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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창, 밖에서

by FeelSeoGood 2023. 7. 9.

 

눈을 뜰 수가 없다.

  아마도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그 거리를 짐작할 수가 없다. 바이올린이 분명하다. 그리 격정적이지 않으면서도 열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바이올린 선율이 팔분음표와 십육분음표를 넘나들며 들려오고 있다. 아니, 들려온다, 는 것보다는 마치 선율이 내 정신을 표적으로 하여 어느 곳으로부터 발사되어 날아오는 것 같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내가 숨어 있던 지하실의 문을 술래가 갑자기 열어젖혀졌을 때, 비밀의 어둠을 일거에 날리며 지하실의 모든 구석구석을 꼼꼼히 더듬던 숨바꼭질 시절의 그 선명한 빛처럼, 그것이 바이올린이라는 것을 감지함과 동시에, 내 온 정신으로 번져 빠르기도 짐작할 수 없는 속도로, 선율은 내 미망(迷妄)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 방울 떨어진 묽은 먹물이 화선지의 여백을 점령해 나가듯, 마치 먹구름 짙은 밤하늘에 터지는 조명탄의 섬광과 같이, 내 정신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내 속은 온통 그 소리의 포화상태이다.

  손짓해야 한다. 손짓하여 불러야 한다, 잡아야 한다. 이 소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 어느 곳으로부터 들리는 것인가? 어디란 말인가? 둘러볼 수도 없지만, 둘러보아도 방향조차 분간할 수 없는 빛의 산란 속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로 다가가지 못할 바에야 선율을 놓치지는 말자는 생각에 내 정신의 공동(空洞) 속 한 점, 오직 짐작으로 선율의 근원이라 생각할 뿐인 그 점을 향해 모든 촉각을 곤두세운다. 전혀 낯설지 않은 소리. 아주 오래전부터 내 안에서 지금과 똑같은 강도로 쉼 없이 공명하고 있었던 것 같은 소리.

  어느새 나는 그 선율의 다음을 미리 짐작하여 조금씩 흥얼거리기까지 한다. 내 흥얼거림에 바이올린 소리가 줄어들까 싶어 매우 조심하면서.

  나는 이 바이올린 소리에 조복(調伏)하여야 한다. 경외(敬畏)하여야 한다. 나는 결코 큰 소리를 내지 못한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안고

  푸른 하늘 푸른 산이 맞붙은 곳으로

  꿈길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잠이 깨고도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얼굴의 반쯤을 베개에 파묻고서 시체를 엎어놓은 듯 가지런히 엎드린 채로, 나는 잠들었던 것이다. 눈을 떴으나, 물리적으로는 분명히 망막을 간질이는 빛이 있었음에도 나는 영 초점을 맞추지 못한 채 또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아! 무엇이었나…….

  침대 건너편의 책상에는 꽤나 큰 창을 통해 아침 햇살이 타 넘고 있었고, 아직도 스탠드는 불을 밝히고서 책상 위에 놓인 어젯밤의 습작노트를 조명하고 있었다. 습작노트가 베개에 묻히지 않았던 오른 눈의 망막에 상을 맺자 어제도 몇 줄 끼적이긴 했으나 결국 아무것도 건져내지 못했던 기억이 살아났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고 침대 끝에 앉아 책상 위로 손을 뻗어 국어과 교사지도안 위에 놓인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찾았다. 없다. 라이터를 둔 곳을 기억해 내려 애쓰다가 성냥을 찾아 불을 붙였다. 라이터는 잃어버려도 그만이다, 불만 붙일 수 있다면.

  바이올린 선율에 겹쳐 피아노가 시작하고 그 피아노 소리가 막 격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 나는 잠이 깼다. 어디선가 날아와 내가 열어 놓았던 모든 감각령(感覺領)을 일시에 장악해 버린 선율이었다. 바이올린 선율, 그 소리에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나도 알 수 없다. 악몽을 꾼 것도 아닌데 난해하기만 하다. 나는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만 같다.

  몇 번, 그러한 꿈을 꾸기는 했다. 꿈속에서 들려오는 음악. 플루트나 바이올린, 아니면 아직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보이 소프라노의 성악으로 불리는 것 같은 멜로디. 하지만 그런 꿈들은 언제나 깨고 나면 그 멜로디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그 소리의 울림이 느껴지는 동안에는 그렇게 친숙할 수가 없었던 그 소리, 소리보다 앞서 흥얼거리기도 했던 그 음률을, 나는 기억할 수 없었다. 꿈을 자주 꾸지는 않으나 꾼 꿈은, 관심을 가지고 본 영화 장면을 되짚듯 선명히 기억해 내는 내게도, 꿈에서 들었던 노래는 언제나 혼몽일 뿐이었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하여 기억해 내려해도 알 수 없는 저쪽에 남은.

  그렇다고 해서 그런 꿈이 내 생활에서 어떤 징조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분명, 악몽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 꿈을 꾸고 나서도 언제나처럼 여덟 시 반에 출근하여 아이들의 아침 자습을 감독하고 하루 네 시간꼴의 수업을 진행하고 여섯 시면 퇴근하는, 별 변화 없는 생활이 이어졌으며, 뜻하지 않은 횡재는 물론 예기치 못했던 사고 같은 것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꿈을 꾼 날 하루는 종일을 떠다니는 듯한 기분으로 살았다는 것 정도. 계단을 올라도 내 다리로 오르는 것 같지 않았고 말 한마디를 해도 내가 하는 것 같지 않은 느낌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그 하루분의 내 생활을 이끌어 가는 나 아닌 다른 누군가, 어쩌면 다른 불가해한 힘이 존재하는 듯했다는 것뿐이었다.

오늘도 다만 그런 생활이 이어질 뿐이리라. 혼몽(昏懜). 어쩌면 내 생활인 것 같기도 하다.

  열일곱에서 열아홉까지의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내게 밥벌이 이상의 의미는 없다. 아이들은 국어를 배우지 않는다. 다만 국어과 시험을 치르는 기능을 익힐 뿐이고, 내가 하는 일도 사실은 그런 기능을 향상시키는 코치 일이다. 30년대의 모더니즘 경향이라는 말이 나오면, 김기림, 김광섭, 박남수를 줄줄이 꿰는 아이도 그들의 시를 읽지는 않는다. 다만 모더니즘과 그 이름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알고만 있으면 그만이다. 싫지만, 이 틀을 벗어날 수는 없다. 늘 생각뿐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런 것을 그런 식으로 가르치라는 교육을 받고 선생이라는 자격을 갖추었고, 무엇보다 그것으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나 스스로 받는 자괴감만 아니라면 사회적 관심도 지탄도 크지 않은 좋은 직업이다.

  하지만 그다지 즐기지 않는 업을 계속 이어간다는 것은 여간한 어려움이 아니다. 그건 괴로움이라기보다는 익숙하지 않음이라 하겠는데, 발령을 받은 지 얼추 오 년이 지나버린 지금에도 나는, 대학 사 년 동안 늘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다가 신입사원 면접에서야 말끔한 정장을 입고 어색한 표정을 짓는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저 엉거주춤인 자세 그대로, 결국 나는 생활의 모든 것에 명확한 금을 긋기 어려운, 규정할 수 없는 식의 삶을 살아오고 있었는데, 그것이 혼몽이었다.

  꿈꾸기를 게을리하진 않았다. 그렇게 단정(斷定)하고 싶다. ‘단정’과 ‘싶다’라는 표현은 이미 모순이겠지만, 어쨌든 나는 사회인이라는 꼬리표를 단지 겨우 오 년 하고 몇 개월 동안, 내내 쉬지 않고 간절히 이어 오던 꿈꾸기를 잊었다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잊었다’는 것뿐 아니라, ‘게을리한다’거나 그때 그 치열했던 꿈꾸기에 비해볼 때 ‘차이가 난다’라는 식의 겸손함도, 나는 가지고 싶지 않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 아직도 이 생활에 익숙하지 않음이 그 증거이고, 밤마다 국어과 교사지도안 위에 습작노트를 펴고서 한 줄의 시를, 한 마디의 시어를 고민하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나는 시를 버리지 못했다. 어디서든 한 번이라도 내 시를 인정해 주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교마다 있는 신문사나 교지출판부가 주관하는 그 흔한 공모에도 한 번 출품조차 못 했지만, 나는 시를 버릴 수가 없었다. 그건 말로 하지 못하는, 내가 고백하지 못하는, 다른 방법으로는 구사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언어였고, 내 탈출구였고, 내 꿈 꾸기의 가장 가능성 있는 구현 매체였다. 단지 쓴다는 것만으로, 내게 시는 의미가 있었다. 쓰지 않는다면 나는 숨 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꿈꾸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혼몽 속에서 흔들리고 있음을 나는 생각해 본다. 숨쉬기가 곤란한 것이다. 지난 두 달간 내가 쓴 글이라고는 단지 몇 줄의, 퇴고도 하지 않은 생각 짧은 글뿐이다.

 

  봄이면 눈물겨웠다.

  햇살이 눈 부셨고, 창밖에는

  새바람이 불고 있었다.

  깨끗한 손, 하얗게

  빛나고, 나는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깊이깊이 무언가를 담아내자고, 나는

  아직도 서성이며 고개를

  숙여 버렸다.

 

  시 쓰기가 힘들어질 것은, 벌써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생활이 혼몽 속으로 침잠해 가고 무엇에도 분명한 선을 긋지 못하면서, 나는 결코 어떤 것에도 치열한 생을 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 쓰기도 야위어 갔다. 이제는 다만 꿈꾸고 있다는 스스로의 세뇌를 위해 시 쓰기를 붙잡고 있는지도 몰랐다. 소득도 없는 매일 밤의 불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결코 수긍하고 싶지 않은 게으름과 타협과 포기를 인정해야 할 것만 같아서.

  바이올린 소리가 내 귀에, 아니 정확히는 내 잠재 공간 속에 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꿈꾸기가 간절해지던 몇 달 전부터였다.

  소리. 처음에는 그저, 한참 동안 저녁노을을 바라보다 감은 눈에 아련히 남은 잔상처럼 시작되는 소리. 초등학교도 가기 전 시골집 아랫목에서 낮잠을 자다가 깨어 잠결에 들었던, 마을 공동 스피커의 라디오. 그 노래에 실려 집집마다 천천히 피어오르던, 저녁 짓는 굴뚝의 자욱한 연기 같은 소리. 아련한 소리.

  분명 그런 소리가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는 확실히 그렇다고는 주장할 수가 없다. 나는 그 소리의 실체를 잠재태(潛在態)로 내게 남아 있던 어떤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그 소리의 존재를 알았던 순간을 언제라고 명확히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언제인지도 모르는 그 어느 순간에 그 소리는 내게로 왔고, 또 알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 내 속에서 나도 모르는 모양으로 웅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가끔 내 감각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을 것이나, 내가 미처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처음, 그 소리는……’이라는 식의 기억조차도 사실은 내가 알고 있었던 그 소리의 잠재태가 만들어 내는 또 다른, 다만 진동의 강도가 높아진 형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그 소리를 느낀 것으로 기억하는 몇 달 전부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소리는 명확해져 갔다. 처음에는 그저 ‘소리’로 느끼던 것이 점점 더 명확한 음률로 바뀌었고, 그것은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서 바이올린이거나 플루트, 아니면 보이 소프라노라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나와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것이 대체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선율이 내 꿈에 있는 동안은 언제나, 나는 그 또 하나의 잠재 공간 속에서 단지 헤매고만 있었다. 무언가를 찾아 끝없이 떠돌고 있기는 했으나 방향은 모른 채 조바심만 칠 뿐이었다. 나는 계속, 제대로 초점도 만들지 못하고서 심각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무슨 소용인지도 모른 채 그저 내가 간절히 그 선율을 원한다는 것 말고는 나 자신도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꿈속에선 언제나 그랬다, 그 선율에 이끌려 안달하는 것. 그뿐이었다.

  조심스레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바이올린 선율이 내 머릿속 공간을 가득 채우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는 전혀 시를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선율과 내 시 쓰기와의 상관관계는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 소리가 내 생활에 무엇이든 실제 변화를 가져온 것은 없었다는 말이다. 특별한 징조도 아니었고, 내가 꿈을 깨고 나서도 그 바이올린 선율에 집착하고 조바심쳤던 것도 아니었다. 그 선율은 잠이 깨고서 오선지 위에 그리려고 아무리 애써도 기억할 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단지 흥얼거리기 위해서라도 되살려 놓을 수 없었다. 언제나 아침이면 이미지만 남아 있을 뿐, 모든 것은 완벽하게 사라져버렸다.

  나는 꿈을 벗어나면 쉽게 그 바이올린을 잊었고, 다만 제대로 진도를 맞추어 나가지 못하는 시 쓰기 작업만이 내게 은근한 부담을 주었다. 그 바이올린 선율이 생활에 가져온 변화라면 그저 한 가지, 내가 나를 살고 있지 않은 듯한 느낌뿐이었는데, 그것 역시 그 꿈과 직접 관련이 있는지 증명할 수 없긴 하다. 다만 그 꿈을 꾸었던 날이면, 그 바이올린 소리에 휩싸였던 날이면, 어김없이 나는 하루 중 한때나마 의식하지 못하는 어느 한순간, 아!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고 각성하는 때가 있곤 했었다.

  특별히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 아닌데도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가는 길에 들어갈 문을 지나쳐 한참을 가고서야 문득 깨닫고서, 내가 왜 이리 가고 있지, 라고 생각을 하거나, 수업 중에 교과서를 읽으면서도, 내가 왜 이렇게 읽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시간에 읽어야 할 부분이 아닌 다른 부분을 읽었다든가, 특별히 잘못 읽은 것도 아니었지만 한참을 의식하지 못하는 채로 내 행동이 전개되다가 문득 다시 의식의 세계로 돌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멍한 나를 여기 이대로 남겨 둔 채 또 다른 내가 얼마의 시간 동안 잠시 어딘가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느낌.

  그렇지만 나는 그런 상황을 그다지 깊이 맘에 두진 않았다. 그저, 그럴 수도 있는 일 정도로 가볍게 치부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의 시 쓰기는 계속 정체하고 있었다. 시를 쓰지 못하면서, 하지만 시를 버리지 못하면서, 나는 나의 치열한 꿈꾸기를 회의하기 시작했고, 그 회의는 시 쓰기에 대한 조바심에 더욱 부채질했다. 지난날 나를 채근하던 동력, 꿈을 향한 탐구에 여전히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증거로서의 시 쓰기를 스스로 강요했던 것이다.

  어제도 별반 다르지 않은 하루였을 것이다. 아직 자습이 두 시간이나 남은 아이들에게 종례를 하며 판에 박힌 주의사항을 이야기하고서 여섯 시가 되기 전이거나, 막 여섯 시가 될 즈음에 학교를 나왔다. 교무실을 나오기 전 그날 자습 지도 담당 선생님과 의례적인 인사를 했을 것이고, 하교하는 일 학년 아이들로 빼곡히 채워진 교문 앞 도로를 지나 곧바로 버스를 탔고, 늘 지나던 노선을 따라 이어지는 버스 창밖의 모습을 응시하며 집으로 왔다. 플러그를 뽑아 둔 전기밥솥에서 아침에 해 놓은 밥을 퍼 담았을 것이고, 빈 밥솥은 개수대에 담갔을 것이다. 냉장고에서 몇 가지 밑반찬을 꺼내 저녁을 먹고 CD플레이어에 무소르그스키를 얹고는 볼륨을 없앤 채로의 텔레비전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책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었을 것이다. 책장 가득 꽂혀있는 책 중에서 어제저녁 그 순간에 어느 책에 호기심이 있었는지, 무엇을 읽었는지는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다. 바로 어제 일인데도. 그렇게 읽다가 어디까지 읽었는지 표시도, 기억도 하지 않은 채로 책을 다시 책꽂이에 꽂고는 책상 서랍에서 습작노트를 꺼내어 펼쳤을 것이다. 펜을 들기 전에 손을 씻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그렇게 또 한 시간쯤, 담배를 물고서 무언가를 끼적거리다가 답답해져서 냉동실에서, 얼지 않은 차가운 소주를 꺼냈을 것이다. 다른 날 같으면 반 병쯤으로 끝이 났을 테지만 어제는 빌려온 비디오를 봤기 때문에 좀 더 많이 마셨다. 다시 책상에 앉아 습작 노트에 무언가를 계속 끼적거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술이 약한 나는 언제인지 모르게 스탠드의 불도 끄지 못한 채로 잠이 들었을 것이고, 새벽 잠결에 관성처럼 침대를 찾아 누웠을 것이다.

  머리가 아픈 것도 아니고 그저 묵직한 느낌이 든다. 아직 출근을 서둘러야 할 만큼 늦은 시간은 아니다. 주량보다 많은 술을 마셨던 것에 비하면 늦잠을 자지도 않은 게 이상할 정도다. 역시 꿈 때문이었으리라. 여전히 혼몽 속에서 간절히 울려 퍼지던 바이올린 선율.

 

 

  창을 열어젖혔다. 초여름인데도 벌써 햇살이 모든 것을 점령하고 있다. 점점 더 그 햇살은 부지런을 떨 것이다. 한 개비 남은 담배를 꺼내어 담뱃갑을 구겨 재떨이에 넣으며 생각해 본다. 정말 시는 이제 끝인가….

  시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꿈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를 쓰려한다는 것은 여전히 꿈꾸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은 꿈꾸려 하는데도, 꿈을 포기한 것이 아닌데도 더는 꿈을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꿈꾸기에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의해 그 끝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건 견딜 수 없다.

  아침은, 먹을 기분이 아니어서 거르기로 한다. 출근하면 교무실 책상 위에 심부름하는 아이가 타 놓은 커피가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속을 좀 달랠 생각이다. 그때쯤이면 시답잖은 꿈꾸기보다는 쓰린 속이 더 큰 관심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곧, 늘 하던 대로의 예정된 일정 속에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이다.

노트를 접어 서랍 속에 넣고서 머리를 감는다.

  현관을 내려서 대문으로 나서는데, 내 방 창문 아래 무언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화단 따위로 창문 아래가 메워져 있고 그곳에 회양목이나 덩굴장미라도 심어 놓았다면 얼른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내가 사는 집의 마당은 애초에 집을 지을 때부터 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죄다 시멘트로 포장해 놓았기 때문에 얼핏 스쳐 가면서도 회색 시멘트 위에 떨어진 이물(異物)들은 쉽게 눈에 띈다.

  신발 뒷굽에나 묻었다가 떨어진 흙덩어리 같기도 하나, 흙이라고 하기에는 색이 너무 검은데다 조금씩 윤이 나기도 한다. 언뜻 말라붙은 개똥 같아 보이지만 집에는 개가 없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그것은 매미다. 손가락 한 마디를 조금 넘길 듯해 보이는 크지도 않은 매미, 탈피하고 남은 껍질도 아니고, 아직 마르지도 않은 한 마리 그대로의 매미 주검이다.

  그제야, 어젯밤 비디오를 볼 때 창 쪽에서 들렸던 소리가 떠오른다.

  이백이십 볼트나 그 이상의 전기 스파크가 일어날 때 들림 직한, 낮게 지지직 하며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소리. 그 소리는 전에 한 번, 꺾인 채로 방치된 전선에서 스파크가 일면서 불이 날 뻔했을 때 들었던 소리와 너무도 흡사했으므로 나는 긴장하여 전기기구들을 모조리 점검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 데도 문제는 없었고, 잠시 긴장했던 마음은 술기운에 누그러들고 곧 그 소리는 내 생각 속에서 사라졌었다.

  내가 만약 볼륨을 없앤 채 켜둔 텔레비전의 브라운관 잡음이나 내가 쓴 안경알에 비친 내 눈동자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예민한 사람이라면, 그 소리를 그렇게 무시해 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 밤에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아서 내 주위 환경에 그다지 무신경해지지만 않았던들 나는 끝까지 그 소리의 원인을 찾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다만 TV 화면을 통해 시시각각 변하며 나오는 빛에만 무의미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매미는 밤새 방충망을 온몸으로 두드려댔겠지. 그러다 지치기라도 하면, 방충망 위에 앉아서도, 쉬지 않고 날갯짓했겠지. 그리고 끊임없이 지직지직, 사사삭사삭, 그 노력의 흔적을 소리로 남기고 있었겠지. 방충망 아래 창틀 위에 흩어진 매미 날개 파편이 보인다.

  비디오를 볼 때 방의 불을 모두 끄고 있었으니 오직 텔레비전 화면에서 나오는 희끄무레한 빛만이 방을 채우고 있었으리라. 그런데도 매미는 그 빛을 향해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마치 그 빛 속에 절체절명의 무엇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해가 뜨는 아침에 날개가 다 부서진 채 죽었을 것이다.

  매미는 빛을 향한 그 길이 죽음으로 이어질 것을 알고 있었을까? 모르고서야 어떻게 그토록 열정적으로 빛을 향해 날아들 수 있었을까? 분명 날갯짓하여 돌진할 때마다 저를 가로막는 쇠망에 끝없이 절망했을 터인데. 수년을 기다려온 매미의 시간. 지상에서 날갯짓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을 얼마나 스스로 앞당겨 갔을까?

  나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 가방을 마당 한쪽에 놓고서 창문 아래 떨어져 있는 매미를 집으려 손을 뻗는다. 창틀 위에 흩어져 있던 부서진 날개 파편도 손바닥에 쓸어 모은다. 선 채로, 손 위의 매미를 한참 동안 들여다본다.

  단지 본능이었다고, 그 이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말면 그뿐이다. 빛을 향해 날아드는 데, 다른 의미가 없다고. 매미의 날갯짓은 의지나 목적 같은 것과는 상관없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치부해 버릴 수가 없다. 그것이 본능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단지 매미에게 주어진 환경일 뿐이고, 단지 매미에게 주어진 운명일 뿐이라 할지라도, 나 역시 매미와 같은 반복을 하고 있어서. 결국 나도 끝을 알면서도 계속해야 하는 숙명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몰라서.

  내 방 창문에서 퍼져 나가던 지난밤의 불빛이 매미에게는 멋진 꿈이었으리라. 닿을 듯 닿을 듯하면서도 결코 이를 수 없는 아름다운 꿈이었을 것이다. 매미는 그 꿈을 향해 날았고, 결국 그 날갯짓은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치명적일 것을 매미도 알고 있었을까? 그 끝을 정확히는 몰랐더라도, 그런 행동이 가져올 것이 무엇이 되었든, 순순히 받아들일 분명한 준비는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 그래서, 스스로는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날갯짓이 초래할 결과를 알면서도 매미는 빛을 향한 돌진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정작, 한 번이 날갯짓도 더 할 수 없어 땅에 떨어지는 그 순간에도 매미의 시신경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 대신 빛을 향해 날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각인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환희였을까?

  매미의 부서진 얇은 날개에 햇살이 반사되어 비친다. 한참을 들여다보는 내 눈에는, 부서진 날개로 움직임이 없는 매미가 웃고 있는 것 같다. 매미가 웃는다.

  나는 알고는 있는가? 매미도 알고 있었던 끝을, 나는 인지하고 있는가? 나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꿈꿀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 목적지를, 종착(終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혹여 부서진 날개 조각이라도 놓칠까 하여 두 손으로 꼭 감싸 쥐고 집 옆의 공터, 흙바닥에 매미를 내려놓는다. 시멘트 포장 위에 놓아둘 수는 없다. 언젠가는 결국 비바람에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리겠지만, 박제처럼 말라가는 모습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어떻게든 끝단에 이른 존재는, 이루었든 아니든, 어서 돌아가야 한다. 매미는 흙에서 돌아가리라.

  매미의 주검 위로 녀석의 날갯짓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리고 막, 돌아서는 내 머릿속에 다시 잠결의 선율이 깔린다.

  꿈에서 들었던 피아노 소리, 그 속에서 언제나 나는 방향도 잃고 목적도 없이 혼돈 속에 있었다. 미궁에 빠졌다면 방향을 몰라도 어디로든 움직여나 볼 텐데, 그 속에서는 온통 그 소리로 채워진 농밀한 공간의 무게만이 느껴질 뿐,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제자리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그 소리의 근원을 향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앞뒤나 동서남북 따위의 공간 감각은 없었었지만, 분명히 내 의지의 방향성은 존재하고 있었다. 오직 그 선율을 향해 나는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꿈을 깨나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삶은 언제나 발버둥이었고, 그렇게 버둥거릴 때마다 나는 굳건히 버티고 선 벽에 부딪혔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 틀을 벗어나려고 또다시 발버둥을 하곤 했다. 그리고 시는, 다 알면서도 그렇게 단단히 서 있는 벽을 향해 부닥쳐 보는 희망과 무기력의 배합이었다, 피할 수 없는.

  나도 날갯짓하고 있다. 언젠가는 내 날갯짓으로 내가 시드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피아노 선율은, 내 날갯짓 소리일지도 모른다.

 

  버스를 탄다.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으므로 버스는 생각보다 한산하다. 나를 알아본 학생이 제가 일어선 자리에 나를 앉힌다. 나는 그 아이의 어깨를 토닥여 다시 거기 앉힌다.

  차창 밖을 한참 바라본다. 익숙한 노선의 변함없는 풍경이 천천히 지나간다. 이제 막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저마다 바쁘다. 그저 그렇게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거기, 매미가 있다.

  매미는 부서졌던 날개를 온전히 갖추고 또 열심히 날아가고 있다. 저기, 내 시선이 닿는 곳. 아니, 차창을 열고 팔을 뻗기만 하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매미가 있다. 내 방 창문 아래 떨어져 있던 놈처럼 작은 매미가, 그 흔한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는 유별난 매미가 날아가고 있다, 웃음을 띠고.

  잘못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창밖 먼 데를 보고 있다가 아주 잠깐 가까이에 초점을 두었을 때, 언뜻 스쳐 간 것이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지만, 버스에 타고 있는 어느 한 사람도 그 신기한 매미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다. 아니,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게 아니라 애당초 그 매미를 본 사람이 없는 듯하다. 다시 창밖의 매미를 찾지만, 이미 매미는 거기 없다.

  버스가 섰다. 우르르 내리는 학생들의 혼잡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서서 버스를 내린다. 아직은 여전히 이른 시간이지만 따가운 햇볕은 끈적끈적한 땀방울을 만들어 내고 있다. 나는 버스를 내려 학교까지의 그다지 멀지 않은 길을 휘적휘적 걸었다. 멀리 학교 뒤편의 산이 내 망막 속을 푸르게만 간지럽힌다. 꿈을 꾸고 있는가?

  열심히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아이들 사이로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걸어가는 그녀가 보인다. 그녀는 십 미터쯤 앞서 걷고 있다. 급하지 않은 걸음이고 내가 그녀를 따라잡으려고 굳이 애를 쓰는 것도 아니었지만, 내 빠른 걸음으로도 그녀는 가까워지지 않고 여전히 나를 앞서 걷는다. 조금 더 걸음을 빨리해도 그녀는 똑같은 거리를 유지한다. 그녀가 특별히 내 걸음에 맞춰 빨리 걷는 것도 아닌데…….

  어찌 보면 그녀는 스스로 걷는 게 아니라 떠다니는 것처럼 정적(靜的)으로 움직인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단지 그녀는 언제나처럼 내게서 멀리 있을 뿐이다.

  여전히 나를 앞선 저쯤에서 그녀가 걸음을 멈춰 선다.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내는지 주춤, 한다. 그동안 그녀와 가까워진 나의 눈에 손수건을 그러쥔 그녀의 손이 보인다. 이른 아침이지만, 한여름의 하늘에서는 송곳처럼 날카로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고 그 아래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이마에는 이미 땀이 방울방울 맺히고 있다. 그녀의 뒤에 막 다가선 나의 눈에 파마기 있는 단발을 모아 쥐고서 땀을 닦는 그녀의 드러난 목에서 새하얀 빛이 선명히 부서진다.

  나는 세상의 온 하늘에 가득한 빛이 일순간에 내 망막 속으로 돌진해 들어옴을 느꼈다. 강렬한 조명등이 암실에 구겨져 있는 내 앞에 밝혀진 것 같다. 남극의 화이트아웃(white-out)이나, 영화 필름의 완전 노출. 멀리 푸른 하늘, 푸른 산이 온통 하얗게 변하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경계를 넘어간 듯하다.

  어디선가 아득한 곳으로부터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나는 한 마리의 또 다른 매미가 되어 날갯짓하고 있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딱 버티고 서서, 날갯짓하듯 서류 가방을 손에 든 채 천천히 두 팔을 벌려본다. 그리고 나는 까닭도 없이 입속으로 우물거린다.

  날자, 날아보자. 날아오르자…….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나는, 그 여름의 아침을 휘적휘적 걸어간다.

 

(1996)

* 본문에서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싯구를 차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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