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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안개

by FeelSeoGood 2023. 7. 24.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았다. 역 광장에 뜬 그믐달 위로 지나는 구름 빛이 짙었다.

  마지막 승객이 빠져나가자 역무원은 서둘러 쇠문을 닫아걸었다. 사람들은 채 깨지 못한 밤 기차의 피곤을 안고 각자의 걸음을 서둘렀다.

  신평(新平)에 서는 그날의 막차였다. 고향 이름을 내건 식당들도 하나둘씩 불을 끄고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인근 도시 아침 장으로 시골 아낙들을 실어 갈 첫 전철이 새벽을 깨울 때까지 역은 잠들 것이다. 굼뜬 장꾼만 남은 파장 무렵처럼 쓸쓸한, 자정 가까운 시골 역. 처음은 아니지만 초행 보다 낯선 곳. 어중간한 술기운 때문인가? 분명 그 속인데도 녹화된 화면이나 사진을 보는 것처럼, 선우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손을 뻗어 만지려 하면 눈앞의 모든 게 스르르 흩어져버릴 것 같은, 신기루처럼.

  “멀리 갈 수 있나요?”

  여자치고는 낮은 목소리였다. 아직은 남은 택시가 있어서 무심코 담배를 꺼내 물었던 선우는 누가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깨에 채 닿지 않는 단발. 서른 후반이나 마흔쯤? 두 손으로 몸보다 커 보이는 보스턴백을 들었다. 몸이 기운 정도로 봐서 만만치 않은 무게란 걸 알겠는데, 표정에는 버거움이 없었다.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말끔함, 그래서 더 호기심을 끄는 백지 같은 얼굴. 화려하진 않지만 또렷한 이목구비. 선우는 몸에 밴 습관대로 짧은 순간에 여러 가지를 살폈다.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얼굴. 구면이던가?

  잠시였지만, 선우는 여자의 말이 단순한 흥정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당신은, 진정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나? 얼마나 먼 여정을 감당할 수 있는가? 막막한 길 위에 선 선우의 상황에 얼추 어울릴 것도 같은 질문.

  선우에게 신평은, 낯설지 않은 먼 곳이었다. 차라리 아무 기억이 없다면 관광객처럼 설레기라도 할 텐데, 유년의 조각만 남은 그곳은 귀찮지만 벗어버릴 방법이 없는 짐처럼 거북하기만 했다. 호객과 흥정이 오가는 어수선함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유독 또렷했던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선우는 그 말이 자신을 향해 쏘아진 메시지 같았다.

  “어데 가능교?”

  “지화리(至和里)요.”

  “지화리 어데 말잉교?”

  “큰골까지요.”

  “이만워이믄 가긌네! 거가 머 멀다꼬. 난 또 억쑤로 멀리 가나 해가 도이 쫌 될라나 했디만.”

  팔짱을 낀 택시 기사는 가격을 못 박듯 목소리를 높이고는 슬쩍 여자의 반응을 살폈다. 여자는 더 말없이 택시 뒤편으로 가방을 가져갔고 그제야 팔짱을 푼 기사는 운전석에서 버튼을 눌러 트렁크를 열었다. 여자는 힘겹게 가방을 실었지만 작은 찡그림도 짓지 않았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운전석 옆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합승 택시가 처음은 아닌 것 같았다.

  선우는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다시 팔짱을 끼고 호객을 시작하는 기사에게 말을 붙였다.

  “지화리 얼마죠?”

  “지화리 어데요?”

  “지화리면 거기서 거긴데 어딘들 차비가 다릅니까? 그냥 지화리지.”

  “첨잉교? 거어가 마을이 몇 갠데. 그걸 알아야 방향을 마차볼 꺼 아잉교?”

  판에 박힌 대꾸가 거슬려 은근히 거칠게 대꾸했던 선우가 머쓱해졌다.

  “큰골이요.”

  가야 할 곳이 지화리인 건 분명했지만 정확히 거기가 어느 마을인지 선우는 몰랐다. 그냥 적어 온 주소를 보여주는 게 맞았을 텐데, 왜 그랬는지, 선우는 무턱대고 여자의 행선지를 따라 말했다.

  “딱 대뿠네. 여도 큰골 간다 카이.”

  “얼마요?”

  “이만 원요!”

  “거기까지 얼마나 걸려요?”

  “안개만 안 끼믄 한 삼십 부이믄 가지 싶은데, 산길에 골이 깊어가 드가 바야 알긌지. 정말 첨잉갑네.”

  선우는 대꾸 없이 피우던 담배를 끄고 택시 뒷좌석으로 들어갔다.

 

  서로 좋은 인연은 아이라 캐도, 전화로 하고 말 얘기는 아일 낀데…….

 

  차에 앉고서야 근처 여관에 묵었다가 아침에 들어가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거였으면 기차를 탈 일도 없이, 여유 있는 다른 날 차를 몰고 왔어야 했다. 따져서 세운 계획은 없었다. 우선 부딪히고 보자는 마음이었다. 남자에게 어떤 실마리를 얻는다 해도 당장 더는 둘러볼 수도 없겠지만 어차피 나선 걸음이었다. 미룬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면 빨리 끝내고 싶었다. 깔끔히 털어내지 못한 채 다 지난 일에 자꾸만 끌려드는 무력감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선우가 가진 건 남자의 연락처뿐이었는데, 그는 몇 시가 됐든, 와서 전화하라고 했다. 나름 목돈을 챙길 기회라 여기는지도 몰랐다. 딱히 의심할 까닭이 없는데도 그 말은 순수하게 들리지 않았다.

  한 시간 안에, 큰골에서 전화 드리…. 더 늦기 전에 도착이라도 알려두려고 문자를 보내다 핸드폰을 덮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신평에 대한 보고는 보름 전에 받아 놓고도 미적거렸다. 계속 갑호(甲號) 비상이기도 했고 선뜻 내키지도 않았다. 바로 전날에야 전해 받은 번호로 통화를 했다. 어렵게 옛일을 끄집어냈을 때, 수화기 저편의 남자는 선우의 말을 자르며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뭔가 알고는 있는 것 같았다.

 

  맘이 정해지믄 언제라도 오소. 내야 어디 나갈 일도 없으이까.

 

 

  주말이었고, 마침 비상령이 해제되었다. 그간의 노고를 위로할 핑계로 낮부터 부하 직원들을 회식 자리에 모았었다. 2차까지 따라갔다가 적당한 분위기에 빠져나왔다. 집으로 가던 택시가 서울역을 지날 때 선우는 홀린 듯 차를 세웠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광장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거대한 인파와 봄치고는 따갑던 햇살, 노란색 종이 모자들 위에 떠가던 수많은 만장과 끝없이 이어지던 노란 풍선들. 그게 언제였나 싶었다. 벌써, 다 잊었나?

  사람들은 전과 다를 게 없었다. 기억의 유효기간은 얼마인가? 역사의 한순간도 시간 앞에서는 희미해질 뿐 아닌가? 하물며 개인의 일이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어쨌든 다 끝이 아닌가. 누구도 더는 의미를 두지 않을 일이 될 텐데. 기차에 오르면서도 선우는 그런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택시 안은 어색한 적막이었다. 앞자리의 여자는 오도카니 창밖만 응시했다. 선우는 딱히 시간이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소매를 걷어 시계를 두어 번 봤다. 밖에 선 기사의 얇은 셔츠 깃에 계절의 변화가 보였다. 여름이 멀지 않았다. 기사는 잠시 몰렸던 사람들이 다 가도록 한 차를 못 채우자 남은 동료들과 실없는 넋두리나 주고받았다.

선우가 차창을 내렸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됩니까? 사람도 더 없는 것 같은데, 인제 그만 갑시다.”

  불편한 감정을 죽이며 건조하게 얘기했지만, 기사는 흘낏 뒤돌아보고는 선우를 등진 채 건성으로 내뱉었다.

  “거 쫌만 있어 보소. 술 묵꼬 드가는 사람 몇 올끼이까네.”

  들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선우는 신분증을 내보이며 엄연히 불법인 합승에 딴지를 걸까 하다 말았다. 빠르고 간단한 해결이겠지만, 직위를 생각하면 모양은 나쁠 터였다. 여자는 얼핏 선우와 기사의 대화에 관심을 두는 것 같더니, 이내 다시 창밖으로 돌아갔다.

  “어, 거 좀 덥네.”

  소득 없는 대화에 멋쩍어진 선우는 더위 탓을 하며 앞 좌석 사이로 팔을 뻗어 에어컨을 틀었다. 선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여자는 어깨를 한쪽으로 조금 피했다. 시원한 공기에 낡은 차 특유의 냄새가 묻어 나왔다.

  노곤함이 밀려왔다. 선우는 두 손으로 눈두덩을 꾹꾹 누르고 안경을 고쳐 썼다. 의자에 기대 잠시 눈을 감으니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간절함인지, 처절함인지 모를.

 

  똑또기 새기라우. 니 동생 찾으라. 기래야 내래 일 없이 듁디 안칸?

 

  오랜만에 어머니를 모시고 온 면회였다. 요양원 마당에서 바깥공기를 쐬던 아버지가 곁에 선 선우를 손짓으로 불렀다. 허리를 숙여 거리를 좁혔지만, 공기만 새어 나올 뿐 채 말이 되지 못한 소리를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치매로 입원한 게 벌써 3년, 시력도, 청력도, 목소리까지, 아버지는 여러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춥다거나 화장실에 가자는 줄 알았다. 아버지에게서 평소와 다른 표정을 읽지 못했다면 선우도 더 확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입에 귀를 바짝 붙여 겨우 발음을 인지하고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선우도 들어본 게 언제였나 싶은, 50년 전 떠나온 고향 말로, 아버지는 ‘동생’이라고 했다.

  어떻게 사는지 궁금은 했다. 가끔 맥락도 없이 그 시절이 떠올랐으니까. 찾아볼 마음은 없었다. 그건 미루고 미루다 까맣게 잊은 숙제 같은 것이었다. 하기 싫어서였는지, 능력 밖이라 엄두를 못 냈는지, 명확히 구별할 수는 없었다. 선우가 철도 들기 전 일 년 남짓의 일이었고, 그 일로 부모님 간에 회복할 수 없는 앙금이 남았다. 오십이 코 앞인 선우에게는 그저 옛일일 뿐, 저물어가는 두 분의 생과 함께 세월의 저편으로 묻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선우의 마음에 뒤늦은 파문을 만들었다. 목소리까지 낮춘 의도적인 은밀함이 부은 목에 침을 삼키듯 까슬하게 걸렸다.

  당신도 면목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힘들여 꺼내 놓는 건, 삶의 종착점에 선 특권인가? 아니면 이제 무엇도, 당신의 몸조차도 뜻대로 어쩌지 못하는 이의 간절함으로 이해해야 하나? 누군지는 안다. 그렇지만 이제 와, 왜? 선우는 저만치 오시는 어머니를 보고는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그날따라 유독 또렷했던 아버지의 의식에 어머니는 계속 감사의 마음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삶에 아무런 미련도 욕심도 없던 아버지였다. 오랜 세월 흔적 없이 살아오지 않았던가. 야반도주하듯 신평을 떠나온 이후 세상과 관계하며 살림을 책임졌던 건 어머니의 국숫집이었다. 아버지는 그 한 번의 사건 이후 늘 흐리멍덩한 눈으로, 무욕하고 무해하게 그저 숨만 쉬어 왔다. 그랬던 아버지의 처절하게 간절한 표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선우는 알 수 없었다. 반년쯤 전이었다.

  화가 일었다.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이의 단 하나 소원이라 해도 염치라는 게 있을까 싶었다. 반면, 혈육에 끌리는 건 인지상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나는 혈육이 아닌가? 함께 살았다는 사실을 빼면, 사랑이고 정이고 아버지가 보듬은 게 없으니 아버지 자리가 없었던 건 그 애와 내가 다를 게 뭔가? 선우는 억울했다. 왜 나만 이런 짐을 져야 하나? 하지만 어떻게 생각을 해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아버지가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선우뿐이라는 것이었다.

  선우가 학교에 가던 해인가, 그 이듬해인가? 포슬포슬한 볕이 마당에 비껴들던 오후였다. 선우는 새로 산 플라스틱 팽이를 돌리고 있었다. 나무 팽이보다 무겁고 단단해서 아무렇게나 던져도 쇠로 된 꼭지를 땅에 박고 힘차게 돌았다. 선우의 마음은 팽이를 따라 부풀었다. 팽이의 속도만큼 선우도 단단하고 당당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아버지가 한 팔로 그 애를 안고 큰 대문을 밀고 들어섰다. 익숙한 차 소리에 웃으며 마중 나오던 엄마는 그대로 뒤돌아 안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흙빛이 되었고 아이는 눈부시게 예뻤다.

  아버지가 아이를 대청에 내려놓고 엄마를 쫓아가자 선우는 그 애에게 팽이를 던졌다. 팽이는 아이를 때리고 대청의 미닫이문 유리를 깨뜨렸다. 아이는 얼굴을 감싸며 자지러졌지만, 선우는 도망치지 않았다. 울음소리가 커질수록 거기 서서 더 아이를 노려보았다. 그래야 선우 안에서 뭔가가 없어질 것 같았다. 두려움과 서러움이 범벅되어 터져버릴 것 같은 무언가가. 이상하게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선우는 그 짧은 순간, 단박에 네댓 살을 더 먹어버린 것 같았다.

  부리나케 뛰어나온 아버지가 아이를 들쳐 안고 나갔고, 엄마는 피멍이 터지도록 선우의 종아리를 쳤다. 아이는 왼쪽 볼 뒤를 길게 꿰매야 했고, 한 달 가까이 붕대를 붙이고 지냈다. 그동안 엄마는 그 애 곁에만 붙어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당신이 손수 마무리해야 직성이 풀리던 집안일도 데리고 부리던 옥이 누나에게 맡겼다. 같이 자고 같이 먹었다. 행여 더 큰 탈을 낼까, 선우는 얼씬도 못 하게 했다.

  엄마는 그 아이를 그렇게 받아들였다. 내칠 길이 없었다. 선우는 아이에게 남은 손가락 두 마디의 흉터를 전과(戰果)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야 알았다, 그것이 엄마에게는 업보(業報)였다는 것을.

  그때 벌써 이런저런 말을 재잘댔으니 아이는 서너 살은 되었을 것이다. 아이 엄마는 폐병이었다. 난치의 전염병 천륜보다 잘 살고 건강한 계모가 낫다 싶었을까? 딸이라면 끔뻑 죽는 친부만 믿었겠지. 조그만 게 말도 눈치도 빨랐던 덕에 특별히 구박받을 일도 없었다. 적어도 그때는 아버지가 누구보다 당당한 가장이었고, 엄마도 그 권위에 순종했었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엄마는 그 애에게 더할 수 없이 극진했다. 그건 절대로 곁을 줄 마음이 없다는 명확한 선언이었다. 엄마는 온몸으로 말했다. 내 새끼는 회초리를 쳐서라도 가르치지만, 너는 남의 새끼, 그러니 그저 예의를 갖춰 최선을 다하겠다고.

  선우는 그 애를 견딜 수 없었다. 혼자서 오롯이 차지했던 것을 순식간에 빼앗긴 울분이 넘쳤다. 어디서라도 뻐길 만큼 자신 있던 집에 위기를 몰고 온 게 누구인지 선우는 알았다. 선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아이를 울렸다. 혼이 나고 벌을 서면서도 선우는 당당했다. 아무도 못 하는 걸 자기는 해냈으니까. 그만큼 마음속에 미움이 자랐다. 그 아이를 향해, 아버지, 아니면 엄마를 향해. 아니면 그보다 더 큰, 자신이 놓인 혼란스러운 상황을 향해.

  아무것도 모를 나이였지만 눈칫밥 먹는 줄은 본능적으로 알았으리라. 제 딴에는 영악한 구석이 있어서 아버지나 엄마에게 무척 살갑게 굴던 아이였다. 손톱만큼도 정을 주지 않는데도 아이는 엄마를 병아리처럼 따라다녔다. 선우네에서 뿌리내릴 방법은 그것뿐이란 걸 아는 듯이. 생각해 보면, 그 아이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웃자랐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늘 상처받고 먼저 아프다는 걸 선우는 나중에 알았다. 자신이 그랬으니까. 이름의 끝 자로 숙아, 하고 불렀던 그 애도 선우와 똑같은 세월을 지나 어른이 되었으리라.

  정말, 어른이, 되었을까? 나는 또 얼마나, 어른이 되었나? 짐작으로는 첫 자가 ‘영’ 아니면 ‘경’이었던 것 같은데….

  “영숙… 경숙….”

  선우는 떠오르는 대로 천천히 발음해 봤다. 어느 것도 낯설기만 했다. 그때, 앞자리 여자가 제 이름이라도 불린 것처럼 잠시 돌아보다 멈칫했다.

  그 시절 흔한 이름 숙이는 이름처럼 평범하게 살지 못했을 것이다. 일 년이 좀 지나 제 외삼촌 손에 끌려 선우네를 떠나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어른의 보폭에 맞추느라 잰걸음을 하면서도 숙이는 자꾸만 뒤돌아봤다. 숙이에게 남은 마지막 기억은 대문 앞에 나란히 선 엄마와 선우일 것이다. 아무도 손을 흔들지 않았다. 둘 중 누구를 보는 건지,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숙이는 이내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가세가 무너졌으니 숙이는 천덕꾸러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파다하게 퍼진 소문은 갇히듯 방에만 있는 숙이 엄마에게도 닿았으리라. 나이 많은 유부남과의 추문으로 진작 연이 끊어진 오빠에게 어렵게 부탁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공안 관련 누명으로 끌려갔다 풀려난 직후였다. 고민을 받았고 번창하던 벽돌공장을 헌납해야 했다. 고문 후유증과 억울함으로 아버지는 일어나지 못했다. 동란 때 월남한 삼팔따라지가 소읍에서 손에 꼽을 규모의 사업을 하면서도 그 시절 돌아가는 상황을 나 몰라라 한 결과였을 것이다. 여기저기 조직되던 반공 활동에 얼굴이라도 내비쳤더라면 피해 갈 수 있었을까? 돈깨나 번다고 뻣뻣하기만 한 이북 출신을 권력이 곱게 볼 리 없었다. 읍내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선우는 경위로 임관하자마자 백방으로 내막을 알아봤다.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공식 절차를 거친 일이라면 경찰에 기록이 전무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경찰은 아니었다. 경찰이 아닌데도 연행하고 고문할 수 있었던 곳, 짐작은 갔지만 접근이 쉽지 않았다. 전국적인 시위와 항쟁으로 직선제가 되었어도 여전히 대통령은 군 출신이었고 곳곳에 그 힘이 미치고 있었다. 사실관계를 밝혀낸다 해도 억울함을 풀 길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보다 선우는, 아버지의 억울함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 후로 선우네가 겪은 고초는 길고 무거웠으나 내내 누워만 있었던 아버지는 그 시간을 함께 견뎠다고 할 수 없었다. 권력의 부당한 개입은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감당할 인과응보였을 뿐이고, 어머니와 선우의 고생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무능에서 비롯되었다는 원망이 더 강했다. 그래서 선우는 아버지 개인의 구명에 소극적이었다.

  세월이 흘러 원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을 때, 선우는 그 일을 잊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작은 방에서 무력한 한숨을 쌓고 있었고, 가정을 꾸리느라 억척이 되어야 했던 어머니도 이미 황혼의 평온을 찾았다. 선우는 결혼해서 새로운 가정을 이뤘고, 그 일에 무감해졌다. 가족의 화목과 혼자서 어렵게 일궈낸 입지가 선우가 지킬 첫 번째였다. 얻을 것도 없는 옛일을 들춰 볼 이유가 없었다.

  엄마는, 떠나는 숙이가 어땠을까? 안쓰러웠을까? 갑작스런 풍비박산을 어린것 탓으로 여겨 원망했을까? 무엇이 됐든, 조카를 데려가는 숙이 외삼촌을 만류하지는 않았다. 더는 사람 구실 못하게 된 남편에 거덜 난 가산. 입 하나 더는 게 중요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선우는 가난의 냄새를 알았다. 집안 가득, 낮은 곳부터 켜켜이 쌓여 아무리 쓸어내도 흩어지지 않는 알 수 없는 서늘함. 엄마의 꽃 같은 함박웃음도 더는 없었다. 선우가 경찰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무사히 임관하던 날도, 손주를 안겨드렸을 때도.

 

 

  한동안 조용하던 바깥이 왁자한가 싶더니 택시 문이 벌컥 열렸다. 술 냄새가 확 끼쳤다.

  “에헤이, 거어 아입니다아. 여어 먼저 오신 부이 큰골 간다 카이 행님이 먼저 내릴 낀데. 절로, 반대로 타이소!”

  열렸던 문이 요란스레 닫히자 기사가 운전석에 앉다 말고 한 마디를 보탰다.

  “아이고오, 해임요! 문짝 다 뿌싸지겠다아!”

  곧 반대쪽 문으로 술기운이 덜한 사내가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선우는 안쪽으로 엉거주춤 자리를 옮기며 사내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사장님, 안쪽으로 쫌만 더요. 한 사람 더 타야 돼가꼬.”

  선우가 문 쪽으로 바투 앉자 취객이 따라 옮겼고, 처음 반대쪽 문을 열었던 불콰한 얼굴이 남은 자리를 채웠다. 자리를 옮기느라 앞좌석 머리 받침 가까이 상체를 숙일 때 선우는 앞자리 여자의 귀 아래에서 낯익은 흉터를 보았다. 이미 희미해서 가까이에서만 알아볼 정도로 오래된.

  “니 오늘 시마이가 늦네. 막차 손님 다 띠우도록 한 차 몬 맨들고.”

  “내가 해임들 올 줄 알고 자리 딱 비아놨다 아임미까? 한 사나흘 잠잠했으이 딱 오늘쯤 한 꼬뿌 할 줄 알았다 카이요.”

  “그거를 다 마차뿌고, 니 억쑤로 용하네! 근데 니 벌써 에어컨 틀었나? 써비쓰 직이네.”

  “어? 에이, 뭐꼬? 까스 딸는구만.” 기사가 룸미러로 눈을 흘겼다. “창문 열믄 시원한데, 끄고 감미데이.”

  맨정신인 기사도 취객만큼 목소리가 들떴다. 어딘지 모를 곳에 사내 둘을 내려주고 여자와 선우가 큰골에서 내리면, 기사의 하루도 끝이리라. 기사가 기어를 넣자, 택시는 진동과 함께 힘겨운 소리를 토하며 승강장을 빠져나갔다. 역전에는 아직 빈 택시가 두어 대 남았다. 대합실 불은 이미 꺼졌고, 역 광장 한쪽으로 늘어선 식당도 문을 닫았다. 천천히 작아지던 풍경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려서 종횡무진 쏘다니던 곳인데도 눈에 익은 건 없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밤이라서 그렇겠지, 낮이면 다를지 모른다고 선우는 생각했다. 군 소재지이긴 해도 도시라기에는 아담했고 그나마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산과 농지뿐인 건 여전했지만, 어쨌든 선우가 기억하는 신평은 아니었다.

  “요래 찡기 앉은 것도 인여인데, 여어 사장님은 큰골 간다캤능교? 안면은 없지 싶은데, 이 밤에 거 드가는 거믄 거 어데 친척이신가아?”

  불콰한 얼굴의 혀 꼬부라진 소리가 차 안의 정적을 깼다.

  “니 큰골 사람 다 아나? 머 아는 척이고? 술 췌가 실수하지 말고 가마 이끄라.”

  “뭐라 카노? 거어 몇 집이나 된다꼬. 거어 있는 우리 집안 아재만 해도 셋이거등. 내가 거 들락거린 기 벌써 반백 년이 넘는다 아이가!”

  만류하는 일행의 무릎을 건너, 불콰한 얼굴이 기어이 선우 쪽으로 팔을 뻗었다.

  “큰골 사는 분은 아이지요? 연배는 우리캉 비슷해 비기도 하고.”

  “저도 전에는 신평 살았었죠. 떠난 지 오래긴 하지만.”

  “아, 그랑교?”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선우의 마음과 달리 대화가 이어졌다.

  “신평 어데 살았등교? 우리 다 여 빠삭한데.”

  무시하고 싶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을 이었다.

  “경일블록이라고 아세요? 아, 경일부로꾸라고 해야 하나? 벽돌하고 시멘트 블록 만들던 덴데. 역 지나서 좀 밑에 있었죠. 전에 그 옆에 살,”  “벽돌공장? 그기 거 있었던 기 은젠데? 그기 20년 저인가 그 땅 팔고 더 밖으로 가뿠는데. 거서 동호레미콘으로 이름 바까가 엄청 커졌고.”

  커브를 돌 때마다 좌우로 몸을 휘청이면서도 불콰한 얼굴은 금세 아는 체를 했다.

  “동호레미콘? 그기 옛날에 브로꾸 공장이었나? 듣니이 첨이네.”

  점잖은 쪽도 말을 거들었다.

  “부로꾸 공장을 아는 거 보이, 여도 연식이 좀 되시는가배? 잘은 몰라도 어른들 말로는, 그때 신평에 신식 집들은 다 그 벽돌로 짔다고 보믄 된다 카든데.”

  “벽돌에, 레미콘에, 마이 벌었을 낀데, 결국 암껏도 모했재? 몇 번 나왔었다 아이가?”

  “와? 도의원은 한 번 해뭈을 걸?”

  “거어도 인심을 몬 읃었지. 돈 좀 썼시마 되고도 남았을 낀데. 돈 앞에는 정말 땐땐모찌였다 카데. 결국은 싸짊어지고 가지도 몬하고 자식들만 존 일 아했나.”

  “아들 셋이 저 아부지 죽자마자 다 팔아가 서울 가뿠다 카드만!”

  꼬부라진 혀는 자기 일이라도 되듯 화를 벌컥 토하더니 고개를 꺾고 졸기 시작했다.

  “근데 원래는 지 꺼 아이라 카든데, 해임들도 들어 봤지요?”

  기사가 대화에 끼었다.

  “뭐? 보안산가 신군분가 있다가 뺐아뿠다 카는 거? 그 카긴 카드라만, 그기 진짠지 아인지 우에 아노?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이다.”

  “뭐 요새야 그런 말 해도 누가 뭐라 칸다꼬요? 좋은 세상이다 아입니까? 겁내고 눈치볼 거 읎어요. 도이 읎어서 문제지, 말이야 뭐라 칸들. 대통령 욕하고 김일써이 만세를 불러도 안 잡히갈낀데.”

  “그래도 넘우 말 자꾸 해서 졸 거 뭐 있노? 세상이 또 바낐다 아이가. 청와대 나온 지 얼마 됐다고 저래 되는 거 보믄, 권력 그기 무서븐기라.”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점잖은 쪽이 표정을 바꾸며 화제를 돌렸다.

  “에헤 참, 그러고 보니 말이 좀 마이 나가뿠네. 혹시 거어 거, 브로꾸 가족이나 친척인 건 아이지요? 우리가 느무 말을 편하게 해가꼬….”

  선우는 말을 그만 섞으려고 표정으로만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오히려 호들갑을 낳았다.

  “아이라 안 카는 거 보이 거하고 머가 있능갑네. 우짜노 우리가 말을 막 했뿠네.”

  “아닙니다. 아무 관계없어요. 아니, 완전히 상관이 없는 건 아닌데…, 예전에, 레미콘 되기 전에, 저희 집이 그 블록 공장을 했어요. 제가 아주 어릴 때.”

  “아!” “어, 그라믄….”

  순간 차에 탄 사람들의 관심이 선우에게 모였다. 기사는 룸미러로 선우를 한 번 유심히 봤고, 내내 창밖만 보던 여자도 잠시 선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우가 화제를 돌렸다.

  “어려서 떠나고는 처음인데, 많이 다르네요. 기억나는 데가 하나도 없어요.”

  “에이, 고대로는 아이라 캐도 그마이는 아일낀데. 시골이 달라졌다 캐도 거어서 거어지.”

  들으라는 건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투였다. 무시하는 건지 격의 없는 건지, 서울에서라면 거슬렸을 텐데, 왠지 선우의 마음이 눅어 있었다.

 

 

  몇 마디에 몇십 년을 오갔다. 선우는 벌써 오래전 그때를 떠났는데, 신평은 그 시절에서 그리 멀리 가지 않은 듯했다. 어쩌면 곧, 선우도 그때로 빨려 들어갈지 몰랐다.

  숙이 친모다 싶은 사람을 특정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찾기로 마음먹기까지 시간을 끌었을 뿐이다. 기록에는 선우네가 신평을 떠나고 4년 뒤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맞게 찾았다면, 숙이는 학교 갈 즈음에 엄마를 잃었을 것이다. 예상대로, 그 밑으로 기록된 자식은 없었다. 기록을 좇아 망자의 유일한 혈육인 오빠, 그러니까 숙이 손을 잡고 간 외삼촌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주소도 찾았다. 확인한 바로, 그 주소지에는 노모를 모시는 아들 내외가 살고 있었다. 곧,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아니, 이미 확실한 게 하나 있긴 했다. 사람을 찾는 건 금방이어도, 그 거리를 뛰어넘는 데는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는 것.

  “망종도 안 댔는데 와 이래 덥노?”

  “이제 살살 안 더버지겠능교? 그래야 나락도 쑤욱쑥 크지. 해임은 안 바쁭교? 술도 다 묵꼬.”

  “내가 가자 캤겠나? 야가 문제지. 다 칭구 자알 둔 탓이데이.”

  “해임이 사람이 좋아서 다들 해임 찾는 기지. 머, 그것도 해임 탓 맞네!”

  낡은 지방도로 들어서면서 군데군데 해진 노면에 차가 꿀렁거렸다. 기어를 바꿀 때마다 택시가 토해내는 금속 마찰음과 요동도 더 커졌다.

  “실없이 지끼지 말고, 운전이나 단디 해라. 차 소리 와 일노? 똥차 느무 오래 타는 거 아이가? 인자 쫌 바까야지.”

  “어데요. 자알 달래가매 쪼매 더 타야 됨더. 돈도 읎꼬.”

  길 양쪽으로는 어느새 논이었다. 논 끝으로 집이 한두 채, 그 뒤로 야트막한 구릉. 어디나 같은 시골 풍경, 신평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길이 험해지고부터는 반듯이 정리된 논이 사라지고 모양이 제각각인 다락논이 이어졌다. 개구리, 메뚜기 잡는다고 뛰어다니던 어릴 적의 논두렁 그대로였다. 선우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좋고 싫고는 모두 이제 와 하는 판단들일뿐, 천방지축이었던 그 순간은 아련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언제 그 시절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한 번도 그 시절을 떠난 적이 없었던가? 매사에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짧았던 당신의 전성기. 신평을 떠나온 뒤로부터 시간은 어머니와 선우에게만 흘렀던가? 삶의 질곡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독기가 찬 어머니의 눈과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 듯 힘없이 풀려있던 아버지의 눈. 어느 쪽의 시선도 선우에게 제대로 와닿지 않았었다. 선우는 그저 혼자서 할 수 있는 걸 열심히 했을 뿐. 그게 선우가 선택한 세상에 대한 복수였다.

  “해임들요, 다 왔심더. 차가 덜덜거리가 좀 더 걸리뿠네.”

  어느새 낯선 마을 어귀에 차가 멈췄다. 콘크리트 다리 건너 산 밑으로 늘어선 몇 채의 집에서 불빛이 아련히 깜빡였다.

  “똥차 빨리 바까라. 머라캐도 연장은 존 걸로 쓰고 보는 기다. 다 왔다! 일나바라!”

  점잖은 이가 기사에게 농반진반 충고를 던기고는 진작 고개를 꺾은 친구를 흔들어 깨웠다.

  두 사람이 내리고 기사는 좁은 농로에서 차를 돌렸다. 기어를 바꿀 때마다 엔진에서 예의 격한 소음이 삐져나왔다. 멀리서부터 안개가 들어차고 있었다. 산길로 들어서자 주행 소음도 거칠어졌다.

  “원래 이마이는 아인데, 오늘따라 야가 디기 시끄럽네. 쪼매 이해하이소.”

  옆자리 여자와 룸미러 너머의 선우에게 번갈아 시선을 주며 기사가 말했다.

  곧 지화리에 도착하겠지. 막상 남자를 만나면 무슨 얘기를 듣게 될까? 숙이를 만나면 뭐라고 할 것인가? 아버지를 만나달라 할 수 있을까? 만나봐야 서로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무의미한 일이다. 결국은 뭘 해도 내 선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않나. 왜 내가? 왜 내게. 어쨌든 염치가 없다, 아버지도 나도, 염치가….

  선우는 하지도 않은 일을 책임져야 하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안개는 꾸역꾸역 쌓여갔다. 택시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힘겹게 올랐다. 아버지의 그 망연한 눈에 순간 반짝이던 빛을, 그 간절함을 모른 척했어야 한다고, 선우는 뒤늦게 후회했다.

  숙이는 어땠을까? 잠시 누렸던 풍족함이 평생 가장 비루한 기억은 아니었을까? 어리지 않았다면, 그 아이의 책임이 아니란 걸 알았을까? 삶은 사실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면, 우리는 덜 아플 수 있었을까? 선우의 마음에도 밤안개가 쌓였다.

 

 

  기사가 와이퍼를 작동시켜 차창에 묻은 물기를 지웠다. 낡고 굽은 도로는 택시를 계속 흔들었다. 안개가 짙어 기사도 불가항력이었다. 선우도 여자도 창문 위의 손잡이를 그러쥐었다.

  “어, 이거 와 일노!”

  택시의 속도가 줄어든다 싶더니 기사가 신경질적으로 엑셀을 몇 번 밟다가 사이드 브레이크를 당기며 소리쳤다. 길 가운데에서 기사는 시동을 몇 번 걸어보더니 낭패감 가득한 얼굴로 거칠게 문을 열고 내렸다. 핸드폰 라이트로 바퀴 안쪽을 비춰보고는 레버를 당겨 보닛을 열었다.

  계획 없는 여정에 어울리는 해프닝이라는 생각에 선우는 허탈한 웃음이 났다. 그래도 손을 좀 보고 나면 어떻게든 다시 출발할 수 있겠지. 원한 적 없어도 주인공이 돼버린 드라마, 딱히 궁금하지도 않은 결말이 조금 늦춰진다고 문제 될 건 없었다. 앞자리 여자는 어떨까? 여자의 말대로 멀리, 정말 멀리 가려 한다면 그 기나긴 여정, 여기서 잠시 멈춘다고 크게 구애할 게 있을까?

  “아, 이거 조짔네. 차 퍼지뿠네.”

  한동안 엔진룸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기사가 체념과 미안함을 뒤섞어 통보했다.

  선우는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워 물었다. 망연한 얼굴로 선우를 바라보는 기사에게도 한 개비 건넸다. 기사도, 선우도, 앞자리 여자도 황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말 못 가요?”

  “아이고, 이래 갑자기 퍼지뿔 줄은 정말 말랐는데. 방법이 없으요. 나도 전화해가 사람 불러바야…” “지화리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선우가 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사에게 불을 붙여주며 되물었다.

  “저기 산 모티이만 돌아가 쭈욱 내리가믄 되는데요. 사람 불러 고치는 것보다는 다른 차 부르는 게 빠르긴 할 낀데, 여까지 그것도 금방은 안 될 끼고. 고마 살살 걸어가시는 게 날 낍니더.”

  기사가 억지로 미안한 표정을 만들며 존댓말을 했다.

  “우야든동 이까이는 왔으이, 만 원씩만 다시 가아 가시고오. 우째 쪼매 봐주이소. 아가씨도, 부탁하께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다만 길을 잘 몰라서 걱정이었다. 말대로라면 삼십 분 안팎의 거리이겠으나 산길이고 밤이었다. 게다가 안개가 짙었다. 앞자리 여자가 초행이 아니라면 그 뒤를 따라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낯선 여자와 동행한다는 게 묘하게 걸렸지만, 불편함은 선우보다는 여자가 더 할 것이다. 어쨌든 지화리까지만 가면 더는 안 봐도 될 사이, 선우는 괘념치 않기로 했다.

  그제야 여자도 차에서 내렸다. 기사가 재빨리 트렁크로 가서 여자의 가방을 꺼내 여자 앞에 들고 왔다. 가방을 받아 든 여자는 천천히, 위치를 가늠하듯 지나온 방향과 가야 할 방향을 한 번씩 바라봤다.

  선우가 여자에게 물었다.

  “길 알아요?”

  여자가 처음으로 선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어두운 밤, 안갯속 여자의 얼굴이 잠시 망연해 보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떡였다.

  “따라가도 되지요? 지화리가 처음이라 길을 몰라요, 내가.”

  여자는 다시 끄떡였고, 기사가 급하게 선우와 여자에게 지폐 한 장씩을 떠넘겼다.

  여자가 말도 없이 택시 앞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선우는 담배를 던지고 여자를 쫓았다. 짙은 안개가 쌓인 검은 길을 택시 전조등이 찢어 놓고 있었다. 여자는 몸을 비스듬히 꺾어 가방 무게를 버티며 드라이아이스 가득한 연극무대 같은 길로 걸어 들어갔다.

  “그 가방, 괜찮아요? 들어줘요?”

  여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같이 갑시다!”

  그제야 여자가 걸음을 멈췄다. 선우는 헐레벌떡 여자를 따라붙으며 물었다.

  “아까, 왜 그렇게 물었어요? 멀리 갈 수 있냐고. 꼭 여기 말고 다른 데를 말하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여자의 표정이 잠깐 바뀌었지만, 선우는 알아볼 수 없었다. 웃었을까? 찡그렸을까?

  “멀었어요, 나한테는, 여기도.”

  여자의 대답은 안개 속 장면들처럼 똑똑 끊어졌다.

  선우는 여자를 좇으며 전화를 꺼내 들었다. 남자에게 걸어볼 요량이었다. 전화를 받는다면, 기왕 엮이기로 한 거, 늦긴 했지만 데리러 와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자기를 다시 그때로 데려가라고.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것을 또렷이 마주 보게 해 달라고. 빚인지, 응어리인지, 회한인지, 죄책감인지. 아니면 그 모두이거나 전혀 그런 것들이 아닌 무엇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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