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나를 어떻게 알고 이따위 걸 들이미는 거야! 생각을 좀 해 보라고. 아무리 식견이 없기로서니 그런 정도의 생각은 할 수 있어야지. 어찌…….”
변 사장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혀를 몇 번 차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사실 변 사장에게는 더없이 불쾌한 일이긴 했다. 기분 같아서는 사진을 던져 버려야 했지만, 그런 정도의 사람에게 쉽게 흥분하는 것은 결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는 일이 아니라는 판단 덕에 자제력이 살아났다. 실망의 표시인지 화를 참는 것인지 모를 깊은 숨을 한 번 내쉬고는, 탁자 위에 어지러이 널린 사진을 모아 건네주며 늘 그랬듯 혈통을 강조하는 것을, 변 사장은 잊지 않았다.
“왜, 거, 어디에다 내놓아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그런 혈통을 가진 개를 구해 달라고. 그래야 내 체면에 어울리지 않겠어? 나, 봉금(奉金) 변 씨 29대손에 걸맞은 그런 개를 구해오란 말이야.”
개 중개인이 사진을 가지고 나간 뒤, 변 사장은 탁자 위 담배 상자에서 금색 줄이 잘 그어진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고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그는 담배 필터를 잘근잘근 씹으며 남은 화를 삭였다.
책상에는 자개로 이름이 각인된 사장 명패가 있고 메모지가 딸린 커다란 인주 통이 뚜껑도 없이 놓여 있었다. 벌건 인주는 나날이 번창하는 그의 사업을 증명이라도 하듯 함부로 얼굴을 비비고 지나간 도장 자국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그는 곳곳에 손을 써둔 대가로 수집되는 신뢰할 만한 개발정보를 이용해 일정 규모 이상의 부동산만을 은밀히 알선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거간만 했지만, 상당한 재력을 확보한 뒤부터는 자신도 당당한 투자자가 되어 소개는 줄이고 기획에만 집중해가고 있었다. 실거래가 위반이니 버블이니 해도 그 정도에 위축되거나 곤란을 겪을 사업이 아니었다. 부동산실명제니, 토지공개념이니 한 게 벌써 몇십 년인데, 그 후에도 땅은 한 번도 돈을 벌어주지 못한 때가 없었다. 유력한 개발 계획을 사전에 확보할 수 있으니 양은 냄비처럼 끓어올랐다 식기를 반복하는 주식 같은 거에는 댈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여윳돈 땅에 묻었다 빼내기를 반복해서 안전하게 경제적 기득권을 키우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그러니 그의 사업은 약간의 부침은 있겠지만, 망할 일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벌써 오십하고도 절반 고개를 넘은 변 사장은 요즈음 들어 부쩍 적적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말로 큰소리 뻥뻥 치며 스스로를 달래왔건만, 돈 버는 것 빼면 뾰족이 해 놓은 게 없는 그는 간헐적으로 밀려드는 외로움에 인생을 헛살았나 하는 염려까지 들곤 했다. 고객이라고 할, 소위 있는 사람들 비위 맞추는 것도 점점 탐탁지 않았다. 그동안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나며 확실히 알게 된 건, 누구나 가진 만큼 제멋대로라는 것이다. 겉으로야 노블레스 오블리주 어쩌고 하면서 격식을 차리지만, 겉치장 한 꺼풀만 까놓고 보면 변덕스럽고 까탈스러운 건 가진 것에 비례했다. 그렇지만 서로가 그렇게 고상한 가면을 걷어내고 솔직한 욕심을 드러낸 뒤에야 거래가 급진전된다는 것도 불변의 법칙이었다. 그러니 돈 나올 모퉁이가 죽을 모퉁이라던 애 엄마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살아 있었어도 벌어놓은 돈 원 없이 쓰는 건 엄두도 못 낼 여자였다. 제 몸은 시름시름 곯아 들어가는데도 진찰비 아까워 병원에도 가지 않다가 변변한 약 한 번 못 써보고 병명도 모른 채 가버린 사람이었다. 고아로 크면서 겨우겨우 마련한 네 마지기 논농사를 짓던 때였다. 몇 해만 더 버텼으면 좋은 날은 봤을 텐데. 개발 광풍을 타고 그 논이 열 몇 배 가격에 팔았고 그걸 종잣돈으로 지금까지 왔다. 안 해본 일 없이, 비굴함도 참고 자존심도 버리고서, 남의 가슴에 못도 수없이 박아가며, 말 그대로 개같이 돈을 벌었다. 조금만 늦게 아팠으면 살렸을 것이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나?
입학도 하기 전에 엄마 잃은 게 불쌍해서 마누라한테 못 해준 몫까지 아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부모 둘 다 있어도 모자란다고만 느끼는 게 자식들 마음인 줄은 알았지만, 아들도 그럴 줄은 몰랐다. 대학생이 되고부터 그의 통제권을 벗어나기 시작한 아들은 이제는 겉으로도 그에게 의지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겪은 부모 없는 설움 모르게 하려고 했더니, 부모 있는 고마움마저 모르는 것 같았다. 딱히 하는 일도 없이 매일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는지 사나흘에야 한 번 얼굴을 비치길래 엊그제는 맘먹고 한 번 불러다 놓고 야단을 쳤다가 할 말을 잃었다.
“아빠는 나한테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아요? 혼자 20년 아들 키운 게 그리도 유세에요? 엄마 그렇게 죽인 게 누군데? 그리고, 나한테 아빠가 해준 게 뭔데요? 내가 받은 건 돈밖에 없어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끔찍이 여기는, 그 잘난 돈! 허, 나도 앞으로 아빠한테 돈은 부족하지 않게 줄게요. 아빠 닮았으면, 나도 땅 좀 주물러서 돈이야 못 벌까? 보고 배운 게 그것밖에 없는데, 어디 가서 잘난 내 아들 누구라고 유세할 만큼은 못 되더라도, 떳떳하진 않은 만큼 망해 먹진 않겠죠. 그러니까, 지금은 제발 잔소리 좀 그만해요. 나도 지겨워요. 그냥 기다렸다가, 해주는 대로만 받아 가라고요. 내가 그랬던 것처럼.”
기가 막혔다. 어떻게 키운 아들이었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당장은 무언가 새로 의지할 데가 필요했다. 주위에서는 전부터 재혼을 권했다. 돈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맞는 사람 널렸다고. 하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몇몇만 부른다 해도 번잡한 행사를 예의상으로나마 치러야 할 것이고 그들이 결국 다 늙어 주책이라는 입방아도 찧을 것이었다. 다 차치하더라도 정작 재혼 생각을 결정적으로 포기하도록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재산이었다. 돈이 있으니 쉽다고 하지만, 그는 바로 그 돈 때문에 재혼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번 돈인데, 생판 남인 사람과 공유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아무리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외로움을 달랠 수 있다고 해도 변 사장에게는 너무도 큰 희생이었다.
결국 그나마 생각해 낸 게 개를 하나 들이는 것이었다. 그가 오전이면 늘 들리는 증권회사에서 우연히 본 게 있었다.
“아, 이 녀석이 아들보다 낫다니까. 술이라도 한잔하고 들어갈라치면, 아들 녀석은 왔나보다 하고 마는데 얘는 반가워, 반가워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면서 내게 매달린다고. 사람이 그렇게 나를 반길 수 있냐 말이야. 내가 만져주기라도 하면, 얘는 내 맘을 다 아는 듯 내 기분을 맞춘다고. 나는 온전히 당신 것이요 하는, 그 선한 눈빛! 마누라보다도 낫지, 암. 잔소리를 하나, 바가지를 긁나!”
아예 개가 앉을 방석까지 가지고 다니며 품에서 내려놓을 생각조차 하지 않던 그 사람의 행복한 표정을, 변 사장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좋은 개 한 마리를 알아보라고 시켰던 일이었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토록 떵떵거리며 사는 그가 아니던가? 더구나 그는 봉금 변 씨 29대손이다.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데! 족보 값은 해야 할 것 아닌가? 변 사장에게 어느 골목에서나 꼬질꼬질한 때를 잔뜩 묻히고서 돌아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개를 키우라고 들이밀다니! 아무리 적적한 마음을 달래려는 거지만 그래도 수준에 맞는 놈이어야지. 품위가 철철 넘쳐서 키우는 개만 보고도 주인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는 못해도 내세울 혈통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은 번지르르했다.
“사장님, 이놈이 보기에는 이래도 주인 따르기로는 어떤 개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충실한 놈입니다. 전에 키우던 사람이 이민을 가게 돼서 우리 가게에 맡기면서 전해준 말로는 이름이 ‘스툴리지(Stoolage)’라는데, 이런 이름 들어 보셨어요? ‘메리’나 ‘쫑’ 하고는 차원이 다르지요. 뭔 뜻인지는 몰라도 흔치 않은 영어 이름인 걸로 봐서 상당히 격조 있어 보이고, 그런 이름에 맞춰 키운 놈이라면 당연히 상당한 위엄이나 기품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자알 생기지 않았습니까? 드넓은 사장님 댁을 다 지킬 만큼 큰 놈은 아닙니다만, 사장님 그러셨잖아요? 집 지킬 개 찾는 거 아니라고. 그럼 이런 놈이 최곱니다. 키우시는 데 신경 쓸 거 별로 없고요. 아, 큰 놈들은 먹이 주고 똥 치우는 것만 해도 일이 얼만데요.”
허, 격조는 개뿔! 잘 나가는 사업에 초를 치려는 건가? ‘수틀리지’가 뭐냔 말이다. 이름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생김이 고양이는 고사하고 쥐를 만나도 겁먹고 도망갈 것처럼 조막만 한 게 비썩 마르기까지 해서, 눈은 또 왜 그리 큰지! 거기에다 결정적으로 떡하니 걸어둘 족보조차 없는 개였다. 그래, 아무리 보기에 좀 그래도 혈통 하나 좋다는 확실한 증명만 있다면야 당장이라도 변 사장은 갯값을 치렀을 것이다. 이름이 듣기에 거북하면 어떠냐? 혈통만 좋다면!
깊이 들이마셨던 연기를 길게 밖으로 뿜어내고는 재떨이에 꽁초를 비비면서 변 사장은 일어섰다. 그리고는 사무실 현관 윗벽, 커다란 액자에 넣어 걸어 둔 족보의 한 페이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던 변 사장은 씨익 웃음을 머금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 한 장의 족보는 한껏 찌푸린 기분도 말끔히 풀어줄 만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여간 돈이 든 결과물이 아니었다. 개명이야 하는 사람 많이 있지만 다른 성씨로 호적을 바꾸는 건 간단치가 않은 일이다. 하기야, 일반적으로는 그럴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는 고아였다. 어차피 친부모가 누구인지 몰라서 보육원장의 성을 따랐던 것이지 않나? 늦게서야 친족을 찾았다는 게 아예 없을 일도 아니었다. 괜찮은 족보를 찾고, 그의 적을 만들어 넣을 상황이 되는 가계를 찾아, 필요한 증거 조작에 적당히 기름칠만 하면 되었다. 마침 그런 걸 은밀히 도맡아 해 줄 업체도 있었다. 돈은 꽤 들었지만, 그들은 원적을 복구하는, 아니 정확히는 호적을 만드는 소송부터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분쟁 가능성까지 깔끔하게 막을 합법, 불법적 처리까지 완벽히 마무리했었다. 나중에 죽은 뒤에도 유산 내놓으라고 엉겨 붙는 친족 같은 건 있어서는 안 됐다.
이제 근본 없는 놈이라고 변 사장을 깔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엄연히 그는 봉금 변 씨 29대손임을 증명할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변 사장은 수십, 수백 억대의 거래를 하는데도 사람들에게서 은근히 그를 깔아뭉개는 인상을 느꼈었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화가 스멀스멀 일어났다. 하지만, 이제 뭐 어떠냐? 그는 엄연히, 누가 뭐래도, 시조는 고려 때로 거슬러 올라가고 500년 사직의 막바지에는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문중의, 종손은 아니더라도 잘 사는 일가쯤은 되어 있었다.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가훈 갖기, 뿌리 찾기 같은 일과성 운동이 없었다면 변 사장은 족보를 애써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갓 중학생이 된 아들이 ‘아버지 우리 시조(始祖)가 누구예요?’ 하고 물었을 때, 사업관계에서 느꼈던 비굴함이 더 큰 열등감이 되어 그에게 다시 확 다가들지 않았다면.
그래 족보, 족보만 있으면 그런 것 다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까짓거, 만들면 그만이다. 어차피 고아로 자란 목숨, 내가 어느 집안 어느 씨인지 알 수도 없는데 누구네 자손인들 어떠냐? 떵떵거리는 문중 족보를 내 걸로 만들면 그만 아니냐? 오직 한 가지, 그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몰래 간직해 온 명주 조각보가 마음에 걸렸지만, 이제 와 그게 무슨 의미냐 싶었다.
크지도 않은 붉은색 명주 천 조각이었다. 보자기라기에는 작고 손수건 보다는 큰 그 조각보의 용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으로 정성 들인 바느질로 곱게 이어 붙인 조각보 한쪽 귀퉁이에는 흰 실로 ‘참을 인(忍)’ 자가 수 놓여 있었다. 겨우 걸음마를 뗐을 나이의 그가 보육원 앞에서 발견되었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으로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에게서 전해진, 그로서는 유일한 유산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위안받거나 어딘 가에서 부모님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란 상상을 한 적은 없었다. 그저 그가 소유할 수 있었던 최초의 물건일 뿐이었다. 그런 것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중년도 막바지를 지나고 있는 지금에 와서 그 조각보는, 역설적으로 변 사장에게 고아라는 낙인을 남기는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일 뿐이었다.
그래서 변 사장은 거금을 주고서 족보를 한 권 만들어 왔고, 아들은 그 길로 바로 그걸 학교에서 전시했다. 그렇게 당당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바라보던 아들을, 변 사장은 그 전이나 그 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때 장롱 깊은 곳에 접어 넣어둔 그 조각보에 대해서 그는, 그 이후로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에 돈이 있는데도 족보를 꼭 사야 할까 많이 망설였지만, 일단 구해 온 족보를 거실 가운데 책장에 눈에 잘 띄게 얹어 두고 보니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와 아들의 이름이 적힌 쪽을 따로 필사하여 빛깔 좋은 비단으로 표구하고 고풍스러운 액자에 넣어 사무실 벽에도 떡하니 걸어 두었다. 그런 뒤로는 한 번을 웃어도 좀 더 품위 있게 웃었고, 한마디를 해도 그 전 하던 대로 쌍소리가 섞이지 않을까 주의를 기울였다. 사람들의 시선도 전과 달리 자기를 우러러보는 것 같았다. 그저 기분이고 생각뿐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변 사장은 한껏 고양되었다.
그는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 누구라도 붙잡고 액자 속 족보 이야기를 했고, 족보를 사 올 때 들었던 15대조 어른의 임난(壬亂) 의병대장 이야기, 10대조 어른의 병판(兵判) 시절 이야기, 영의정을 지낸 8대조 어른의 이야기를 잘도 외워 읊어 댔다. 그러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표정에 훌륭한 조상들에 대한 경탄이 역력해졌고, 가계사(家系史)에 정성을 다하는, 요즘은 보기 드문 자세에 대한 존경의 기운 또한 어리곤 했다. 그러면 변 사장은 한껏 고조되는 자신의 목소리에 은근히 무게를 실어 다잡으며 행여나 경박한 인상을 주지 않을까 염려하는 여유까지 챙겼다.
예전, 낡은 흑백 텔레비전, 벌레 자국 같이 지저분한 화면으로 본 양반전은 다 시대가 달라서 그랬던 거다. 가난한 양반이 관아에 진 빚을 대신 갚는 조건으로 양반을 사 와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고생만 한다는 그 이야기. 뭐 재미있는 얘기라고, 때마다 새로 각색해서 방송되었고, 그럴 때마다 변 사장은 심기가 불편했다. 그가 보기에, 그건 재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돈 있는 상놈 앞에 양반이 머리를 조아리는 식으로 시작은 잘해놓고, 왜 결국 양반은 양반이고 상놈은 상놈인 걸로 마무리를 짓냐는 말이다. 하긴, 그런 이야기도 족보를 만들어 오고부터는 그와는 더이상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양반, 상놈 따지겠느냐고, 오히려 그런 것 따지면 바보 되는 세상이라고, 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하겠지만 변 사장에게 있어서는 그게 그렇게 쉽기만 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하는 일이 여러 군데 뻗어놓은 정보력에 기대는 것이라서 소위 말하는 인맥, 즉 사람 연줄이 중요했다. 그런데 그런 연줄을 타려면 지나가는 말로라도 신상과 배경을 드러내야 했고, 그때마다 얼버무리긴 했지만, 일부러 숨기며 스스로 낯 뜨거워야 했던 ‘고아’라는 출신은 그에게는 상놈이라는 낙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사업에 매우 중요한, 잘 나가는 높으신 분들 앞에서는 그 핸디캡이 더 도드라졌다.
하지만 이제는 되었다. 누구도 그의 문중을 의심할 수 없다. 그는 고려 때로 그 기원이 올라가는 엄청나게 뼈대 있는 집안의 후손이다. 어쩌다 본(本)이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긴장하기도 했지만, 그건 초짜 때나 있었던 일이다. 그가 구해온 봉금 변 씨는 다행히도 지금은 희성(稀姓)이라서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고, 혹시나 그렇게 되더라도 그의 출신을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변 사장은 완벽히 준비가 되어있었다.
최근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은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의 거간으로 부동산을 거래했던 사람에게 얼마 전 소개받은 이 사장이, 변 사장이 늘 반복하는 조상님들 연대기를 듣고는 양해를 구하고 액자 아래까지 가서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던 일이다. 몇백 번은 우려먹었던 이야기를 열심히 떠들면서 한껏 거드름을 피우던 그는 순간 뜨끔했으나, 그런 것에 졸아들 그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친김에 할아버지는 일제 때 무장 항일운동을 이끌던 분이시고, 아버지 역시 그런 할아버지를 따라다니시느라 기반 없이 자신을 키웠던 터라 이만큼 자수성가하는데 반평생 다 가버렸노라는 신세 한탄 조의 자랑을 덧붙였다. 그러자 이 사장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아, 네….’ 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머니에서 안경 수건을 꺼내 안경알을 문질러 닦더니 또 한 번 액자를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별일이야 있겠나! 반짝반짝 잘 닦인, 족보가 든 액자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며 변 사장은 생각했다. 값이 오를 부동산이 어느 것인지 냄새나 맡고 다니는 이 바닥 사람치고, 자기 족보 제대로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 설령 자기네 족보를 잘 안다 해도, 변 씨도 아닌 이 씨가, 족보전문가도 아니고 거기 옮겨다 놓은 봉금 변 씨 족보 한 페이지만 보고 의심스러운 것을 알기는 무얼 알겠느냔 말이다. 달리 생각할 필요 없었다.
그나저나 그 중개인이란 녀석 정말 제대로 된 개를 구해 오기는 할 것인지, 지금 그에게 당면한 가장 신경 쓰이는 건 그것이었다. 내일까지라고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해온 모양을 봐서는 마냥 믿고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하루만 더 기다려 보자고 변 사장은 생각한다. 그가 족보 있는 개를 구한다는, 그것도 무척 혈안이라는 소문이 나지 않도록 개 중개인에게 충분한 다짐을 받아 놓았기 때문이었다. 고작 개 하나 들이면서 굳이 족보를 따진다는 것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 큰 문제는 아니라 해도 애써 숨기는 자신의 치부와 엮인 구설로 이어질까 염려되었다. 어쨌든 다른 중개인을 구할 때 구하더라도, 일단은 기다려 봐야 했다.
“아, 사장님, 사장님이 원하시던 딱 그런 개를 구했습니다. 오늘 아침에야 저희 가게에 연락이 온 놈인데요, 다른 건 일단 다 접어 두더라도 족보 하나는 빵빵합니다요. 한국에서 발행한 것도 아니고, 영국 왕실에서 발행한, 왕실 인장이 찍혀 있는 국제 족보가 딸린 놈입니다. 이건 국내에서 아는 사람이 얼마 없어서 그렇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그런 개들과는 혈통이 다른 겁니다. 말하면 개로 치자면 왕족이다, 그거죠. 그뿐 아닙니다. 튼튼하기도 해서 이 녀석이 집을 지키면 어떤 도둑놈도 얼씬거리지 못할 겁니다. 사실, 사장님 그 많은 재산이랑 그 넓은 집 정도면 이런 놈 정도는 두셔야 든든하시죠. 그리고 주인 따르기도 유별나서요, 웬만한 사람 저리 가랄 만큼 정이 가실 겁니다.”
다음 날, 미덥지 않은 표정으로 맞이하는 변 사장의 코밑에 새로 구한 개의 사진과 족보 사본을 디밀어 놓고 개 중개인은 칭찬으로 입이 말랐다.
“여기, 이 족보 사본을 보십시오. 제가 물론 원본을 가져올 수도 있었습니다만 그 중요한 걸 함부로 할 수 없어서 원본은 잘 보관해 두고 사본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만큼 귀한 개란 거죠, 이 개가. 혈통이 ‘덩힐(Dunghill)’이라고, 요기, 요 족보에 정확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디이, 유우, 에엔, 지이, 에이취, 아아이….”
중개인은 견종 명을 알파벳 하나씩 더듬거리며 읽어 주면서 족보와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변 사장의 안색을 살폈다. 공손함을 과장하기 위해 움츠린 어깨와 굽신거리는 허리는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았다. 목소리에 조심스러움을 더욱 덧칠하여 개의 혈통을 부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견종에 대해서는 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는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만 흔치가 않아요. 이거 한 마리 구하려고 눈에 불을 켠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아직 국내에 들여왔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용케도 찾아냈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왕실이 공인한 혈통은 정말로 운이 좋으신 겁니다.”
사진으로 봐도 떡 벌어진 체구에 짧은 털, 쫑긋한 귀를 가져 우직하게도 사납게도 보이는 개였다. 그만하면 봉금 변 씨 19대손에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겠지만 가격이, 여태껏 보여준 개들의 스무 배도 넘었다. 얼토당토않다 싶기도 했지만 그런 거야 뭐 따지고 보면 다 상관없는 일이다. 영국 왕실의 인장이 찍힌 족보가 있다지 않는가? 명품의 가치는 가격으로도 드러나는 법이다!
“그 왕실 인장이 있다는 족보는 확실한 거지? 혈통 하나는 어디다 내놔도 빠지면 안 된단 말이야. 그래? 그렇다면야, 이만하면 되겠어. 수고했어. 개는 내일 당장 집으로 데리고 오도록 해. 그때 돈을 주지. 아, 당연하지만, 족보도 잊지 말고!”
변 사장의 흡족한 모습에 중개인은 코를 바닥에 찧을 듯 깍듯이 인사를 했다.
“절대로 사장님의 명성에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예.”
다음날, 변 사장은 아침부터 만면에 희색이 가득했다. 그날 족보 번듯한 유명한 개가 집에 새로 들어오는 날이라는 것을 알고나 있는 듯 웬일로 아들도 전날에는 일찍 집에 들어왔다. 그에게는 아들의 그런 귀가도 우연인 것 같지 않았다. 모두가 그의 집안에 좋은 일이 있으려 해서 그렇게 맞아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역시 그 ‘덩힐’이란 놈이 복을 안고 들어오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름도 저번에 소개했던 ‘수틀리지’ 보다는 얼마나 멋있는가? 어딘가 모르게 왕실의 기품이 배어 있는 것 같아 변 사장은 괜히 책장 위에 고이 모셔져 있는 족보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아들은 평소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사장의 만족스러운 웃음이 불만이었다. 대체 그깟 개 한 마리가 뭐 그리 중요한 것이라고, 저렇게까지 설레는가 말이다. 정작 아들은 모처럼 만에 일찍 귀가한 전날,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그 ‘덩힐’인지 뭔지 하는 개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변 사장이 이상하게만 보였다. 자신을 반겨주기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차라리 늘 그런대로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차며 야단을 치는 게 낫지, 며칠 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아들에게 한다는 말이 고작 그까짓 개에 대한 것이어야 하냔 말이다.
초인종이 울렸다. 느릿느릿 인터폰 쪽으로 가는 아들을 앞질러 변 사장이 먼저 누구인지 확인도 없이 호들갑스럽게 문을 열었다. 드디어 왔다. 그 대단한 명견이 왔다.
명견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맞이하기 위해 마당을 향해 난 커다란 창문으로 뛰는 듯 걸어간 변 사장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스치고 지났다. 대문을 들어서는 사람은 기다리던 개 중개인이 아니라 엊그제 만났던 이 사장이었다. 저 사람이 여기 웬일이란 말인가? 소개받아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그 사람의 성뿐이었고, 있는 돈 좀 묻어 둘 땅이 없을까 찾고 있는 사람일 거라는 나름의 막연한 추측이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미리 약속을 한 바도 없는 사람이 아닌가? 변 사장의 머릿속에 사무실에 걸어둔 족보 액자를 꼼꼼히 들여다보던, 그리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던 이 사장의 모습이 찜찜하게 스치고 지났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가고 두 사람이 거실에 마주 앉은 후에도 변 사장은 이 사장보다는 곧 오기로 되어있는 명견에 더 생각이 쏠려 있었다. 그런 변 사장에게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뽑아 건네주며 이 사장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는 실은 변호사입니다. 그리고 지난번에도 거래 목적이 아닌 다른 이유로 변 사장님에 대해 조금 알고 싶어서 찾아뵀던 것입니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혹시, 지난번에 사무실에서 보았던 족보 원본을 제가 지금 볼 수는 없을까요? 뭐, 별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아들을 잃어버린 분의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찾는 사람이 변 사장님의 나이나 외모와 비슷해서요, 아, 실례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꼭 그 사람을 찾아야 할 이유가 있어서 그럽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부탁해서 사장님을 뵈었습니다. 부디 제 부탁을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묵직한 물체가 뒤통수를 정확히 때리고 지나간 것 같았다. 변 사장은 정신이 번쩍 들어, 말을 끝내고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 사장, 아니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지 못했다. 자신이 그토록 떠벌려 왔던 족보에 대한 비밀이 들통날 걸 생각하니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저렇게 물어 오는 상대방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에도 움찔하는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그와 닮은 사람을 찾는다는 말, 그 말의 의미를 변 사장은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없었다. 어쩌면 그를 반평생 이상 외면하고 있던 그의 진짜 뿌리를 찾게 되는 기회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만약에, 만약에, 정말로 이 사람이 찾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면 말이다. 그렇지만 이제 와 순순히 그가 세상을 속이며 만들어 놓은 그의 과거를 모두 고백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이루어 놓은 것들이란 말이냐? 그야말로 자수성가라는 말로는 모자라는 게 아니었던가? 그 모두를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봉금 변 씨 19대손으로 산 십여 년 가까운 시간도, 보육원 원장의 성을 받아 살았던 사십여 년도 아닌, 애초에 그가 타고난 생의 진짜 근본을 만날 수도 있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치는 게 뭡니까?”
변 사장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고서 의외의 방문에 대한 나무람으로 말을 뗐다. 불쾌한 기색은 드러냈지만, 여전히 그가 생각하는 위엄을 갖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당장은 그의 과거사를 모두 이야기해 줄 수 없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맞은편에 예의를 갖추고 앉아 있는 사람이 찾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확신도 없지 않은가? 확실한 뭔가가 나올 때까지는 끝까지 족보를 이용하여 시침을 떼야지. 굳이 나를 먼저 다 보여줄 필요는 없지. 이 자가 가져온 정보를 먼저 들어보자. 그러고 나면, 뭐라도 내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뿌리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 하지만 경우에 따라선, 이 자가 말하는 사람이 내 생부라 해도 내가 부정할 수도 있겠지.
“정 사정이 그러시다면 족보를 보여 드리죠. 저야 뭐 못 보여드릴 이유가 없지요. 저에 대해 그런 오해를 하고 계시면 저도 좋을 게 없으니까요.”
말끝에는 애써 무덤덤함을 드러내기 위한 웃음까지 섞으면서, 변 사장은 직접 족보를 가져다가 펼쳐 놓았고, 그때 또 한 번의 초인종이 울렸다. 개 중개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불청객과 족보에 온통 신경을 쓰고 있던 변 사장은 직접 문을 열지 못하고 큰 소리로 아들을 불러 문을 열도록 했다. 여전히 불만 가득한 아들이 문을 열었고 곧 컹컹거리며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었던 대로 꽤나 큰 놈인지 그 소리만으로도 오싹하며 소름이 끼쳤지만, 애써 여유를 가장하며 족보를 들여다보는 상대방의 행동에 집중하고 있던 변 사장은 그것조차 느낄 수 없었다. 마당에서는 변 사장의 아들에게 개 중개인이 개에 대해 떠벌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마침내 족보의 이곳저곳을 꼼꼼히 뜯어보던 변호사가 체념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예, 제가 무언가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족보에는 아무런 이상한 점도 없군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미 오해했다고 말씀을 드리고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그럽니다만, 혹시 한자(漢字) 한 글자가 자수로 놓인 붉은색 명주 조각보를 가지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사장님의 모습이 제게 아들을 찾아 달라고 부탁하셨던 그분의 젊은 시절 사진과 너무도 닮아서요.”
명주 조각보!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변호사는 자신이 가진 것을 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정말 누군가 자신을 찾고 있단 말인가? 이제야 거짓이 아닌 진짜 뿌리를, 자신을 그토록 서럽게 했던 근본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인가?
변 사장은 코끝까지 내려온 안경을 걷어 내고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려했으나 입이 바싹 말라붙어서, 쉽게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다만 숨이 짧아졌고 간간이 낮은 신음이 섞였다.
아찔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왜 이제야, 이제야 이런 일이 내게? 하지만 56년을 오직 혼자 힘으로 살아온 사람답게 그는 냉정을 잃지 않았다.
잃어버린 과거를 찾을 수 있다고 하여 이제 와 달라질 것이 무엇인가? 내 과거의 대부분은 내가 아는 일이고, 모르는 것은 태어나 버려지기까지의, 자신의 평생에 비하면 극히 짧은 시기일 뿐이다. 그걸 알게 되면 뭐가 달라지겠나. 이미 어디에 내놓아도 떳떳할 배경을 가진 마당에 구태여 부모를 찾아야 하나? 어쨌든 자신을 버린 사람들이 아닌가? 무엇보다, 아들놈에게는 뭐라고 할 것인가? 진짜든 가짜든, 지금 이대로의 저명한 조상들 덕을 보는 게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정 미련이 남으면, 나중에 따로 알아보면 된다 싶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56년에 얼마를 더 보태든, 큰 차이가 없었다.
“제가 꼭 대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오해를 없애기 위하여 말씀드리죠. 그런 것, 없습니다.”
변 사장은 ‘없습니다’ 부분을 일부러 한 자씩 끊어 또박또박 발음했다. 그에게는 그가 각고의 노력으로 만들어 놓은 것 이상의 진실은 없었다. 대외적으로 그는 분명히 봉금 변 씨 29구대 손이어야 했다.
그는 짐짓 관심이 없는 듯, 시선을 피하며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그런데 그냥 호기심에 묻는 겁니다만, 그 한 글자는 대체 뭐랍디까?”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 일어서던 변호사가 멈칫했다. 잠시 망설였지만, 변호사는 이내 돌아서며 이젠 상관없다는 듯 대답했다.
“‘참을 인’ 자라고 합디다.”
변 사장의 심장이 방망이질을 쳐대기 시작했다. 얼굴도 상기되었다. 변호사는 이미 현관을 내려서고 있었다. 잡아야 하나? 말해야 하나? 하지만 변 사장은 애써 평온을 되찾았다. 진실을 찾기에는 잃을 것이 너무 많았다.
그때, 신발을 고쳐 신으면서 변호사가 혼자 중얼거리는 말을 변 사장은 똑똑히 들었다.
“운도 없는 분이시지. 그렇게 돈이 많으면 뭣하나, 결국 아들도 못 찾고서…. 그렇게 친자를 그리워하시더니….”
그 한마디는 변 사장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가 지금까지의 성공을 위해 자는 동안에도 조건반사로 반응하던 돈이라는 말, 그것도 ‘그렇게 많은’이라는 말에 변 사장은 유려하게 넘겼던 조금 전의 모든 행동이 일순 후회되었다. 변 사장은 변호사에게 다급히 물었다.
“의, 의뢰인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신가 보지요?”
“네, 오늘내일하시네요. 안 그래도 생전에 전 재산을 공익단체에 기부하고 마무리하려던 걸, 혹시나 해서 중단해 놨거든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꽤 기대하셨는데…. 아, 제가 쓸데없는 말이 많았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이만.”
돈. 막대한 유산. 내 앞으로 남겨진 재산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내가 아들이다. 내가 그 돈의 주인이다. 그래, 그 명주 조각보를 보여 줘야지. 가만, 그걸 어디 뒀더라? 그래, 거기다.
변 사장은 황급히 방으로 뛰어가 조각보가 있는 장롱 반닫이 바닥 깊숙한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미 막대한 재산의 향방을 쥔 변호사는 마당을 지나고 있을 것이고, 그를 놓치면 안 되었다. 급한 마음에 이불 속을 뒤지는 손이 더디기만 했다. 나와라, 빨리. 그래, 그래. 옳지! 여깄다.
한 손에 붉은 명주 조각보를 움켜쥐고서 그는 거실을 가로질러 뛰었다. 신발을 신을 여유도 없었다. 변호사는 이미 마당 끝에서 대문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마당에서 아까부터 변 사장을 기다리고 있던 개 중개인과 아들은 헐레벌떡 뛰어나오는 변 사장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중개인의 손에 목줄이 잡힌, 어른 몸피만 한 개가 몸에 힘을 주더니 크르릉 소리를 냈다.
“서요! 서! 변호사 양반, 여기 그 조각보가 있어요. 여기 ‘참을 인’ 자가 있어요!”
등 뒤에서 들리는 다급한 소리에 대문을 나서던 변호사가 멈칫 뒤돌아봤다. 하지만 넓은 마당에서 푹 꺼져 있는 대문에서는 붉은색의 명주 조각보를 흔들어 대고 있는 변 사장이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낮고 위협적인 소리를 내고 있던 ‘덩힐’이 줄을 잡은 개 중개인의 힘을 뿌리치고 변 사장을 향해 점프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흔들고 있던 붉은 명주 조각보를 향해 뛰어올랐다. 대단한 혈통과 그에 걸맞은 훈련 결과를 보여주듯, 덩힐은 목표물을 낚아채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개 중개인도 어쩔 수 없었고 변 사장도 피하지 못했다.
덩힐은 정확히 명주 조각보를 낚아채서 뒷마당으로 사라져 버렸다. 변호사는 계단을 되짚어 올라왔으나 놀라서 얼어붙은 얼굴로 빈손만 내젓고 있는 변 사장의 모습만 볼 수 있었다. 변호사는 마당을 한 번 둘러보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개 중개인은 영문도 모른 채 도망간 명견을 쫓아 뒤꼍으로 뛰어갔고, 아들은 권태롭던 차에 잘 됐다 싶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변 사장과 중개인과 변호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곧 개 중개인이 뒤꼍에서 명견을 잡아 왔는데, 입에서 억지로 뺏어낸 명주 조각보는 이미 갈가리 찢겨 도저히 원형을 짐작할 수 없게 되었다. 변 사장은 나름대로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자신해 온 자신의 일평생이 묘하게 뒤틀려 똥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치욕감에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변 사장의 아들이 마당에 감도는 묘한 정적을 깨며 이죽거렸다.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명견은 무슨 명견? 불그레 죽죽 하니 고깃덩이처럼 보이면 무조건 달려드는 똥개구먼!”
그래도 변 사장은 혼자서 세상과 맞서온 사람이었다. 축 늘어뜨린 어깨에 초점 잃은 눈을 하고도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유전자 검사가 있다…. DNA 검사……. 혈통은 거짓말하진 않아…….”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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