 성가심만 하겠냐 싶었다. 안경을 받아 와서 한 달쯤은 쓰고 벗기를 반복했다. 평소에는 기존에 쓰던 안경을 쓰다가 돋보기가 필요할 때만 새 안경으로 바꿔 쓰기도 했다. 흐린 날이면 눈 컨디션이 더 나빠져 종일 다초점 안경을 써야 했다. 필요한 걸 전보다 선명하게 읽을 수도 있었지만, 사물과의 거리에 따라 안경 높이를 바꿔야 해서 자꾸만 손이 갔다. 그러고도 초점이 맞지 않으면 눈을 떴다 움츠렸다 반복하느라 평소보다 두세 배는 피곤했고 때론 짜증이 일었다. 최근에야 그 안경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데, 생각해 보면 후천적으로 장애를 입은 사람들이 겪는 과정과 같다. 어차피 노화와 장애는 경계가 모호하다.
그래서인가? 그걸 쓰고 있으면 늘 억울하거나 슬프다. 눈에 눈물을 그득 담고도 흐르지 못하게 참고 있는 것 같다. 막 울음이 터지기 전, 아직은 꾸역꾸역 참고 있을 때. 만약 한 방울이라도 흘러내리게 되면, 그 뒤는 감당할 수 없는. 울면 부끄러운데, 더 혼이 날 텐데, 어찌할 줄 모르고 마음만 복잡한. 다초점 안경을 썼을 때 왠지 불안하고 서글프며 뭔가 잘못하거나 잘못되고 있는 것 같은 건, 그 탓일 게다. 야단맞던 어린 시절처럼, 그렁그렁 눈물 고인 시선이다. 그때는 자라서 뭐라도 될 기회라도 남아있었지, 지금은 그와는 반대로, 기다리는 건 늙고 쇠퇴하는 일뿐이다.
아니다, 억울할 필요 없다. 다 내가 써먹은 몸이고 내가 허비한 시간이다. 그 세월이 무색하게, ‘너 따위가 약사냐?’고 따지고 드는 사람에게도 원인은 내가 제공했다. 다른 이유가 없다. 그러니 어서 은퇴해야지. 은퇴가 안 되면 업장이라도 접어야지. 매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꾸역꾸역 출근하고, 익숙함을 핑계로 한 주, 한 달이 쌓여 또 해가 넘어간다.
약이나 비품을 두려고 만들어 놓은 창고 안쪽은 쉽게 버리지 못한 잡동사니가 차지하고 있다.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남겨둔 것들은, 간혹 바라던 대로의 딱 맞는 용도를 찾아 부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수년째 먼지 이불만 쓰고 있다. 주기적으로 교체한 고물 컴퓨터와 관련 비품들, 제약회사에서 프로모션용으로 보내는 진열대들, 더는 안 쓰는 약탕기, 약국을 수리할 때 남은 목재와 인테리어 필름, 여분으로 미리 사 둔 LED 전등과 각종 연결선 등. 아내는 이것들 때문에 약국에 나와보기 싫다고 했다. 이래서야 고물상인지 약국인지, 원.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쓰레기일 뿐이다. 아내는 내가 아니다. 그러니 늘 타박이다. 구석에 세워만 놓은 눈삽이 걔 중 제일 단골 잔소리 레퍼토리다.
눈삽 옆 50리터 쓰레기봉투에 말라비틀어진 산세베리아가 쑤셔 박혀 있다. 오랫동안, 환자 대기 의자 끝, 약국 전면 통창에 기대서있던 놈이다. 여름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겠으나 겨울은 견디기 힘들었을 게다. 해가 드는 낮에는 그나마 버텼겠지만, 난방도 끄고 퇴근하는 밤이면 추위와 외로움 속에 혼자 떨었을 것이다. 10년이 넘도록.
물을 일 년에 열 번은 줬을까? 몇 년 동안, 성장이라곤 없이 잎은 얇아지고 색은 옅어졌다. 초록이 연두로 되다가 잎 가장자리가 아예 노란색에 가까워지니 식물을 아끼는 사람마다 입을 댔었다. 이렇게 두면 안 된다고, 어찌 이럴 수 있냐고, 주인의 학대에서 구해내야 한다는 소명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산세베리아는 해마다 오래오래 꽃을 피웠다. 산세베리아를 크고 풍성하게 잘 키우고 있는 사람들도 꽃을 본 이는 많지 않아서, 형편없는 몰골에 혀를 차다가도 꽃을 보고는 신기해했다. 산세베리아 꽃이 이렇게 생겼구나….
딴에는, 언제 생을 마쳐도 이상할 게 없는 제 상황을 아는 녀석의 간절한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가기 전에 어떡하든 똑같은 DNA를 가진 놈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결국 지금은 자그만 화분에서마저 뽑혀 쓰레기봉투에 들어가 있지만, 녀석의 일생은 여기 약국 안의 어떤 존재보다 치열했다. 내가 안다. 녀석의 순직은 며칠 되지 않았다. 장례는 특별히 예우하지 못했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죽고 난 뒤의 처리 방법은 같다. 그냥 폐기물이다.
젊었을 때는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요즘은 간간이,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딸이 만나는 사람이라고 제 핸드폰에서 잘생긴 청년을 보여줬을 때, 다른 것보다 그런 생각을 먼저 했다. 이 친구는 식물을 잘 키웠으면. 그런 사람이라면 옆에 있는 사람도 그만큼,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잘 챙겨줄 것 같았다. 말도 없고 눈에 띄는 표현도 미숙한 식물을 잘 보살피는 섬세함이 있었으면…. 그런 건 타고나야 하니까. 애써 노력해서 좋아지기도 하지만, 타고 난 사람만큼 되기는 힘드니까.
식물과는 궁합이 멀어서 하는 바람이다. 사실은 제대로 시도조차 한 적이 없다. 그 쉽다는 산세베리아도 말려서 죽이는 판에 또 다른 뭘? 아내도 그런 편인데, 나보다는 분명 낫지만 거의 도긴개긴이다. 그런 이유로 집에도 화분이 몇 없다. 안 그랬다면, 그래서 집에 좀 더 녹음이 풍성했다면, 아이들이 지금과는 좀 달랐을까? 딱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랬다면 아이들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푸른 잎이 돋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을 해보기도 한다. 나중에 아이들이 만날 배우자라도 식물을 좋아하고 화초를 잘 가꾸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그 때문이다. 내 아이는 당연히 부모인 우리를 닮았으니, 아이들의 아이들을 위해서는 그 방법뿐이다. 반려동물을 들이는 것은 환경의 제약이 많지만, 식물은 마음만 먹는다면 동물에 비해 훨씬 수월하니까 말이다.
그 마음은 결국, 내가 못 해준 걸 다른 데에서라도 보상받기를 바라는 욕심일 거다. 아이나 아내를 위해 뭐라도 한 뒤에 그걸 알아주지 않아 내심 섭섭해졌을 때, 나는 좋은 아빠가, 좋은 남편이 되지 못할 것을 알았다.
중학교 때인가, 상을 다 차리고 밥을 푸면서, 한숨 같은 넋두리를 풀어놓던 어머니를 기억한다. 종일을 무료하게 보낸 일요일 저녁쯤이었다. 에휴, 내가 뭘 바라고 너희들을 키우나, 거나 그 비슷한 말이었을 것이다. 저녁상을 차리는데 수저 하나 알아서 놓지 않고 멀거니 있는 남매가 못마땅했던 섭섭함이 과장되게 새 나온 거라 지금은 짐작하지만, 그날은 그런 엄마의 말과 표정에 섭섭함이 컸다. 그날 일기에, 부모는 마땅히 자식들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양육의 대가로 뭔가를 바라서는 안 된다고, 자식이 부모의 노후대책이나 투자 같은 것일 수는 없다고 썼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덧붙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그 나이 때 일기란 것의 특성상 분명 그런 말이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미 오래전에 알았다. 지금보다 훨씬 더 이전에, 그때의 어머니 나이가 되기도 전에.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하고, 나를 위해 뭔가를 해주기를 바라는 건, 진정한 게 아니다. 주고받아야 공평하다는 생각, 식구들 간에는 그러는 게 아니다. 특히 부모는, 사랑하는 사람은 그러는 게 아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그래서는 좋은 부모, 좋은 남편일 수 없다는 말이다. 오직 바라는 건, 내가 사랑을 주는 아이들이나 아내가 행복한 것.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가능할까 모르겠다. 그러니, 아이들이라도 어떻게든 더 좋은 인연을 만나기를 바랄밖에.
뒷문을 닫고 바로 붙어 있는 바깥문을 열어 보니 마주 보는 노래방 입구에서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며 어울려 있다. 침 뱉고, 욕하고, 웃는다. 교복을 입은 애도 있다. 노래방과 이어진 약국 뒤 주차장에도 아무렇게나 버려진 담배꽁초가 수두룩하다. 대로변이 아니라 으슥하고 은밀한 분위기가 있는 곳이긴 하다. 당장의 불편함이 아니라도 아들 같아서, 뭐라고 입을 대려다 만다. 어차피 통하지도 않을 거고, 누구나 다 아는 꼰대 짓이다. 애들이 담배를 피우는 건 법으로 금지된 게 아니다. 애들한테 담배를 파는 것만 불법이다. 그래도 꽁초 투기는 불법인데, 그것도 뭐랄 수 없다.
출근할 때 보면, 중학생, 끽해야 고등학교 1학년쯤으로 보이는 무리가 거의 매일 건물 뒤 주차장 구석에 모여 앉아 담배를 피운다. 연초를 빠는 녀석, 전자담배를 돌려 피우는 놈들. 대부분 남자애지만 가끔 여학생도 있다. 눈이 마주치면 힐끔힐끔 눈치를 보기는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내내 당당하다. 어쨌거나, 등교 시간이 한 시간도 더 남은 이른 시간부터 학교에서도 먼 여기에 교복을 입은 채 모여 앉은 걸 보면 부지런하다고 해야 할지….
자전거와 킥보드도 종종 거슬린다. 아무나 타고 아무 데나 놓고 가는 공유형이다. 자기 물건 아니라고 길 가운데에 떡하니 세워두고 간다. 골목을 막고 세워둔 것들을 들어 옮기지 않으면 차가 지날 수 없다. 결제하지 않으면 잠겨 있으니 굴려서 옮길 수가 없는데, 배터리 때문에 보통 자전거보다 훨씬 무겁다. 이 또한 아이들이 그랬으리라 짐작하지만 직접 본 적이 없으니, 답답한 사람이 치우는 수밖에.
주차장에 볼일이 있는 사람 중 제일 성실한 이는 아침마다 나타나는 캣맘이다. 동네에 몇 군데 위치를 정해 사료와 물을 놓아두고 점검하는데 활동 시간이 내 출근과 겹쳐 종종 마주친다. 추운 겨울밤에는 퇴근 때에도 한 번씩 만난다. 얼어버린 물을 바꿔주려는 거다. 안타깝게도, 캣맘은 마주치는 사람의 눈치를 본다. 특히 사료와 물을 놓아두는 건물에 관련된 사람이면. 반기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 지저분해지니까. 응원도 타박도 하지 않는데, 꽁초를 투기하는 아이들보다 지레 더 주눅이 들어 그런다.
그래도 아이들은 그나마 양반이다. 해가 지고 나면 보안등 사각지대에 숨어 방뇨도 이어진다. 건물 벽은 물론 가끔은 차량 타이어에도. 년 전에는, 뒷문에 대고 오줌을 누던 취객 2명과 시비가 붙기도 했다. 둘 중 하나는 미안하다는데 하나는 적반하장이었다. 결국 경찰을 불렀고 경범죄로 단속되자, 경찰이 가고 나서 다시 나타나 욕설을 해댔다. 약국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는데, 가방에서 수도 배관용 렌치를 꺼내 약국 유리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러댔다. 한 번 더 신고할까 했지만, 그제야 알았다.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처벌은 가벼울 것이고, 반성보다 앙심만 키우기 쉬웠다. 말 그대로 주먹은 가깝고 법은 먼 형국이었다. 결국 문을 열고 나가 술 깨는 약을 먹이고, 되려 한참 동안 설교를 듣고 나서야 끝이 났다. 동네에서 장사하면서 그러는 거 아니라는, 오줌을 쌀 수도, 토를 해 놀 수도 있다는, 술 먹은 놈이 그러는 건 당연히 이해해야 한다는. 한참을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그 말이 조금은 수긍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분명 말이 안 되는데도. 그 뒤로는, 여간해서는 남의 일에 간여하지 않으려 한다. 비겁해진 건지, 약아진 건지.
문을 잠그고 경비를 설정한다. 겨울도 다 지나지 않았나 싶었는데, 공기가 유난히 차다. 언제라고 별이 또렷이 보인 건 까마득하지만, 유독 하늘 가득 먹물을 쏟은 듯 어둠이 낮고 두텁게 드리워 있다. 너도 낮고, 무겁구나. 가자, 어서, 집으로.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운전석과 운전대의 열선부터 켠다. 멀지 않다. 집까지의 운전은 히터가 뜨거운 바람을 본격적으로 내뱉지도 못할 시간이다. 나이가 들수록 길지 않은 그 잠깐의 추위도 싫어진다. 손발 끝이 시린 건 오래 먹은 혈압약, 그보다 근본적으로 몸이 늙은 탓이겠지만, 이제는 이런 정도쯤이야, 이게 뭐라고, 하는 단단한 마음을 먹을 수 없다. 때론 자신이 넘쳐서 치기 어리고 무모하기까지 했던, 그런 마음으로 대했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용기와 호연지기라고 뭉뚱그리던 날들. 의도하지 않아도 격랑으로 치달았고, 결국 탈이 나도 또 어떻게든 수습이 되던 때. 하지만 더는 아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이미 쪼그라들었다. 그렇지만 얼마나 다행이냐. 그렇게 변했다는 걸, 그렇게 되었다는 걸 이제 알고는 있으니.
주차장을 나와 큰 도로로 접어드는데, 차창을 향해 무언가 내려앉았다가 바로 미끄러진다. 곧 밤하늘의 어둠으로부터 연달아 다가들며 솜뭉치 같은 하얀 얼굴을 불쑥불쑥 내민다. 눈송이, 오랜만이다. 제법 굵다.
홀린 듯 바라보다 걱정이 앞선다. 당장 퇴근이야 아무렇지 않겠지만 내일 출근은 어쩌나. 내렸는지도 모르게 금세 녹아 사라질지, 소복소복 밤새 내려 세상을 덮어버릴지 아직은 알 수 없는데도, 일단 최악을 떠올려본다. 분명, 가볍게 흩어지는 싸락눈은 아니다. 미끄럽고 얼어붙을 길을 생각하니 적당히 내리다 그쳤으면 싶어진다. 아침에도 쌓여있다면 직원들은 지각하게 될 것이다. 적설량과 상관없이 일단 쌓이기만 하면 천재지변이라 지각은 어쩔 수 없다고, 불가항력이라 여길 것이다. 전에는 그게 그렇게 이해되지 않았다. 나빠질 도로 사정을 감안해서 그만큼 좀 서둘렀으면 됐을 텐데, 하고.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밤새 눈이 쌓인 걸 어떻게 알고 아침에 일찍 일어날까? 밖에서 일하는 직업도 아니고, 아직 서른도 안 된 사람들이 매일매일 날씨 예보를 챙겨보고 잠들 수 있을까? 내가 그랬으니 다른 사람도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어쩌면 오만일 수 있다는 생각도 이제는 한다.
눈송이가 연이어 떨어진다.
꼭 걱정만 있는 건 아니다. 창고에서 보초만 서고 있는 눈삽을 꺼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몇 년만의 외출인가? 어쩌면 내일, 녀석은 데뷔전을 치르게 될 것이다. 알고 있다면, 오늘 밤 쉬 잠들지 못하리라.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본래의 효용대로 맹활약할 기대에 설레고 벅차서 진정해보려 해도 두근두근 떨리는 심장을 어쩔 수 없으리라. 녀석은, 오래 기다렸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보닛과 차창에 제법 눈이 쌓인다. 와이퍼를 작동시켜 눈을 쓸어 내야 할 정도다. 괜히 내 일처럼 설레어 작은 미소를 짓는데,
‘빠앙!’ 하고 신경질적이고 커다란 경적이 뒤차에서 날아와 꽂힌다. 깜짝 놀라, 급히 가속페달을 밟는다.
어중간한 눈발을 뚫고 차가 튀어 나간다.
(202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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