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편소설

안녕 유코

by FeelSeoGood 2023. 10. 10.

 

   타케우치 유코가 죽던 날 재희는 처가에 다녀왔다.

  차로 두 시간 남짓 거리의 처가에는 쉰 그루 정도의 사과나무가 있었다. 고정적으로 사람을 쓰기는 애매했고 일흔이 넘은 장인이 혼자 관리하기에는 힘에 부쳐, 해마다 추석 전에 처형네와 날짜를 맞춰 수확을 함께했다. 제대로 된 일꾼에는 턱없이 모자랐어도 정례적인 처가 방문의 좋은 구실이었다. 코로나로 조심스러웠지만, 그건 사람의 일일 뿐 나무는 변함없이 때맞춰 결실을 맺었다.

  꽃 필 무렵의 우박과 여름 끝에 잇단 두 번의 태풍으로, 이번에는 품질이나 양이 기대에 못 미쳤다. 그래도 꼬박 반나절은 과수원에 매달려야 했는데, 실한 것들은 따로 모아 판매용 상자에 담고 나머지는 되는대로 비닐봉지에 담아 트렁크에 한가득 실었다. 상처는 있어도 먹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으니, 이웃에 알음알음 염가로 판매할 요량이었다. 재희는 잠시의 짬도 없이 과수원 일에 집중했고, 미주는 캐릭터 마스크를 하고 과수원 여기저기를 다니며 재잘대는 처형네 막내 지유와 놀기 반, 일 반으로 보냈다. 지유를 바라보는 미주의 미소가 너무 예뻐서, 재희는 가슴 한구석이 아렸다.

  소식을 들은 건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이었다. 출발하자마자 한 시간 정도 눈을 붙였던 미주가 어느새 깨어 스마트폰을 뒤적이다가 대뜸 물었다.

  “당신, 타케우치 유코라고 알아?”

  “알지. 내가 좋아하는 일본 여배우. 왜?”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 나왔던 여자 맞지?”

  “어, 그것 말고도,” “죽었다네. 자살 같대.”

  미주는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벌써 다른 기사를 열어보고 있었다. 미주의 스마트폰에 달린 호두알만 한 피카츄가 가볍게 흔들렸다. 헤어질 때, 지유가 큰맘 먹고 미주에게 준 거였다. 그러기까지, 처형이 미주 몰래 지유를 한참 어르고 달랜 걸 재희는 알고 있었다.

 “꽤 어울리네, 그거. 당신, 애들 닮은 데가 있어. 놀아주는 것도 잘하고.”

  “아휴, 지유는 정말….”

  미주가 뭐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지유’ 할 때 반사적으로 번졌던 미소가 금방 옅어졌다.

  재희는 계속해서 운전에 집중했다. 높고 맑은 하늘, 곧게 뻗은 고속도로, 빨간 후미등을 반복적으로 점멸하며 각자의 목적지로 달려가는 자동차들. 차선이탈 방지장치와 어댑티브 크루즈컨트롤도 성실히 작동하고 있었다.

  언젠가 당신에게도 사랑이 찾아와 당신을 얽어맨 것들을 벗어나게 하겠죠. 그럼 알게 될 거예요,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었고 또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지.

  차에는 Journey<Separate Ways>의 후렴이 흐르고 있었고 이내 New Trolls<Adagio>로 넘어갔다.

   네가 내 곁에 있기를 바랄수록 내 외로움만 알게 돼. 죽는다는 것, 잠드는 것. 어쩌면 꿈꾸는 것일지도.

  서정적인 스트링 어셈블이 흐르자 강한 비트와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금세 지워졌다. 잠시, 재희의 마음은 숙연해졌는데, <Adagio>를 들을 때면 늘 그랬던 정도였지 꼭 타케우치 유코 때문은 아니었다. 이른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애도의 마음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어쨌든, 삶이란 게 애초에 참 약하고 보잘것없는 게 아닌가 싶었다. 두 상태,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사이의 커다란 차이에 비해 그 거리는 너무나 가까워서.

   반짝이는 건 다 금이라고 믿는 여자가 있어.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사려고 하지.

  Led Zeppelin<Stairway To Heaven>에 미주는, 명곡은 명곡인가 봐, 지금 들어도 하나도 촌스럽지 않네, 했고, 재희도 그러네, 맞장구를 쳤다. 잠깐씩 대화가 끊겼지만, 미주는 다시 잠들지 않았다. 재희는 아직도 친정 오가는 길을 잘 모르는 미주에게 중요한 분기점마다 얘기해주었고, 도착할 때가 되자 미주는 사과를 내려줄 집을 재희에게 일일이 가르쳐 주었다. 서쪽으로 노을이 붉게 걸렸고 반대쪽으로 짙푸른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올 즈음 하늘이 흐려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배달을 마치고 아파트 단지에 들어설 때쯤에는 잦아들었는데, 채 몇 분의 짧고 굵은 비에 재희도 미주도 머리며 어깨가 젖었다. 비가 그치고도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재희는 짐과 미주를 아파트 공동현관에 내려주고 주차장을 몇 바퀴 돌았다. 일요일 저녁이라 빈자리가 없었다. 지하 2층에서야 여유 공간을 찾았는데, 이어진 주차면 3개 중 가운데에 빨간 세발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낡았지만 깨끗이 갈무리된, 많아야 네댓 살까지 탈 수 있는 것이었다. 아이가 타고 와서 놓아두진 않았을 것이다. 주말에나 쓰는 세컨카나 캠핑 트레일러 같은 것만 있는, 주차장에서도 제일 구석진 곳이었다. 귀가가 아주 늦지 않고서는 거기까지 갈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차에 싣고 내리다 잊어버렸다기에는 놓인 자리가 너무도 정확히 주차면 한가운데였다. 아무도 볼 사람 없는데도 여긴 내 자리, 하고 시위하듯이.

  맞은 편에 차를 세우고 재희는 잠시 그 세발자전거를 보았다. 혼자서 쓸쓸하겠다 싶다가, 아이 하나가 자전거를 향해 신나게 뛰어오는 모습을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전거를 향해 문득, 얘기하고 싶었다. 네 친구는 어쩌면 너를 잊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곧 알았다. 그런 말은 할 수 없다는걸. 한다면, 내일이면 네가 생각나서 어디 있냐고, 찾아내라고, 엄마 아빠에게 떼를 쓸 거라고 해야겠지. 너도 그걸 알아서 그렇게 당당한 거지? 재희는 혼잣말로 물으며 계단을 올랐다. 동작을 감지한 LED 등이 차례로 불을 밝혔다. 언제나처럼, 성실하게.

  지은 지 20년이 가까운 아파트였다. 관리가 잘 된 편이라 그렇게 낡진 않았다. 주차장에 엘리베이터가 없고 복도식이라 시끄러웠지만 재희와 미주는 이 아파트가 싫지 않았다. 무엇보다, 평수가 넓지 않아 좋았다. 관리비도 적었고 아이들이 많았다. 코로나 전에는 아파트 복도에서 내려다본 놀이터에 늘 아이들이 복작였다. 재희와 미주는 아이들이 좋았다. 다른 건 몰라도, 애들 소리는 소음으로 들리지 않았다. 웃으며 뛰놀 때는 물론이고, 칭얼대고 우는 소리까지도.

  공동현관에서 재희는 헌옷수거함에 옷을 넣는 여자를 보았다. 몇 호인지는 몰라도 안면은 있었다. 재희가 고개를 까딱, 해 보였고 여자도 아는 체를 했으나 표정은 서늘했고 이내 하던 일을 계속했다. 옆에 둔 사과 봉지는 미주가 준 것 같았다. 누군가 먼저 타고 기다리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재희는 과장된 종종걸음을 쳤다. 그런 중에도 미주가 엘리베이터 앞에 남겨둔 사과 몇 봉지는 잊지 않고 챙겼다.

  재희가 들어서자 쮸이가 현관 옆 장식장에서 갸르릉 거리며 뛰어내렸다가 다시 소파 위로 폴짝 옮겨갔다. 영역 침입에 대한 성가심이 노골적이었다. 쮸이는 소파 위에 펼쳐 놓은 옷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렸는데, 재희의 옷도 아니고 미주가 입은 걸 본 적도 없었다. 새로 샀나? 하지만 사이즈가 영 애매했다. 재희에게는 작고 미주가 입기는 클 것 같았다. 요즘 라지핏이 유행이라더니, 그런 건가? 가져온 짐을 한쪽으로 치워 둔 미주는 레토르트 카레를 데우고 있었다. 재희도 나머지 짐을 그 옆에 내려놓았다.

  “못 보던 옷이네? 샀어?”

  “아니, 7층 언니가 줬어.”

  “밑에, 지금 헌옷함 앞 그 여자? 친해? 옷도 받을 정도?”

  “당신도 봤구나. 아저씨가 자동차 튜닝점 해. 저번에 내 차 문콕 된 거, 거기 갔었어. 괜찮더라고.”

  “근데 늘 뭔가 좀 냉랭하던데. 옷이 예쁘긴 하다만, 아무리 그래도 입던 건데 뭐 하러,” 김치를 썰던 미주의 손이 탁, 멈췄다.

  “몰라? 저 옷, 유민이가 제일 좋아하던. 그거랑 똑같은, 어른 옷이야.”

  그제야 재희도 기억났다. 며칠을 계속 입어 더러운데도 그 옷 아니면 안 된다고 떼를 쓰던 유민이. 그럴 때마다, 미주는 달랬고 재희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야단쳤었다.

  “그러네, 정말 그거하고 똑같네.”

  재희가 얼버무리며 레이저포인터를 집어 들자, 스위치를 누르기도 전에 쮸이가 재희의 발밑으로 사뿐히 뛰어내렸다. 어지럽게 움직이는 빨간 점을 따라 쮸이의 고개와 앞발이 바빠졌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빛. 그래서 더 잡고 싶을 거였다. 호기심에 커진 눈만큼 권태로운 삶에 활력이 생긴 것 같았다.

  “얘 이거 정말 좋아한다니까. 혹시 이걸로 성격 버리진 않겠지?”

  미주가 양념 묻은 비닐장갑을 벗고 전자레인지에서 카레를 꺼내는 동안 재희는 밥솥에 남은 밥을 나눠 담았다. 김치를 중심으로 카레를 얹은 밥이 데칼코마니처럼 놓인 식탁에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짧은 다리로 아장아장 걷던 게 엊그제 같은데, 쮸이도 많이 컸다. 재희는 한배에서 난 새끼들과 같이 펫샵 쇼윈도에 있던 쮸이를 기억했다. 갓난아이를 받듯 잔뜩 긴장한 미주가 그중에서 딱 쮸이를 골라 안던 것도. 저희끼리 장난치느라 정신없던 다른 둘과 달리 쮸이는 미주와 가만히 눈을 맞췄었다. 미주의 고집으로 그냥 두었던 유민이의 물건들을 치운 날이었다. 유민이 이름의 나무 아래 아직 따뜻한 항아리를 묻은 게 그 반년쯤 전이었다.

  조금이라도 유민이의 흔적이 있는 건 버렸다. 그러고도 남은 것들을 아름다운가게에 주고 오던 길, 신호에 멈췄을 때 미주가 그랬다.

  “우리 고양이 한 마리 키울까?”

  “고양이? 개가 더 낫지 않아? 아무래도 정 주기는.”

  재희는 전방의 차들과 신호등에 시선을 남겨둔 채 무심히 대꾸했다.

  “그래서. 개는 손도 많이 가고, 고양이가 좋겠어. 정이 깊지 않아서.”

  미주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재희는, 두 블록 전쯤에 본 펫샵을 향해 차를 돌렸다. 5년 전이었다.

  “그 언니, 오래 아팠었대.”

  “누구? 7층 여자?”

  오래 연애하다가 서른 중반이 되어 결혼했다고 했다. 확신이 없었던 건 아닌데, 두 사람 다 매일 같은 집에서 같이 자고 일어나는 거에 크게 매력이 없었더란다. 싱글일 때도 둘 다 독립해 있었고, 그렇게 각자 지내면서 가까이 있는 게 살면서 아웅다웅하는 것보다 좋았다고 했다. 임신이 아니었으면 아마 계속 그렇게 연애만 하고 있었을 거라고. 서둘러 결혼하고 합쳤는데 산달 직전에 아이를 잃었다. 그때부터 4년 넘도록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았는데, 처음엔 마음이 아프다가 나중엔 몸이 그랬고, 더 지나니 아픈 데가 몸인지 마음인지, 둘 다 인지, 아니면 둘 다가 아닌지 분간할 수 없더라고.

  “그동안 아저씨가 애 많이 썼나 봐. 남편 얘기할 때 보면 애틋함이 좀 달라.”

  “뭘 얼마나 잘했길래? 부인이 아픈데, 모른 척할 남자가 어딨다고.”

  “여기 분양받아서 입주할 때 저기 플라타너스가 2층보다 작았대. 근데, 몇 년을 아픈데 하도 나을 것 같지 않아서, 저 나무가 3층만큼 될 때까지 안 나으면 그냥 죽어야지, 그 언니 표현이 그래, 정말 죽어야지 싶었대. 하루하루가 견딜 수 없는 형벌 같더래. 근데 어떻게 된 줄 알아?”

  성장이 빠른 플라타너스는 무럭무럭 자라서 결국은 5층까지 닿았지만, 한동안은 2층을 넘을 수 없었다. 관리사무소에서 해마다 그 높이 즈음에서 가지를 쳐냈기 때문이었다. 전망이 가리고 벌레가 꼬인다고 항의가 많았다. 밑동은 수령만큼 굵은데, 내뻗는 큰 가지가 뎅겅 잘린 나무는 영 볼썽사나웠다. 잔가지와 달리 굵은 가지 쳐낸 자리는 팔이라도 잘린 것처럼 기괴하고 안타까웠다. 결국 아파트 창을 침범하는 가지만 손보도록 전지 방식을 바꾸고서야 플라타너스는 계속 자랄 수 있었다.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잘려 나가던 나무가, 사람들의 죄책감 덕에 제 모습을 찾았다.

  7층 여자는 놀이터 벤치에 나와 있는 게 일이었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힘들었지만, 답답해서 집에만 있을 순 없었다. 그렇다고 멀리는 못 가고 적당히 타협한 게 거기였다. 거기서 매년 3층에 닿을만하면 잘려 나가는 나무를 보면서, 여자는 한편으로 절망했고 한편으로 안도했다. 나무도 저렇게 제 맘대로 되는 게 아닌데, 나도 내 맘대로는 할 수 없나 보다. 사는 게 그런 거구나. 원해도 할 수 없고,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 그런데 막상 닥치면 또 어떻게든 견디고 지나게 되는.

  “플라타너스가 사람 하나 살렸네.”

  “근데, 언니가 낫고 나니까 아저씨가 아프대. 우울증이 와서 말도 없고 화만 낸다네.”

  “그렇게 애쓰던 부인이 나으면 좋아야지, 왜 아파?”

  “글쎄, 모르지. 어쨌든 언니는 이제 자기가 남편한테 플라타너스가 되겠다더라.”

  “휴… 어쩌면 이미 그랬는지도 모르지. 그전부터 남편한텐, 여자가 플라타너스였던 건지도.”

  오랜만의 몸 쓰는 일과 먼 여정으로 썩 입맛이 돌지 않았지만, 재희와 미주는 남은 밥을 천천히 깨끗이 비웠다.

 

 

  “이번 추석에는 연휴도 길고 사람들이 많이들 포기해서 차가 덜 막혔어. 자기는, 시댁 갔었어?”

  “저희야 뭐, 멀지도 않고. 잠깐 갔다 와서 내내 집에 있었어요. 친정은 그 전에 갔다 왔고, 코로나 때문에 어딜 가기도 겁나서.”

  “그치. 코로나가 다 망쳤어. 안 그럼 놀러나 갔을 텐데.”

  “근데, 우리 이래도 돼요? 누가 보면 뭐랄 것 같은데.”

  “밖이고, 이렇게 떨어져 있는데 뭘.”

  “그래도, 이것까지 있어서.”

  미주와 여자는 놀이터를 향한 벤치 양 끝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미주가 커피 컵을 들어 보이자 여자는 더 끝으로 내다 앉았고 미주도 여자를 따라 거리를 넓혔다. 여자도 머그잔을 들었다. 미주는 마스크를 턱에 걸쳤고, 여자도 채 벗지는 못하고 한쪽만 귀에 걸었다. 형제로 보이는 아이 둘이 똑같은 마스크를 쓰고 그네를 타고 있었다.

  “자기는 수업 어떻게 해? 클라리넷은 마스크 안 벗고는 못 하잖아.”

  “그래서 애들만 해요. 원래도 시범을 자주 하는 건 아닌데, 요즘은 아예 안 해요. 손가락만 짚고 말로만. 둘 중 하나는 계속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죠.”

  “자기도 힘드네. 아니, 편해진 건가?”

  “안 좋죠, 아무래도. 레슨이 많이 줄었어요. 누가 오는 걸 다들 겁내서. 학생 있는 집은 더 그래요.”

  “그래도 날씨는 좋네. 사람들 근신하는 덕에 지구가 숨 좀 쉬겠어. 저 나무도.”

  “쟤들, 부러워요. 마스크도 필요 없고.”

  “자기, 플라타너스 우리말 이름이 뭔지 알아?”

  여자는 미주를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양버즘나무.”

  원래 버즘나무라는 게 있다고 했다. 플라타너스는 외국에서 들어온 버즘나무라서 양버즘나무였다. 수피(樹皮)의 얼룩덜룩한 무늬가 버짐 자국 같아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미주가 ‘버짐이 뭐냐?’ 했더니, 여자는 미주를 보며 표정만으로 ‘그걸 모른다고?’ 했지만 곧 설명해 주었다.

  “잘 못 먹어서 영양상태 나쁜 애들 입가에 터실터실 피던 거 있어. 나중에 알고 보니 무슨 감염증이라데. 그냥 잘 먹고 잘 잤으면 애초에 안 생기는. 그런 내용을 알고 보면 쟤한테 미안해. 사람들이 그런 이름을 저 나무에 붙인 거야. 잘 먹고 잘 자란 건강한 무늬에다가.”

  여자는 결혼 전에 구청 녹지과에 있었다. 도심 숲이나 공원의 나무와 가로수를 담당했다. 은행나무는 가을이면 냄새가 문제였고 플라타너스는 크고 잎도 넓어서 간판을 가리기 일쑤여서 민원이 많았다.

  “대왕참나무나 히말라야삼나무 같은 게 좋지. 이름 웅장하고, 무던하고.”

  “난 벚꽃이 좋던데. 다 벚나무로 심으면 안 되나?”

  “걔는 딱 그 꽃이 문제야. 꽃놀이 인파가 몰리는 동안 우린 맨날 비상이었어.”

  서울광장에서 대통령 영결식을 할 때였다. 덕수궁 쪽으로 늘어선 플라타너스에 줄을 메고 노란 풍선을 달았다. 풍선 밑으로 조문할 사람들 줄이 길게 이어졌다. 식이 끝나고 인파가 꾸역꾸역 서울역으로 밀려갈 때 여자도 거기 있었다.

  “슬펐나 봐요, 많이.”

  “그렇지 뭐. 정치 같은 건 모르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근데, 거기도 얘들이 있더라고. 풍선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거 보니 대견하더라.”

  눈앞의 나무에게 말 걸듯, 여자가 굵은 밑동부터 하늘로 뻗은 가지 끝까지를 눈으로 천천히 쓸었다.

  미주가 아직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고는 말을 이었다.

  “나는 저 무늬요, 버짐이라고 했던 거. 저거 애들 손바닥 같아요.”

  미주가 전에 살던 아파트에도 플라타너스가 있었다. 여름날, 끈끈한 땀이 범벅인데도 유민이는 계속 바깥만 고집했다. 유민이 모래놀이를 하고 나면 미주가 생수병을 기울여 손을 씻겼다. 젖은 손을 플라타너스에 찍어본 유민이는 물기가 증발하며 자국이 사라지는 게 재미있어서 아예 물병을 들고 다니며 손도장을 찍었다. 그러다 연초록 플라타너스 이파리를 주워 들고는 그랬다.

  “엄마, 이거 단풍이지?”

  “아냐, 그건 안 빨갛잖아. 단풍은 저기 있네.”

  미주는 놀이터 귀퉁이의 아가 손보다 작은 사철 단풍잎을 가리켰다.

  유민이 표정이 샐쭉해졌다.

  “이거 빨가면 완전 캐나단데. 색칠할까?”

  한참 난리였던 공룡이 시들해지고 나라 이름과 국기에 빠져있던 때였다. 유민이 다시 손에 물을 묻혀 손도장 세 개로 플라타너스 표면에 큰 단풍 모양을 만들었다. 원래 있던 플라타너스 무늬와 유민이 만든 손도장이 중첩되어 새로운 콜라주가 되었었다. 미주는 그날이 지독히 선명했고 또 그만큼 아득했다.

  미주의 핸드폰이 울렸다.

  “응, 언니!”

  전화기에서는 아무 말이 없는데, 멀리서 채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모 받았네. 이모 안녕, 해야지.

  “아휴, 이모 귀찮아. 나 너무 따라다녀.”

  지유야, 그럼 안 돼. 이모가 너 예뻐해서 그런 거잖아.

  미주가 익숙하게 아이를 달래는 말투로 바꿨다.

  “지유구나! 지유 안녕? 이모야! 지유 잘 있었어?”

  마지못한 대답이 넘어왔다.

  “응, 이모. 나 지유. 이모, 나 누나랑 포켓몬 보러 가야 해. 빠빠이!”

  지유가 전화를 제 엄마에게 넘기고 총총 달아나는 모습이 전화 너머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그제야 언니가 받았다.

  “미주야! 지유가 너 좋으면서, 괜히 또 저런다.”

  지유는 유민이를 많이 닮았다. 투정하고 삐치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재잘댔다. 만날 때마다 미주는 지유에게 붙어있었다. 지유를 보면 밝고 크게 웃었다. 재희는 애들 다 똑같지, 라고 무덤덤해하면서도 미주가 좋아 보이는 건 다행이라 여겼다. 지유와 처형이 고마웠고, 그만큼 미안했다. 지유는 네 살 터울 누나가 있었다. 조카 선물을 살 때마다 미주는, 누나 건 금방 고르면서 지유 건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지유와 자주 영상통화를 했고, 대부분은 미주가 먼저 걸었다. 통화가 끝나면 미주는 화장실에서 혼자 울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보고 싶을 때는 참을 수 없었다.

  “자기, 조카 많이 예뻐하는구나. 그냥 봐도 알겠어.”

  “다 그렇죠, 뭐.”

  “근데, 이런 거 물어도 되나? 뭐 나도 내 얘긴 다 했으니까. 자긴, 아이 안 가져? 자기 앤 더 예쁠 텐데.”

  “언니, 뜬금없겠지만요,”

  미주가 어렵게 지난번 얻어 간 옷 얘기를 했다. 옷이 집에 잘 개어져 있다고. 가져가서 한 번도 안 입어 봤다고. 전에 그거랑 똑같은 아이 옷이 있었다고.

  그 옷을 입던 아이 얘기는 못 했다. 다 버려놓고도, 비슷한 걸 보면 또 하나씩 모은다는 것과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계속 지유를 귀찮게 한다는 것도. 자기도 여자처럼 플라타너스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는 말도.

  자기 마음과 꼭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미주는 알았다. 미주 역시 한 번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해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사람들 앞에선 웃어야 했다. 적어도, 울어서는 안 됐다. 관계를 지속하려면 그래야 했다.

  재희에게도 전부를 얘기할 수는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어떤 경우라도, 서로 모든 걸 나눈다는 건 불가능했다. 다른 누구에게뿐 아니라 미주 자신에게도. 솔직한 건 뭘까? 곧이곧대로 다 보여주는 것? 감정은 수시로 변한다. 모양도, 색도, 냄새도, 크기도. 불이 되어 터졌다가 고름처럼 흘러내리는가 했는데 어떤 온기로도 녹일 수 없을 만큼 갑자기 얼어붙는 게 감정이다. 그걸, 어떻게 얘기하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재희는, 짐작은 할 거라고, 똑같을 순 없어도 자기와 아주 많이 비슷은 할 거라고 미주는 믿었다. 그래도 재희가 있어 지나올 수 있었으니까.

  여자가 플라타너스처럼 미주를 넌지시 바라봤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쟤는 얼마나 자라요? 그냥 계속 크나?”

  “그럴 리가. 나무도 어느 정도 되면 더 안 크고 그냥 늙어. 움직이는 것들보다야 비할 수 없이 오래 살지만, 결국 제 수명은 있지.”

  정해졌을까? 어떻게 해도 바뀌진 않는 걸까? 무엇은 얼토당토않게 짧고 또 무엇은 이해할 수 없이 길기만 한 그건, 숙명인 걸까? 거역할 수 없는?

  미주는 나이 들어 늙어 죽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아무리 해봐도 멀고 먼 훗날은 떠오르지 않았다. 기껏해야 살아온 시간의 두 배쯤이 전부였다. 뿌리가 깊어야 높이 자랄 수 있듯, 지나간 경험이 많아야 앞으로 올 시간을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철든 후만 따진다면 스무 해가 채 안 되는 시간을 살았을 뿐이니, 미주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도 딱 그만큼이었다. 그 안에, 죽음은 없었다. 애써 집중하면 환갑이 간당간당한 모습이 그려졌지만, 그 이후는 미지였다. 서서히 늙겠지. 그보다 더 지나서야 죽게 되겠지. 더 힘들고 괴롭다가. 해야 할 것도 더는 없고 하고 싶은 것 하나 없더라도, 거기서 훨씬 지나야. 때때로, 하지만 꾸준히 아프면서 다 지나고 나서야 그날이 오겠지.

  모르는 게 낫겠다. 안다고 달라질 게 없는 바에야. 주는 대로 아플 각오만 하면 될 테니.

  “쟤네는 아주 멀리 볼 수 있을 거예요. 여기 서서 오랫동안, 많은 걸 보고 느끼게 될 테니까.”

  그건, 축복일까, 형벌일까?

  벤치 한쪽 끝에서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미주를, 다른 쪽 끝에 앉은 여자가 오래 지켜보았다.

 

 

  멀리 어느 집 뜰의 목련이 졌다. 학교 담장 사이로 뻗어 나온 개나리도 절정이 지났다. 엄마 손을 잡은 1학년들이 초등학교 교문에서 아파트 단지까지 띄엄띄엄 이어졌다. 벌써 저희끼리만 하교하는 꼬맹이들도 있었다. 밖인데도 모두 마스크를 꼭꼭 챙겨 썼다. 겨우내 조용하던 놀이터도 제법 아이들로 소란스러웠다. 이른 점심을 먹은 미주는 아까부터 아파트 복도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나중에 기억을 더듬어 그림이라도 그리려는 듯, 시야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천천히 시선을 옮기면서.

  지유도 1학년이 되었다. 미주가 보낸 빨간 가방을 메고 좋아서 폴짝폴짝 뛰는 영상을 보내왔었다. 빈 가방도 지유를 따라 털렁털렁 춤을 췄다. 이모가 사준 가방 메고 학교 가서 공부 1등 할 거야! 그래, 지유야. 지유는 그럴 거야! 그렇게 말하곤 이내 후회했다. 웃음 1등, 꿈 1등, 행복 1등 하라고 할걸. 그게 공부 1등보다 훨씬 어렵다는걸, 지유는 언제쯤 알게 될까?

  지유를 떠올릴 때마다 미주는 습관처럼 핸드폰에 달린 피카츄를 손바닥 안에서 만지작거렸다. 얼마나 그랬던지 빨간 볼연지는 지워졌고 노란 몸통에는 손때가 꼈다. 몇 번이나 치약을 묻혀 닦아봐도 그대로였다. 이게 뭐라고, 이걸 내가 왜 이렇게 달고 있는지. 지유한테 있는 게 훨씬 예뻤을 텐데. 미주는 두 팔 벌려 큰 기지개를 켰다. 식곤증인가? 봄은 봄이네.

  재희는 해가 바뀌며 부서를 옮겼다. 새 업무에 적응하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퇴근은 늦었고, 집에 와서도 지쳐 잠들기 일쑤였다. 아침 알람도 못 듣는 날이 많아서 몇 번은 미주가 깨워야 했다.

  원래 아침잠이 많은 건 미주였다. 재희는 아침마다 미주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혼자 아침을 챙겨 먹었었다. 깔끔하게 잘라 갈무리한 빈 우유갑과 아직 헹굼 물기가 남은 씨리얼 그릇 앞에서 미주는 매번 조금 무력해졌었다.

  당신도 이제 전이랑은 다르네. 미주는 간단하게라도 매일 아침을 차렸다. 아침 식욕이 없는 미주는 재희 앞에 앉아만 있었다. 늦었다고 투덜대면서도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는 재희를 보면 알 수 없는 힘이 생겼다. 아, 내가 이 사람에게 뭐라도 하고 있구나. 부랴부랴 그릇을 비운 재희에게 미주는 비타민을 내밀었다. 먹으면 그래도 좀 나을 거야. 약사가 그랬다니까. 이거 한 알로? 사기 아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재희는 꼬박꼬박 받아먹었다.

새 업무는 외근이 잦았다. 모바일로 많은 일을 처리하는데 알맞은 새 핸드폰으로 바꿨다. 그 새 없던 기능이 많이 생겨 있었다. 부르면 꼭 사람처럼 답하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재희는 궁금했다. 듣고 싶은 사람 목소리가 된다면 어떨까? 좋을까?

  핸드폰의 파일도 옮기고 정리했다. 메신저로 오간 서류들, 업무용 사진들, 스트리밍 서비스 전에 내려받은 음원들, 근원이 어딘지도 모를 암호 같은 이름의 파일들. 카카오톡 영상들. 그리고 많은 타케우치 유코의 사진들.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 재희가 울었던 건, 처음엔 아이 때문이었다. 지유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모든 걸 내내 예사롭게 대하던 아이가 대견하고 안쓰러웠다.

  매사 허둥대는 아빠에 비하면 아이는 짧은 행복을 아무렇지 않은 일상으로 누렸다. 비가 그치면 엄마가 떠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엄마와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아이에겐 충분해 보였다. 더 큰 욕심도, 짧은 만남에 대한 억울함도 없이, 아이는 백지장 같은 마음으로 당장 맞이하는 모든 순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순수한 슬픔만 조금 가질 뿐 아무에게도 미안해하지 않는 아이가, 재희는 무엇보다 고맙고 예뻤다. 아이는 그래야 하니까. 죄책감은 어른의 몫이어야 하니까.

  몇 번을 다시 봤고, 그때마다 재희는 위로받았다. 그러다 아이 엄마인 타케우치 유코의 대사가 재희의 가슴에 고였다.

   넌 기다림과 축복 속에 이 세상에 왔단다. 행복을 가져다주었어. 엄마를 행복하게 해줬어. 멋진 어른이 되어야 해.

  그리고 애써 슬픔을 숨긴 미소로 마지막 말을 전했다.

  아빠 잘 보살펴 드려.

  다섯 번째인가 봤을 때, 전에는 대수롭지 않던 그 말에 심장 아래가 툭 터졌다. 거기 담겼던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며 그 언저리가 아렸다. 싫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쓰리고 아픈데도 마음은 후련하다고 생각한 순간, 재희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서너 살 아이처럼 눈물 콧물 범벅이었다.

  유민을 보내고도 재희는 슬퍼하지 못했다. 당장 어떻게 될 것만 같은 미주를 지켜야 했다. 사랑하는 이를 또 잃을 수는 없었다.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과 행동에서 진지함을 덜어냈다. 경박해 보이더라도 무겁지 않도록. 그러는 동안 혼자서 삼킨 감정은 재희의 마음 가장 낮은 곳에 천천히 가라앉았다. 쌓인 것은 흩어지지 않고 굳어, 갈비뼈 안쪽 깊숙한 데가 내내 묵직했었다.

  그 후로 재희는 타케우치 유코의 프로필과 기사를 스크랩했고 사진을 내려받았다. 그녀가 나온 영화와 드라마도 찾아봤다. 어떤 장면에서도 재희는 같은 유코를 봤다. 아빠 잘 보살펴 드려. 까탈스러운 여배우 역이라도, 수수한 시골 여인이라도, 유능한 형사라도, 차갑고 깐깐한 회사원이어도, 유코는 재희에게 그 대사를 하고 있었다.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허락된 시간에 최대한 충실한 사람. 슬프고 아파도 그대로 지켜보기만 할 뿐 결코 그 감정이 넘치지 않는 사람. 그래서 차분한 사람. 무엇보다 그런 식으로, 재희를 염려해 주는 사람.

  재희는 거기에 마음을 기댔다. 실제가 아니라는 건 재희도 알았다. 재희가 만들어 낸, 재희에게 필요한 유코일 뿐이었다. 그래도 재희는 유코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렇게 늘 주변에서 서성이는 슬픔을 상쇄할 수 있었다. 멀리 쫓아 잊어버릴 수도 없고, 휩쓸고 몰아쳐 폐허가 되도록 둘 수도 없는, 마음먹고 맞서려면 어디론가 흩어져버리고, 포기하고 돌아서면 그림자처럼 늘 곁에 있는, 슬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재희에게 유코는 아무도 모르는 작지만 유일한 등불이었다.

  미주는 마음먹고 옷장을 정리했다.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미루던 일이었다. 외투와 패딩, 스웨터와 두꺼운 맨투맨티셔츠. 직접 빨 것과 세탁소에 맡길 걸 나눴다. 지난겨울에도 입지 않았고 앞으로도 안 입을 것 같은 것들은 쇼핑백에 따로 모았다. 서랍장에서 가벼운 옷들을 꺼내 옷장을 봄으로 채웠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미주가 서랍장 맨 아래 칸에서 멈추었다. 7층 여자에게 얻어온 옷이 거기 있었다. 잘 개어진 그 옷은 누군가 이불을 덮고 누운 모양 같았다. 미주는 잠시 가만히 바라봤지만, 곧 그 옷도 쇼핑백에 넣었다.

  현관을 나서는 미주에게 쮸이가 호기심을 보이다가 곧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렸다. 꼬리를 세우고 사뿐사뿐 걷는 뒷모습이 빠이빠이, 하고 손이라도 흔드는 것 같았다.

  수거함에 넣기 전에 미주는 옷마다 한 번씩 쓸어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쇼핑백을 다 비운 미주는 손뼉 치듯 손을 탁탁 털고 비볐다. 마지막에 잠시 손바닥을 붙이고 있는 모양이 작은 기도 같기도 했다.

  미주가 막 돌아설 때, 엘리베이터에서 7층 여자가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미처 마스크도 쓰지 못한 얼굴이 울상이었다.

  “언니! 왜 그래요? 무슨 일 있,” “어, 어, 그이가, 그이가 쓰러졌대. 나 병원 가.”

  여자는 말을 하면서도 전화번호를 눌렀고, 곧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뛰었다.

  “언니, 마스크 있어요? 있어야 병원 갈 수 있는데!”

  미주의 말에 여자가 멈추고 주머니를 뒤졌다. 없는 것 같았다. 마침 가까이 있던 차에서 미주가 새 마스크를 꺼내 왔다.

  “태워 줘? 혼자 갈 수 있어요?”

  괜찮다는 건지, 혼자 못 가겠다는 건지, 여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한 손에 쇼핑백을 든 미주가 핸드폰 쥔 손으로 마스크를 건넸다. 여자의 다급한 손길에 지유의 피카츄가 걸려 툭, 떨어졌다. 두 사람 다 놀랐지만, 미주는 곧 괜찮다고 손짓했다. 여자는 울상이 되어 계속 통화하면서도 미주에게 고맙다는 눈인사를 잊지 않았다. 여자가 뒤돌아 사라진 뒤에야 미주는 떨어진 피카츄를 주웠다. 줄을 꿰었던 고리가 깨져서 다시 달 수는 없었다. 습관대로 몇 번 만져보다가 그냥, 주머니에 넣었다.

  퇴근하던 재희가 멀리서 그 모습을 보았다. 미주도 재희를 보았다.

  “무슨 일 있어? 왜 저리 급하대?”

  “아저씨가, 쓰러졌대. 나도 잘은 모르겠어.”

  재희도 여자가 사라진 쪽을 바라봤다.

  한참만에 미주가 말했다.

  “우리는 좀 걸어. 이제 정말 봄이네.”

  둘은 아파트 단지의 산책로로 향했다. 전부터 자주 걷던 길이었다. 재희는 익숙하게 반걸음쯤 뒤에서 미주와 보폭을 맞췄다. 의식하지 않으면 나란히 선 것 같지만, 함께 걸을 때 미주를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자리.

미주가 돌아보며 재희의 손을 잡았다.

  “나 알아. 당신, 일부러 그래왔던 거.”

  미주가 잡은 손을 끌어 재희의 반걸음을 지웠다.

  “이제 그러지 마.”

  순간 재희의 모든 것이 멈췄다. 보는 것, 듣는 것, 숨 쉬는 것과 생각까지, 옆에 있는 미주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아주 잠깐.

  미주가 잡은 손을 자신의 가슴께로 끌며 말했다.

  “그러니까 기대, 당신도, 여기.”

  재희의 안에서 문 하나가 열렸다. 그리고 움츠리고 있던 무언가가 날개를 펼쳐 새처럼 날았다. 재희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월간문학> 2025. 1.

'단편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자랑스런  (2) 2023.11.30
성혼선언  (0) 2023.10.19
안개  (0) 2023.07.24
계절 건너기  (0) 2023.07.19
눈삽  (0) 2023.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