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으로 얼굴에 거푸 찬물을 끼얹으며, 그는 전날의 탐탁지 않았던 술자리와 한 해 한 해 다른 숙취의 무게감을 생각했다. 회사일도 차질을 빚겠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자신을 향해 날아들 아내의 날카로운 말들과 차가운 시선이었다. 실망이나 염려와는 거리가 먼, 낮고 건조해서 더 마음을 헤집는 목소리. 이미 출근했을 터이니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할 것이었다. 바로 오늘 저녁이든 내일, 아니면 조금 더 묵혀둔 며칠 뒤가 되었든, 아내가 이런 꼬투리를 지나칠 리 없었다. 아내의 질책이 실망의 표현이라면 아직도 자신을 향한 기대가 남아 있다는 것에, 염려해 주는 것이라면 아내의 어디 한 조각 정도는 여전히 그가 사랑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사실에 일말의 위안을 삼을 수 있겠다 싶기도 했다. 그런 정도만으로도 한동안의 우울한 자숙기간을 지나고 나면 또다시, 습관처럼 켜켜이 쌓아온 절망을 의도적으로 망각한 채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를 테니까.
세면대 거울 속에는 초췌하고 눈이 퀭한 남자가 들어 있었다. 오래된 증명사진을 보는 것처럼 그 얼굴이 낯설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가 그 누구, 혹은 무엇이든, 이유 불문하고 전면전을 펼칠 준비가 되어 있던 예전의 열정과 자신감은 어디로 갔나? 거울 속의 남자는 외부의 힘에 무장을 해제당하고 최소한의 방어기재마저도 상실한 모습이었다. 더 비참한 것은 자신을 그렇게 만든 적, 그 실체가 무엇인지도 파악 못 한 혼란과 두려움이 얼굴 곳곳에 번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 공포는 마흔이 넘어가며 부쩍 넓어진 이마에 자리 잡았고, 이제는 반짝임이 사라진 눈 속에도 담겨 있었다.
눈썹에서, 코끝에서 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거울을 들여다보던 그의 머릿속에 어제 있었던 부장과의 언쟁이 떠올랐다.
씨이파알……. 같이 갈지, 혼자 잘려 나갈지, 결정은 내 몫이라고? 정보력을 조금이라도 가진 누구라도 달려들어 털려고 하면 다 밝혀질 수밖에 없는 일인데, 그 위험을 감수하라고? 일은 내게 다 시키고, 혹시나 잘못되면 덤터기나 씌울 요량이면서, 뭐? 씽크 컨디션? 내가 널 어떻게 믿으란 말이냐!
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차갑기만 하던 부장의 표정이 거울 속 자신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 뒤에 이어진 구체적인 회유와 감언이설은 숙취와 함께 잊어버렸어도 내내 이어지던 감정 없는 눈빛은 지워지지 않았다.
어차피 술도 깨지 않은 상태로 만나봐야, 될 일도 없을 터. 회사에는 오후에나 나가지 뭐.
그는 휘청거리며 세면대를 짚었던 두 손을 떼어 욕조로 돌아섰다. 배수구를 막고 뜨거운 물이 비처럼 떨어지도록 샤워기를 맞추고는 욕조 안에 몸을 뉘었다. 고개를 숙였다 들 때마다 어지러움이 더 했다. 쏟아부어진 듯 온몸이 욕조에 늘어졌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이든 뱃속이든 들어 있는 전부를 깨끗이 비워내고만 싶었다. 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텅 빈 양철통처럼 볼품없는 소리를 내게 되더라도 꼭 한 번은 그래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머릿속에는 홍수에 밀려드는 쓰레기더미 같은 상념이 끝도 없이 고였다. 한 줄 남은 끈에 달린 위태로운 애드벌룬처럼 한 자리에 꼿꼿이 버티지도 못하고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가지도 못한 채, 결론이 나지도 않을 생각들이 불쑥 튀어나와 떠다니다 사라졌다.
그래도, 출근을 미루기로 작정해 버리고 나니 좀 편해진 것도 같았다. 아내가 집에 있었으면 꽤나 눈치 보일 일이었겠지만, 몇 번을 닦달해도 꿈쩍도 않는 그를 포기하고서 아내는 혼자 종종걸음을 쳤을 것이다. 돌 지난 지 석 달인 딸을 혼자서 입히고 챙겨 장모에게 맡겨야 하는 출근길이 시간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여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부러 그러는지, 어쩔 수 없는 건지 몰라도 작은 애를 낳고부터는 더욱 속내를 담아두지 못하는 아내의 얼굴에 가득 담겼을 불만과 신경질이 애써 떠올리지 않아도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래도 장모 앞에서 뭐라고 말을 꺼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해 봐야 장모의 잔소리를 하나 더 보탤 뿐이라는 것을 모를 만큼 아둔한 여자는 아니었다.
중학생인 큰 놈이야 어떻게든 제가 알아서 등교했으리라. 태어나서부터 내내 맞벌이 부모 밑에서 자란 덕에 그런 정도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 문득, 아들의 등굣길을 배웅해 주었어야 한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시간 맞춰 일어났다 해도 여전히 술 냄새 풀풀 나는 몰골로는 차라리 보지 않은 것이 나았겠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아들은 요즘 들어 부쩍 말수가 줄었고 그나마 꺼내놓는 몇 마디도 까칠하기 그지없었다. 다들 그럴 나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염려를 놓을 수도 없었다. 신경을 쓴다고는 하지만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으니 딱 부러지는 해결책도 알 수 없는데 처음이라 더 서툴기만 한 일, 아이에 관한 일은 늘 그런 것이었다.
큰아이와 십삼 년이나 터울이 지는 둘째를 애초에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을 다 사고라 할 수는 없겠지만, 아이를 두고서는 결코 떠올지 말아야 할 그런 단어까지 생각날 만큼 그건 갑작스런 일이었다.
첫 아이를 낳고 몇 년간은 형편상 둘째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아이는 더없이 예쁘고 소중한 선물이었지만, 아내가 휴직하자 당장 줄어든 소득만큼 그는 위기감을 느꼈다. 더구나 유리천장도 없고 근속 연수와 실적에 따른 능력을 십분 인정해 주는 외국계 회사에 다녔던 아내의 급여가 그보다 나았던 탓에 생활비 통장으로 월급을 이체해 줄 때마다 그는 늘 미안하기만 했다. 그 미안함이 실제적인 자괴감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한 번은 자신이 휴직하고 아내가 일을 계속하는 게 더 나았을 거라는 이야기를 에둘러 꺼냈을 때, 아내가 그랬다.
“그걸 누가 몰라? 그나마 나는 휴직 기간 끝나면 복직이라도 되지. 당신 회사에 육아휴직이 있기나 해? 있는 휴가도 눈치 보여서 못 찾아 먹으면서, 그 상황에 남자가 애 키우겠다고 휴직 달라하면 참 좋아도 하겠다.”
그래, 내가 젖만 물릴 수 있었으면 복직이 되든 안 되든 진작 그렇게 했다, 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래본들 아무것도 바뀌는 것 없이 상황만 더 악화시킬 뿐이란 걸 알기에 그는 쓴웃음만 지었다. 정리해고니 뭐니 흉흉한 회사 사정에 원하는 만큼 월급이 오를 리 없었고 지지고 볶는 열여덟 평짜리 아파트 전세 올려주기도 벅찬 마당에, 한밤중에 깨어 보채는 아이에게 반쯤 감긴 눈으로 젖을 물리면서 아이라도 늦게 가질 걸 그랬다고 삐쭉거리는 아이 엄마에게 싫은 소리를 보탤 수는 없었다.
당연히, 둘째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겨우 여섯 달을 채우자마자 서둘러 젖을 떼고 복직을 한 다음부터 아내는 잠자리에 들 때마다 자기 몸에 그의 손이라도 닿을까 피하듯 등을 지고 모로 누우며 노골적으로 정관수술을 입에 올렸다.
“어차피 또 낳을 거 아니니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빨리 병원 다녀와. 어떡하든 반나절 정도는 시간 뺄 수 있잖아?”
결혼 전부터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아들 몇, 딸 몇, 순서는 어떻게 같은 계획을 꼼꼼히 정해둔 것은 아니었지만, 아내도 원래 아이들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어서 셋은 몰라도 둘은 낳아 잘 키워야지 하고 그는 생각했었다. 당장은 상황이 힘들어서 그런다 치더라도 둘이 벌면서 차곡차곡 모으다 보면 아내도 당연히 하나 더 낳자는 생각이 들겠거니 하고 내심 바랐으므로, 그는 아내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수술대에 누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완강했다. 수술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다음, 다음 하며 스리슬쩍 넘기는 데도 뭐라 말이 없는가 싶었는데 아이 돌을 치르고 손님들 다 보낸 저녁에 아내는 단호히 한방을 쓸 수 없음을 선언했다.
손님들을 집으로 모시면 안 된다고 아내는 미리 다짐을 주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이런 때 아니면 애들 사는 거 언제 보겠냐며 당신 동기간 전부를 아들 집에 들렀다 가게 한 탓에, 돌잔치는 결국 아내가 원치 않았던 모양 그대로가 돼 버리고 말았다. 아이의 큰 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 세 분의 고모할머니에 그분들을 모시고 왔던, 그에게는 사촌이고 아이에겐 당숙이나 당고모가 되는 사람들까지 열 몇 명의 성인들이 3인용 소파가 반나마 차지한 거실에 둘러앉았다. 들어오는 길에 부랴부랴 사 와서 깎아 낸 과일에 커피 한 잔씩을 들고 한 시간이 채 못 되게 웃고 떠들다가 아이에게 주는 덕담과 아직 농익은 부부라곤 할 수 없는 두 사람에게 주는 당부를 뒤섞어 쏟아놓고 손님들은 돌아갔다.
어질러진 거실을 정리하고 청소를 마친 뒤, 대견하기도 하고 위로도 해야겠다 싶어 설거지하는 아내를 그가 살포시 끌어안았을 때, 아내는 그를 돌아보는 대신 설거지하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어느 때보다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수술, 왜 안 해?”
첫아이 돌잔칫날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평소 해 왔듯 한 번 더 은근슬쩍 넘길 요량으로 아내의 허리를 두른 팔에 더 힘을 주어 봤지만 돌아오는 건 작정하고 쏟아내는 야멸찬 말뿐이었다.
“내가 집으로는 모시지 말자고 했지? 당신도 눈이 있으면 여기 좀 보고 생각을 해 봐. 커피잔도 제대로 없어서 머그컵 다 꺼내고, 그것도 모자라 밥공기까지 꺼내다 썼어. 발 뻗을 데도 없는 거 봐서 아셨으니, 그러시라고 붙잡았어도 당연히 주무시고 가진 않았겠지만, 앉을 자리도 없어서 아주버님들은 들락거리면서 계속 담배만 피셨잖아! 나 이런 식으로 또 일 치를 자신 없으니까 이제 우리 아이는 더 없는 걸로 해.”
주방세제 거품을 뒤집어쓰고 개수대에 쑤셔 박혀 있는 그릇들 속에 닦다 만 티스푼과 수세미를 던져 넣으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내가 그를 돌아다 봤다.
처음부터 잘 사는 사람 몇이나 있겠냐? 나 어릴 때는 이보다 더 좁은 집에서, 다투기도 하고 보듬어도 주면서 형, 누나와 다 알아서 컸다. 그런 게 사람 사는 거지, 축하해주고 덕담해주는 일가친척이 먼 데서 왔는데 형편 어렵다고 사는 것도 못 보여 주냐? 또 우리 같이 젊은 나이에 이만하면 드러내 놓지도 못할 만큼 어려운 것도 아니지 않느냐. 다들 우리 얼마나 잘해 놓고 사는지 보러 오셨겠냐? 어릴 때부터 봐 왔던 녀석이 언제 철들었는지도 몰랐는데 장가가서 아이 돌잔치 한다 하니, 그래 니들 알콩달콩 사는 거 보고나 가자고 오신 거 아니냐. 오늘은 돌잔치지만, 이런 거 아니라도 따로 한 번 모셔도 모셔야 할 판에, 기분 좋은 날 핑계 삼아 한 번 때웠다고 생각해도 될 거, 그게 아이를 또 낳고 안 낳고와 무슨 상관이냐? 둘째 낳는대도 요즘 같은 세상에 또 돌잔치를 하겠냐? 앞으로 우리가 아이를 열둘을 더 봐도 돌잔치는 이번이 끝일 텐데, 그렇다면 오늘 이렇게 모시길 더더욱 잘한 거 아니냐…….
따지고 보면 언성을 높인 것이었지만, 그의 입장에선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부터 아내를 설득할 생각도 아니었고 그럴 자신도 없었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아내에게 그렇게 제대로 부은 소리를 꺼내놓은 적이 없었기에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길어질수록 자신감은 점점 사그라지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다 뱉어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별다른 이야기 없이 수긍만 해 준다면, 아내 역시 그간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고생스러워 그런 말을 꺼내긴 했어도 자기 입장을 몰라서 그런 건 아닐 거라 이해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고도 있었다. 하지만 아내도 지지 않고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고마워, 고맙다고. 몇 시간씩 차 타고 와서 별거 아닌 저녁 한 그릇 먹으면서, 요즘 같은 형편에 집집마다 한 돈짜리 돌 반지 가져다주는 친척들 당연히 고맙지. 하지만 그게 그냥 받고 마는 거야? 우리가 다 갚아야 하는 빚이야. 지금 당장이 아니고 앞으로를 생각해 보라고. 당신 가져오는 거 빤하고, 나는 아이 하나 키우기도 벅차서 승진 대상이 되는 업무 맡는 건 엄두도 못 내. 그럼 나 역시 앞으로가 빤하단 말이야. 애가 엄마 찾는 건 아직 어려서, 몸에 전해질 온기나 느끼려는 것뿐이니 당장이야 돈 들여 아줌마 쓰면 된다 치자고. 하지만 더 크면 그냥 아줌마에게 맡기고 말 수 있어? 이것저것 직접 가르치고 거두고 아이 친구들 부모도 만나야 해. 그렇게 만나면 그냥 만나고 말아? 다 수준이 비슷해야 만나진다고! 또, 지금 당신 가져오는 거에서 아줌마 월급 주고 나면 얼마 남는지 알아? 애 낳는다고 나 회사에 또 휴직하겠다고 못해. 나 쉬면서 애 키우면 아줌마 월급 안 나가니까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지, 당신? 애 둘 키우면 아줌마 없어도 그 돈 다 나가게 돼 있어. 그거, 당신 감당할 수 있어? 우리 그렇게 안 된다고!”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고, 결혼하고 애 낳고 티격태격이든 알콩달콩이든, 그게 사는 거 아니냐고, 힘들고 어려울 때 있어도 또 그렇게 넘기다 보면 한평생 지나가는 거, 그게 사람살이 아니냐고, 그는 아까보다 조금 더 감정을 섞은 항변을 해 봤지만, 아내는 단호했다.
“나, 당신 수술받을 때까지 한방 쓸 수 없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는 그를 두고 남은 설거지를 마친 아내는 창고처럼 쓰는 작은 방에서 이부자리 한 채를 꺼내어 마루에 내놓고는 안방에서 들고나온 그의 베개를 던지듯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서, 아이가 곤히 자고 있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그제야 이게 뭐냐고, 당신 정말 이럴 거냐고 소리치며 잠긴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오는 건 소란에 놀란 아이의 울음소리뿐이었다. 그로서는 거실에 이불을 펴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둘째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모멸감이라 해도 좋을 만큼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터라 그도 둘째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어쩔 수 없이 따로 이불을 펼쳤지만, 시간이 좀 흘러서는 먼저 베개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백기 투항하는 꼴이라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종내는 그의 입장에서도 아쉬울 거 하나 없다는 식의, 타협의 여지 없는 시위 형국이 되어 버렸다. 맞상대도 없는 시위 분위기는 얼마 안 가 시들해졌지만, 옆에 아무도 없이 혼자 누워 잠을 청하는 것이 발가벗고 자는 것처럼 외려 시원하고 편하게 느껴져 그와 아내의 한 지붕 아래 별거는 그대로 굳어졌었다, 십 년이 넘도록!
그래도 매일 얼굴 보고 사는데 살 섞는 거 없다고 하루아침에 남남 되듯 하는 것은 아니라서 처음에는 서먹하던 것이 또 그런대로 자연스레 자리를 잡아갔고, 그러는 동안 재테크에 재주가 있는 아내가 은행에서 받은 대출을 끼고 28평짜리 집을 계약해 오더니, 큰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간 작년에는 중심가에서 좀 떨어지긴 했어도 36평 아파트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아내가 입에 달고 사는 남편 벌어오는 돈이 적다는 말이 죽기보다 듣기 싫었었지만, 결국엔 그만큼 이루어 놓은 것이 내심 대견하기도 해서 그도 아내의 악착같은 면이 고맙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새집은 그렇게 그를 말랑하게 만들었다. 당신 없었으면 어떻게 이만큼 할 수 있었겠냐, 는 말로 아내 앞에서 스스로를 낮춰 볼 수도 있을 만큼 말이다. 더구나 시어머니의 환갑에 잔치는 생략하더라도 친지들 모시고 저녁은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아내가 먼저 말을 꺼냈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내가 얻은 가장 큰 복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환갑을 핑계로 모인 저녁, 새집에 둘레둘레 모여 앉아 고스톱판을 벌이다가 방이며, 마루며 각자 자리를 만들어 다들 잠들고 나서 아파트 단지 벤치에 나와 형님과 담배를 나눠 피우게 되었을 때 그는 기꺼이 아내의 수완을 자랑하는 팔불출이 되었고, 그런 화해 무드 속에 계획에 없던 둘째가 들어섰던 것이다.
예상대로 아내는 둘째를 반기지 않았다. 아내도 지나가는 말로, 아이가 크면 일을 그만둬야 할 수도 있을 거라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언제라고 정해두지 않은 막연한 이야기였을 뿐이었고,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그 시점은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야지 상황에 쫓기는 결정을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점점 나아지는 살림에 재미가 붙은 그도 아내의 퇴사를 바라지 않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이미 생긴 아이를 어쩔 수는 없었다. 막연하긴 했지만 염두에 두고 있었던 계획을 다 바꿔야 했다. 그나마 목표했던 내 집도 마련했고 쳇바퀴 돌 듯 매일 똑같은 일상이 점점 지겹기도, 힘에 부치기도 한다고, 퇴직의 이유를 전적으로 아이 탓으로 돌리지 않을 만큼 아내가 상황을 받아들여 준 것이 다행이었다.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그도 승진했으니 큰 욕심만 없다면 혼자 벌이로도 그럭저럭 지낼 만큼은 되었다.
아내는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퇴직했다. 금상첨화로, 배가 조금 봉긋해질 무렵, 의사는 둘째가 딸이라 했다. 첫째가 아들이라 사근사근한 맛이 없다고, 딸이었으면 친구 삼아 쇼핑도 같이 하고 나이 더 들어 함께 놀러 다닐 수도 있어 좋았을 거라며 아쉬움을 내비치던 아내인지라 그 이야기를 듣고는, 더는 안 낳겠다고 단호하게 얘기하던 예전의 기억은 남김없이 지워 버린 양 반가워했다. 그때쯤 그는, 짐짓 장한 표정을 지으며 뿌듯하게 아내에게 한마디를 했다. 거 봐. 수술 안 하길 잘했지? 그랬으면 지금처럼 기쁜 일이 어떻게 있었겠어?
노산이라 여러모로 힘들겠다는 생각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지만, 뱃속의 아이도 아내도 별 탈 없이 열 달을 지났다. 태어나서도 첫애보다 잘 먹고 잘 자며 무럭무럭 자랐다. 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훨씬 더 넉넉해진 만큼 아이에게 주는 사랑이 더 풍족한 덕분인지도 몰랐다. 참 고마운 아이라고, 부부가 함께 받은 축복이라고 내외는 생각했다. 막 결혼하고 난 뒤의 몇 달을 빼고선 그 어느 때보다 가정이란 말에 내포된 화목하고 단란한 이미지와 꼭 맞아떨어지는 시간들이었다.
그래, 계속 그럴 수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디부터, 뭐가 잘못된 것인가?
그는 욕조에 차오른 물을 두 손으로 떠서 거칠게 얼굴을 씻어 내고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여전히 온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숙취인지, 복잡한 상황들로 인한 압박감인지 분간이 서지 않았다. 잠시나마 다 잊고 잠이라도 자 보려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쯤에 있는 것 같았다. 꿈이라면 악몽일 테니 어서 빨리 깨었으면 하는 마음과 현실이라면 차라리 꿈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부장이 그를 불러 새로운 프로젝트를 넌지시 암시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입사를 같이 했지만 직급 차이가 엄연해서 회사 내에서는 깍듯한 태도를 해야만 했던 사람이었다. 은연중에라도 동기인 것을 내색하는 법 없이 별다른 것 없는 부하직원으로 그를 대해 오던 사람이, 함께 고생하던 신입사원 시절 이야기부터 서로의 결혼식, 아내와 늦둥이에 대한 안부까지 꺼내며 애틋함을 부풀리다가 끄트머리에 방점을 찍으며 말했다.
“자네도 이제 중요한 일 하나 해야지. 따로 곧 연락이 갈 거야. 연락받으면 이것저것 재지 말고 날 좀 도와줘. 동기 좋다는 게 뭐야? 좀 앞서 나가면서 내가 자네를 좀 잘 챙겼어야 했는데, 지금까지 모자랐던 거 이번에 다 좀 신경을 쓰려고 하는 거니까 그리 알고. 자네도 가족이 늘었으니 그런 생각 더 하겠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직함이라든가, 직업적 안정감이라든가, 남자에게 그거 무시할 수 없거든. 이번 일만 잘하면 나도 나지만 자네도 크게 얻는 게 있을 거야. 서로가 좋은 일이지.”
입에 발린 말이 대부분임을 모를 만큼 어수룩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장이 풀어놓은 이야기는 자격지심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가진 약점을 정확히 걸고넘어지는 것들이었다. 부장의 말이 진심 어린 염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그런 걸 알면서도 어쩌면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계산이 앞서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어쨌든 부장이 말하는 ‘서로가 좋은 일’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은 상황에서 염려도, 기대도 미리부터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는 돌아가는 모양을 지켜보기로 했었다.
열흘쯤 뒤에, 회사가 출시하는 신제품의 부품업체 선정에 관해 부장과 통화를 했다. 부장은 통상적인 확인 사항을 몇 가지 물어보더니 이내 잔뜩 목소리를 낮춰 특정 업체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S사 남 사장 만나본 적 있어? 같이 일을 한 적이 있어도 실무선만 봤을 테니 사장은 모를 거야. 그래도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지? 우리하고 연배도 크게 차이 나지 않아. 나한테는 고등학교 두 해 선배 되는데, 오늘 저녁에 술이나 한잔하지. 자네한테 도움이 되면 되었지 해 끼칠 인물은 아니니까.”
결국 그 ‘해 끼치지 않을 인물’의 납품을 그가 성사시켜 주었다. 제출받은 성적표를 봐서는 경쟁 제품보다 품질이 못한 것도 아니었고, 납품가가 더 비싸지도 않았으니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납품가야, 내부적으로 책정한 기준과 입찰업체들이 제출한 가격을 알고 있는 그가 미리 조정해주었으니 당연히 적당한 수준이 될 수밖에 없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원하는 품질의 제품을 예상 가격으로 공급받게 되는 데다, 개인적인 보상 같은 건 얻은 바 없으니 큰 잘못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런 정도의 편의를 봐주는 거야 조직에서 상사를 모시며 피할 수 없는 거라는 자기 암시는 필요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경우에 따라 이렇게 맺은 인연으로 부장이나 남 사장에게 자신이 필요한 무언가를 부탁할 수도 있을 거라는 계산은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말이다. 살다 보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거니까. 소개의 대가로 부장이 남 사장으로부터 뭐라도 얻었는지는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어차피 회사가 손해 본 일이 없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칠 개월쯤 전의 일이었고 그 뒤로도 부장의 은밀한 지시를 몇 번 더 처리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딱히 회사도 그도 큰 문제가 없는 일들이었다. 그런 끝에 그의 차장 승진이 있었다. 일련의 일들과의 연관성을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직전의 승진에 비하자면 매우 빠른 것이었다.
나날이 늘어가는 늦둥이 재롱에 행복을 느끼는 동안 어느새 아이의 돌이 되었다. 아들도 더는 다른 문제 없이 지내는 것 같았다. 아이들에 신경 쓰느라 온전히 가정적이 된 줄 알았던 아내는 아이의 친가와 외가 어른들만 모신 간단한 돌상을 놓고 앉은 자리에서 새로운 일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가족들의 염려가 쏟아졌다. 이제 막 돌인 아이도 그렇지만 중학생쯤 되면 본격적인 경쟁의 시작이라 하겠는데 엄마가 집에서 잘 챙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애비도 승진해서 이제 벌이도 좀 더 여유 있을 텐데 꼭 밖으로 나돌아야 하겠냐고, 벌어오는 돈이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집안 잘 챙기는 게 그것보다 몇 배는 더 남는 장사일 수도 있다고 싫은 소리를 하는 시어머니의 말을 아내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게 뜻을 무르지 않겠다는 딸의 시위인 줄 알아챈 장모의 입에서 둘째는 당신이 봐주시겠다는 말이 마지못해 나왔다.
아내는, 십여 년 전 그에게 정관수술을 강권하며 조목조목 이유를 꼽아놓던 것과는 정반대로, 말을 꺼낸 뒤부터 한 마디 설명이나 대답도 없이 눈을 내리깐 채 어른들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런 아내에게서는 나이만큼 얻어진 현명함보다 가족들의 의견은 상관없다는 고집만 가득 읽혔다. 그는 제대로 된 상의 한번 없이, 양가 어른들 계신 자리를 기회로 이런 일을 몰아붙이는 아내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행복과 충만감이 아내에게는 없었던 것인가 하는 배신감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떠올랐다.
아내는 몇 주 후부터 보험회사의 직원 교육프로그램에 나갔다. 속마음은 어떤지 알 수 없었으나 집안일을 전보다 더 깔끔히 해내면서도 밝은 모습이었다. 자신의 재취업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려 애쓰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내도 곧 마흔이었다. 피곤이 역력한 얼굴, 실적에 쫓기는 스트레스 같은 것들을 전부 숨기고 지낼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의 의지도 약해져 갔다. 두 가지 일을 다 하는 것이 힘에 부쳐도 고집을 부려 시작한 일을 쉽게 그만둘 수는 없었고, 또 무엇보다 본인이 그만두려고도 하지 않았다. 점점 나빠지는 건 집안 상태뿐이었다. 며칠씩 묵은 설거짓거리가 개수대에 쌓이고, 집 구석구석이 지저분하고 어지러워졌다. 아이들 신발은 볼 때마다 더러웠고, 단추가 떨어진 그의 셔츠는 얘기해도 그대로이기 일쑤였다. 딱히 외할머니의 정성이 모자란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콧물과 기침을 달고 있는 작은 아이도 엄마 손에서라면 그렇지 않을 거라는 억측도 들었다. 무엇보다 싫었던 것은 세탁소에서 스테이플러로 찍어 붙여둔 아파트 동 호수 태그가 그대로 붙어 있는 옷을 꺼내 입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알아서 다 할 수 있는 일이긴 했지만 예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집 안에 몽실몽실 떠다니는 정성 같은 것을 아내의 벌이와 맞바꾼 것만 같았다. 가득하다 못해 넘칠 정도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시시콜콜 꼼꼼하게 신경 쓰지 않아도 내 가정은 잘 꾸려지고 있다고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정성, 그런 배려면 족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집에서 점점 더 찾기 어려운 것이 되어갔다.
아내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본대도 당장은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당신이 더 노력할 수도 있지 않냐는 한 마디, 그것으로 더 이상의 대화가 이어질 수 없을 게 뻔했다. 결국 소소한 말다툼만으로 끝나면 다행스러운 일이고, 되돌아올 아내의 투정과 불만들이 그의 자존심에 감당하기 쉽지 않은 생채기를 낼 것이었다. 아내라고 집안 꼴을 모를 리 없고, 그런 현실이 마뜩잖은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져 보자면 집안일이라고 분류되는 모든 것들을 아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아내에 대한 그의 불만도 깊지만, 그런 내색을 하려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어쩌면 아내가 숨기고 있는 불만은 훨씬 더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쌓여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문제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회사 일도 꼬이기 시작했다.
부장이 결정적인 지시를 내린 것이 지난달이었다. 대형 관급 납품에 S사와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회사가 가진 기술과 자본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지만, S사의 특정 기술을 활용해야만 하는 것으로 꾸며 S사를 필수 파트너로 넣도록 보고서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별 무리 없이 회사가 따낼 수 있는 관급 납품에 대한 수익을 S사와 나누자는 것이었다. 위험했다. 양심에도 내키지 않았다. 남들보다 앞서거나 뛰어나지도 못했고 대단한 청렴결백은 아니었어도 남들이 쉽게 눈감고 외면하는 양심이 하는 말, 다 잊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 그는 생각해왔었다. 결국 완곡한 거부 의사를 부장에게 전했고, 돌아온 것은 한 때 ‘우리’였던 쪽으로부터의 전면적인 압박이었다.
처음에는 이 일로 얻어질 이익 일부를 나눠주겠다는 금전적 회유였으나 종국에는 그의 거취 문제까지 거론했다. 그로서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고액이었지만 어렵게 거절했다. 지난 십몇 년의 결혼생활 동안 아내에게 늘 경제적으로 미안했었다는 것과, 그 돈이면 아내가 일을 쉬고 온전히 아이들에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도 떨쳐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돈이야 원래 없던 것이었으니 받지 않아도 손해 보는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본전이었다. 하지만 일단 이런저런 계획을 들려준 이상 동조하지 않으면 알량한 차장 자리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노골적인 협박에는 위협을 느꼈다. 퇴사는 그가 십여 년을 공들여 가꾸어 놓은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혼자만의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어제 술자리에서 그는 그런 부정은 할 수 없다고 부장에게 단호히 말했다. 최후통첩 같은 것이었다. 회사에서 잘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민형사상의 처벌까지 가능한 일이다, 뭐 그리 대단한 양심이라고, 양심 때문에 못 하겠다는 거 아니다, 네가 내 동기니까, 그래, 지금까지 한 번도 동기랍시고 계급장 떼고 이야기한 적 없지만, 이번은 내 말 들어라, 지금까지 몇몇, 너 관련해서 돌아가는 일에 대한 소문 들은 거 있고, 확인한 것도 있다, 하지만 그건 지금 거하곤 차원이 다르다, 그런 건 그냥 다들 그러려니 하고 눈 감고 모른 척 할 수도 있을 만한 것이라고 치자, 이번 건 너나 나나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다, 우리만 공모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언젠가는 다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던 부장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뗐었다.
“자네, 싱크 컨디션이라고 알고 있나? 전공이 뭐였더라? 화학 쪽이라면 알 수도 있을 얘긴데 말이야. 어떤 반응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원료를 넣자마자 바로 녹아 없어져 버리는 상황을 말하는 거지. 밑 빠진 독 같은 거, 콩쥐는 자꾸만 물을 길어 채워 넣는데 독에 난 구멍이 너무 큰 거지. 깡그리 비워내지는 조건, 그 안에서 뭐가 어찌 돌아갔는지 알 수 없는 깨끗함 말이야. 깨진 독을 막고 버틸 두꺼비만 없다면 절대 그 독은 증거 같은 거 하나 없이 완전히 비워지는 거라고. 이 판이 그래. 다 준비가 되었다고. 일반적인 화학반응은 싱크 컨디션이 아니지만 적절한 촉매를 사용하면 얘기가 다르지. 자네가 그 촉매가 되는 거라고. 두꺼비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알아들어? 문제없는 일이야. 하지만 우리와 함께하지 않겠다면, 자네 역시 또 다른 두꺼비로 볼 수밖에. 나는 이미 어떤 두꺼비라도 밟아 죽일 준비는 되어 있거든. 아, 다른 뜻도 있지. 싱크 컨디션. 조난으로 배가 가라앉는 상황. 이러나저러나 자넨 그 상황이야. 내 손을 잡으면 거대한 싱크 컨디션의 조율사가 될 거고, 뿌리치면 자네 혼자 침몰하고 말 거니까!”
부장은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말을 끝냈다. 야비한 웃음이었고, 그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는 제 앞에 놓인 잔을 말없이 거푸 비워냈고 그 뒤는 기억이 없었다.
살면서 어떤 결정 앞에 섰을 때, 그 결정의 비중을 바로 그 순간에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이 결정은 나중에 별 시답지도 않은 일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남은 인생을 옭아맬 정도의 일인가? 그는 자신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회사든, 집이든, 가끔 삐걱거리다가도 당연한 듯 제 궤도를 찾아서 돌아가리라 여길 수 있었으면 싶었다. 누구라도 겪어 내야 할 성장통 같은 것으로 치부하고 싶기도 했다. 여전히 머리가 무거웠고, 당장은 어떤 판단이라도 제대로 내릴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한번 얼굴에, 이제는 식어버린 물을 끼얹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 정말 싹 비워내고 싶다. 내 안에 있는 복잡한 모든 것들을, 차라리 애초에 내가 몰랐으면 좋았을 것들을. 아니다, 다른 이들의 머릿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싹 지워냈으면 좋겠다. 단 며칠만이라도. 날 알지도 못하고, 찾지도 않도록.
그런 생각은 단지 바람일 뿐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았다. 계속 그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뭔가를 해야만 했다. 어떻게 되든 결국은 현실로 돌아가야 했다. 다짐하듯, 감았던 눈을 크게 한 번 떠 보았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늘어져 있던 팔과 다리에 힘을 주어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끄응, 하는 한숨이 비명처럼 새어 나왔다. 욕조 밖으로 하나씩 빼내는 다리가 흔들거렸고, 또 한 번 어지러움을 느꼈다. 아직, 숙취는 말끔하지 않았다.
그는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려 욕실 문손잡이를 잡았고, 그 바람에 문이 빠끔히 열렸다. 아직 집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레버를 돌려 욕조 배수구를 열었다. 처음에는 아무 변화가 없는 것 같더니 이내 배수구 위로 작은 소용돌이가 생겼고 반쯤 찼던 물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더디더니 물은 곧 일사분란하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그 흐름에 시선을 맞추었다. 콰륵 쿠르륵. 금세, 불규칙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욕조를 빠져나가는 물을 보고 있자니 머리도 텅 비워지는 듯 해 조금 편해지는 듯했다. 오전 내내 그랬으면 하고 바랐지만 되지 않던 일이었다. 콰르륵 쿠륵. 또 한 번, 작은 비명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분명히 물은 빠지고 있는데도 욕조의 수면은 면적은 점점 넓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 욕조 전체가 작은 연못만큼이나 커지고 있었다. 물이 빠질수록, 머리가 비워질수록, 허벅지쯤에 있었던 욕조가 허리를 지나 가슴께까지 자라 올라왔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그는 욕조 난간을 잡고 있던 자신의 손을 보고서야 알았다. 몸이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는 분명 허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욕조 가장자리를 짚고 서 있었는데, 이제는 아이만큼이나 작아져서 턱걸이하듯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천정도 높아지고 벽도 멀어져 갔다. 욕실이 사방으로 커지고 있었다. 세면대도, 변기도 커졌다. 그러니까 분명히, 그가 작아지고 있었다. 놀란 그는 발작적으로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두 손으로 눈을 비비고, 양 볼을 때려도 봤다.
이럴 리가 없지,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헛것이 보이나?
꿈이라기에는 의식이 너무나 또렷했다. 애써 가다듬으려 할 필요도 없이 그의 정신은 이미 선명히 살아나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의 몸은 줄어들고 있었다. 바람이 빠져나가는 풍선처럼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이제는 더 이상 욕조 난간을 잡을 수도 없는 정도가 되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점점 더 작아진 그는 슬리퍼보다도, 아이들 칫솔보다도 작아져 마침내 레고 인형만큼 작게 되었다. 이제 혼자서는 욕실 문턱도 넘을 수 없었다. 무서웠다. 극한의 두려움에 휩싸였다. 어떻게든 그 상황을 벗어나야 했다. 그는 뭐라고 하는지도 모른 채 아무 소리나 마구 질러댔다. 하지만 줄어든 몸집만큼 소리도 작아져 있었다. 그래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온 힘을 다해 소리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자 갑자기, 욕실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엉거주춤 불안하게 서 있는 둘째가 보였다. 돌 지난 아이가 딴에는 힘껏 문을 밀어제친 것이었다. 제 외할머니에게 있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도 잠시, 그는 아이의 이름을 온 힘을 모아 크게 불렀다. 작은 소리였지만, 바로 앞의 아이에게는 어렵게 들릴 수 있는 정도였다. 아이는 처음에 소리의 근원이 어디인지 몰라 두리번거렸지만 이내 욕실 바닥에 장난감만 하게 작아진 제 아빠를 발견하고는 엉거주춤 욕실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는 더 크게 소리쳤다. 그래, 아빠야, 아빠!
그에게 다가온 아이는 잠시, 고개만 숙여 빤히 내려다보고 서 있더니 마침내 무언가 알아본 듯 까르륵 웃으며 몸을 낮췄다. 하지만 손을 뻗던 아이는 바닥 물기에 미끄러지며 기우뚱했다. 평소 같으면 옆에서 지켜보던 그가 달려가 아이를 붙잡아 주었겠지만, 이번에는 엉덩방아를 찧는 아이를 피하기 급급했다. 그는 온 몸을 던졌지만, 바닥을 짚는 아이의 손에서 얼마 떨어지지 못했다. 여기! 아빠야, 아빠! 아빠를 저기 마루로 데려다줘! 다시, 그는 아이를 향해 간절히 외쳤다.
이제 아이는 그가 뛰어오르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턱을 바닥에 붙이고 그에게 분명히 초점을 맞추었다. 기저귀로 불룩한 엉덩이가 욕실 바닥의 물기에 젖었다. 아뿌! 아이가 그를 알아본 것 같았다. 잠시 더 그를 바라보던 아이는 물이나 모래를 떠내듯 두 손을 오므려 그를 담고 일어섰다. 아아뿌우! 아직 익숙하지 않은 걸음이었지만 아이는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래, 잘한다. 그래, 이렇게 일단 밖으로 나가자. 그는 열심히 아이를 달래고 응원했지만, 아이가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돌 지난 지 채 몇 달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이가 나타난 것을 더없이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아내라면 더 나았겠지만, 나갈 수만 있다면 우선은 누구라도 좋았다. 그렇게 혼자서 무작정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아이의 손은 따뜻했다. 젖을 뗀 지 오래였지만, 아이에게서는 여전히 제 엄마의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이미 꿈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버렸다.
그러나 아이는 뒤돌아 욕실을 나가지 않았다. 재미난 것을 발견한 듯 손에 담은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떨어뜨릴까 조심은 하면서도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그를 건드려도 보았다. 그는 아이 손에 붙은 무당벌레 같았다. 그는 조바심이 났다. 다시 한번 아이에게 말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혼돈과 긴장으로 이미 지쳐있었지만 온 힘을 모아 아이를 향해 소리쳤다. 아이의 얼굴과 더 가까우니 훨씬 더 전달하기가 쉬울 것 같았다.
엄마한테, 가! 밖으로!
갑자기 튀어나온 커다란 소리에 아이가 화들짝 놀라며 제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바람에 그는 아이의 손밖으로 내던져졌고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변기 속으로 떨어졌다. 무당벌레가 아닌 그는 날 수가 없었다. 입수 충격은 다행히 감당할 만했지만 매끄러운 변기 벽을 맨몸으로 타고 오를 수는 없었다. 몇 번을 발버둥 쳤지만 다시 물속으로 꼬꾸라졌다. 그는 계속 소리쳤다. 아빠야, 아빠! 아빠를 구해줘! 다행히도 아이들은 쉽게 잊는다. 놀람을 떨쳐내고 일어난 아이는 놓쳐버린 레고 인형을 다시 찾았고 변기 속에서 허우적대며 질러대는 그의 소리를 들었다. 아빠야, 아빠! 아빠를 구해, 줘! 수영을 못 하는 그에게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자맥질을 하며 몇 번을 더 소리쳤지만 그 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기운이 빠져나갔고, 몸이 차가워져만 갔다. 그는 그제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끝이라는 것을. 그게 꿈이라면 꿈의 끝에서 이제 깨어나게 될 것이었고, 꿈이 아니라면, 아니 그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꿈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람이 레고 인형만큼 작아지는 일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게 그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점점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 마침내 그는 모든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 나는 또 늘 있던 대로의 나로 돌아가야 해. 이렇게 반나절의 일탈도 나는 견딜 수 없는 나약한 사람일 뿐이야. 그래, 그래. 하지만 이게 나지. 이런 게 내 모습인 걸 어떻게 하겠어? 쓸데없는 자존심 세우면서, 뭐라도 싸워서 얻어내면서, 꼭 그렇게 살지 않아도 좋잖아? 그냥 나 생긴 대로 천천히 숨 쉬면서 걸어가 보는 거지.
그의 마음에 급작스런 평안이 깃들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날숨을 내쉬었다. 그의 의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암전,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어둠만이 남았다.
그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아이는 가만히 변기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얼굴에 불안한 표정과 심술궂은 표정이 교차했지만 대부분은 새롭고 신기한 장면을 발견한 듯 호기심 넘치는 미소였다. 하지만 재미있게 지켜보던 레고 인형이 더 움직이지 않자 아이는 큰 결심을 한 듯 단호한 얼굴을 하고 한 발짝을 내디뎠다. 아이는 변기 레버를 향해 억지로 팔을 뻗었다. 용을 쓰는 얼굴이 빨개졌다. 겨우 손이 닿자 아이는 작고 통통한 손가락에 힘을 모아 레버를 당겼다. 움직임을 멈춘 평범한 레고 인형은 소용돌이를 타고 돌며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완벽한 싱크 컨디션이었다.
(2019 『약사문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