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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가 갈 것이다, 한국에서.
이미 어둑해진 브리즈번의 저녁. 우현이는 침대에 엎드린 채 벌써 몇 번이나 고쳐 쓴 에세이를 한 번 더 보고 있을 것이다. 엄마가 없는 틈에 온라인 게임에 빠진 형에게 전화를 받으라 소리치겠지만, 짜증 섞인 대꾸도 듣지 못하고 거실로 나와 직접 받게 되겠지.
“헬로?”
“여보세요? 혹시 차준환 씨 가족 되세요? 여기 한국, 의성경찰섭니다.”
“네. 우리 대디 이름이에요, 차… 준환.”
“아, 대디? 거기 혹시, 어른 안 계시니?”
“예 암, 마미는 지금 안 왔고, 스티븐하고 저밖에 없어요.”
“스티븐? 스티븐은 누구야?”
“브라더, 형.”
“형은 몇 살이지?”
“삡띤.”
“피프틴? 열다섯? 그럼 형은 됐고 혹시 아버지 주민등록번호 찾을 수 있으면 좀 불러봐 줄래?”
“주민 왓? 저스터 모… 잠깐만. 돈 행 업. 스티븐! 스티븐! 어 폰 콜 프롬 코리아! 텔링 어바웃 대디!”
탁, 하고 수화기가 탁자 위에 놓이고, 기다리다 못한 아이가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소리를 들으며 한국의 젊은 경찰은 짜증 섞인 혼잣말을 하겠지.
“우리말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고, 뭐 이래? 어쨌거나 빨리빨리 찾아라. 이거 국제전화란 말이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아이들은 저희 유학 서류에서 내 주민번호를 찾아 불러줄 수 있을 것이다. 연륜 있는 형사라면, 전화 너머 앳된 목소리에 대고 용건을 해결하는 대신 응답이 없었던 아내의 핸드폰으로 다시 해 보겠지. 이유도 모른 채 불안할 아이들은, 쉽지 않을, 하지만 길지 않을 설명과 함께 엄마에게서 듣게 될 것이다. 한국에 다녀와야 한다고.
그런 뒤에는, 어떨까. 큰 슬픔에 빠질지 막연한 불안 뒤의 평온함이 찾아올지, 나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우현이는 학교를 빠지는 게 싫을 테고, 아내는 당장의 귀국 경비와 생활에 닥칠 어려움을 걱정하겠지. 그래도 한동안은, 보험금으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나에 대한 연민도 있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건, 슬픔보다는 불만에 가깝지 않을까. 우람이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맏이이고 나와의 추억이 더 많으니 그래도 조금 더 감정의 동요를 갖게 될지.
상실감. 어쨌든 그 비슷한 걸, 그리 길지는 않겠지만, 각자 조금씩은 갖게 될 것이다. 끔찍이 소중하지는 않았어도 확실히 내 것이라 여기던 것이 사라진 뒤 마주하는 아쉬움. 그런 게 전혀 없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남은 사람들이, 특히 아이들이 그런 감정을 오래 간직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슬프고 힘든 기억은 짧을수록 좋다. 즐겁고 좋았던 순간만, 숨겨둔 보석처럼 가슴속 어딘가에 남아 빛나면 족하다. 자주 꺼내 추억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때가 없기를 바라지만,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쓰러질 것 같을 때가 온다면, 그 빛이 조금이라도 더 버텨낼 힘이 되어줄 수 있을 테니.
그러나 어쨌든, 통보는 간단할 것이다.
“차준환 씨가 사망하셨습니다.”
-1
오한이 심했다. 서랍을 뒤져 체온계를 찾았다. 40.3℃, 띠띠띠띠. 디지털 체온계는 숫자를 점멸하며 작지만 날카로운 경고음을 냈다. 감정이라고는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너 지금 큰일 났어.’ 하는 것 같았다. 체온계를 협탁에 던지고 널브러진 생수병에 남은 물을 몇 모금 마셨다.
사실 그 말은 머릿속에서 계속 메아리치고 있었다. 너 지금 큰일 났어! 어떻게 좀 해 봐! 그냥 있다가는 정말 무슨 일이 날 것 같았다.
몇 시나 됐을까? 이불속에서 팔만 뻗어 머리맡의 리모컨을 찾아 눌렀다. 한복을 입은 아나운서는 거리두기 해제 후 첫 명절 풍경을 전했다. 고향집에서 요양병원에서, 사람들은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환한 웃음이 마스크 너머까지 번졌다. 늘 그 타령인 정치, 경제 소식 몇 개를 더 전하고 정오 뉴스가 끝났다. 가슴 깊은 곳에서 참을 수 없는 기침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컹, 컹! 열이 가득한 머리에 소리만큼 큰 섬광이 터지는 것 같았다.
때 이른 패딩 점퍼까지 꺼내 입었지만 운전하는 내내 몸을 떨었다. 참으려 해도 딱딱,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났다. 119에 확인한 당번 약국은 차로 10분쯤 거리였다. 우선 약을 사 먹고 버텨야 했다. 병원은 응급실 말고는 하는 데가 멀었고, 가 봐야 대기 시간에 지치고 어설픈 진료에 수액만 맞고 누웠다 오게 될 텐데, 거기에 달아날 몇만 원도 부담스러웠다. 입원할 만큼 심하다면 몰라도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아니어야 했다.
명절 거리는 한산했다. 연휴가 끝나면 도시는 다시 복작거리겠지만, 공장은 알 수 없었다. 일주일쯤 쉬다 오라고 한 말이 폐업선언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직원들도 이미 눈치챘을지 모른다. 일단 돌아오는 어음을 막아야 했다. 나중이라고 대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떡하든 당장 급한 불은 꺼야 했다. 보험은 거의 다 해약했다. 금리는 치솟는데, 고이율로도 대출을 해준다는 데가 없었다. 코로나가 끝나기도 전에 기름값이 먼저 뛰었고 덩달아 원자재가 폭등했다. 거래처에 미수금이 깔려 있었지만, 그게 얼마든 부도가 나면 다 날아갈 돈이었다.
퇴직금이 남은 김 부장이나 박 대리는 몰라도 그런 것도 없는 응우엔이나 뚜 같은 친구들은 말도 없이 그만둘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러는 게 고맙겠지. 전별금도 못 주는 마당에 얼굴 보고 헤어지면 불편하기만 할 텐데. 다들 눈치는 있으니 나름대로 살 궁리를 하겠지만, 불법체류라 일자리 찾기가 간단치 않을 터였다. 그런 생각에 미안하다가, 쓰게 웃었다. 남 걱정이라니.
“약 드시고, 물수건으로 몸을 계속 닦으세요. 기침보다 열이 문제예요. 계속 이렇게 열이 높으면 응급실이라도 가야 합니다.”
약사의 말을 듣는 동안에도 눈과 볼이 불에 댄 듯 뜨거웠고, 거칠고 끈끈한 날숨이 마스크 안쪽을 채웠다.
약국 옆 편의점에서 죽 캔과 컵라면을 하나씩 샀다. 식당은 하는 데가 없을 터였다.
집에 오자마자 빈속에 약을 털어 넣었다. 부어오른 목을 긁으며 약이 넘어갔다. 뭐라도 당장은 못 삼킬 것 같았다. 띠띠띠띠. 아까와 똑같은 체온계의 경고음. 허물을 벗듯 옷에서 몸을 빼내고 욕실로 허적허적 들어갔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온수가 얼음 바늘 같았다. 샤워는 포기하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천천히 차오르던 물이 적당한 높이가 됐을 때 그 안에 들어가 눈을 감았고, 그대로 늘어졌다.
한참 만에 잠인지 죽음인지 모를 곳에서 빠져나왔다. 허기가 있고 한기가 사라진 거로 봐서 열은 좀 내린 것 같았다. 거실로 나오니 창밖은 벌써 어둑했다. 성근 구름 사이로 보름달이 보였다.
빌어볼 소원이야 한둘이 아니었다. 공장도 그렇고, 형님네 형편도. 무엇보다 이런 명절날 가족이 함께 있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했다.
“그렇게 갔다 와 봐야 뭐 다를 거 있어? 괜히 가서 힘든 것만 보고 오느니 비행깃값이라도 아끼는 게 나아!”
아내의 단호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자꾸 맴돌았다. 얘기를 듣던 당장은 대꾸를 못 했지만 지날수록 화가 울컥 솟았다. 세 명 항공료로 몇백, 당연히 적은 돈이 아니지만, 원래부터 다녀갈 마음이 없었으면서 그걸 핑계 삼는 게 빤히 보였다. 그런데도 뭐라 할 수 없었다. 어쨌든, 형편이 어려워진 건 내 책임이었다. 나는 미안했고, 초라했다.
송금 액수는 주는데 환율은 계속 올랐다. 통화 때마다, 다 그만두고 들어오라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소모적인 언쟁은 피하고 싶었다. 여기서 가는 게 정 모자라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할 테니까. 하지만 한인교회에서 소개한 마트에 캐셔를 본다는 말을 듣고서야 아내도 이미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공장, 정 살리기 어려우면, 당신도 여기로 와. 한국이나 여기나 똑같이 힘들면 아이들 편한 데서 같이 고생하는 게 낫잖아.”
확실한 기술이 있으면 더 좋지만, 우선은 배우자 비자가 나올 거라고. 하고 싶다고 무한정 일할 수는 없어도, 인건비가 높으니 둘이서 벌면 네 식구는 살아질 거라고. 좀 지나면 한국에서처럼 일에 떠밀리지 않아도 될 거고, 그러다 보면 애들은 더 잘 돼 있을 거라고.
어쨌든 돌아오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무시하고 싶었다. 그동안의 내 발버둥에 대해 아내가 그랬듯이. 아내는 너무도 간단히, 내가 힘들게 지켜온 것들의 끝에 대해 말했다. 백번 양보해서, 그게 합리적 대안이라 해도, 솔직히 나로서는, 자신이 없었다. 말처럼 쉽기만 하다면 뭐가 고민이겠나? 그냥 말대로 하면 되는 거지. 다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닌데, 그 속에 우리가 모르는 어려움은 한둘이 아닐 텐데. 당장 그렇게 먹고는 산다 해도,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일이 어찌 그리 간단할 수 있나? 가족 전부의 삶이 걸린 일을 상의도 없이 혼자 결정하고 통보할 거면, 나는 대체 뭐란 말인가?
전자레인지에 데운 죽을 억지로 삼키고 또 약을 먹었다.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약 먹던 컵에 가득 따랐다. 베란다 창으로 달빛이 가득 비쳐 들었다. 거기, 달도 혼자였다.
두어 모금에 소주를 다 삼켰다. 목부터 발끝까지 일순간 퍼져나가는 전율이 저릿했다. 몸은 여전히 정상이 아니었지만, 술이 주는 위안이 있었다. 스스로를 학대하여 내가 나의 주인임을 드러내는, 가장 못났지만 확실한 방법. 한 병을 더 꺼냈다. 그래도 그냥은 안 되겠다 싶어서 물을 끓이고 컵라면을 뜯었다.
술은 마음을 단단하게도 하고 풀어놓기도 한다. 약하게도 하지만 용감하게도 한다. 내 속에서 이 정반대의 것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나는 죽을 만큼 허무하면서도 악착같이 따져 묻고도 싶었다.
브리즈번에 전화를 걸었다. 텔레비전에서는 귀경차량이 밀려드는 고속도로 요금소를 배경으로 9시 뉴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2
추석이 코앞인데 마음만 바빴다.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던 월급쟁이 때가 그립기도 했다. 사장이 되고 보니, 경기 안 좋을 때 명절은 가난한 집에 닥치는 제사 같았다.
납품처마다 일찌감치 명절 인사를 했다. 매년 하는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결제를 더 받아 숨통이나 트려고 더 서둘렀다. 코로나가 가져온 호황은 잠깐이었다. 더 이상 일회용 포장용기만으로는 어려웠다. 비슷한 걸 만드는 데도 많아졌고 수입량도 늘었는데 일상이 회복될수록 음식 배달은 점점 줄었다. 돌아가는 사정을 대충은 짐작해서 진즉에 상여금은 포기했을 직원들도 월급까지 빠듯한지는 모를 터였다. 떡값이라도 조금씩 쥐여 고향에 보내고 싶었다. 월급쟁이에게 그 하나 있고 없는 차이가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래서 기꺼이, 거래처마다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사정하고 부탁했다. 명색이 사장이지만, 영업사원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나마 아이들을 만날 생각으로 버텼다. 이번에는 잠깐이라도 들어온다고 했다. 삼 년만이었다. 코로나 유행 전 크리스마스에 본 뒤로 하늘길도 국경도 봉쇄되다시피 해서 방법이 없었다. 조금 풀렸던 지난여름에는 아이들이 현지 스케줄로 바빠서 들어오지 못했다. 화상으로야 자주 통화했어도 부쩍 자란 모습을 실제로 볼 생각에 절로 힘이 났다.
“내 배로 낳은 놈들만 새낀가? 우리 공장에 밥줄 걸고 있는 사람들 다 내 새낀데, 그 생각하면 요새 잠이 안 와.”
이웃 공장도 경기 악화의 타격을 피하지 못했다. 종종 어울리던 사장은 나를 막냇동생처럼 대해주던 분이었다.
얼굴이 상했다는 염려에 반농담으로, 공장 망해도 자식들 시집 장가 다 보낸 형님은 걱정이 없겠다고 했다가 정색하는 대답에 면목이 없었다. 당신 자식들이 우리 애들만 할 때로 돌아갈 수 있으면 가진 거 다 줘도 아깝지 않다고 하던 그이는, 몸 생각 좀 하라고, 맨날 일 생각뿐이니 무슨 재미로 사냐는 핀잔을 덧붙였다. 가볍게 던졌을 말에 심경이 복잡했다. 그럴 수 있으면 그랬겠지요. 제가 달리 뭘 어쩌겠어요.
한때는, 내가 저 나이쯤 되면 우리 가족은 그 집보다 더 잘되어 있을 거란 자만 가득한 희망을 품었었다. 한눈 안 팔고 성실히만 계속하면 될 줄 알았다. 아직 혼자인 게 힘들지 않던 때, 사는 게 쳇바퀴 같지 않을 때였다.
“기러기는 무슨, 다시 총각 된 거지. 부럽다!”
실없는 소리는 대꾸도 없이 웃어넘겼다. 속마음 얘기해 봐야 진심으로 듣고 공감해 줄 사람 많지 않았다.
사실, 홀가분한 면도 있었다. 늦도록 술자리를 하고 주말 내내 소파에서 뒹굴기도 했다. 잔소리도 없고, 눈치 줄 사람도 없이, 그저 나 하나 불편하지 않으면 되는 날들. 하지만 그것도 처음 잠깐이었다. 이상하게도 저녁 약속은 점점 줄었고, 집은 전보다 더 깔끔해졌다. 저쪽 살림에 보태려 집을 줄인 덕도 있지만, 혼자 살아보니 내 흔적만 바로바로 치우고 쌓이는 먼지만 간간이 청소해 주면 모델하우스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건 결국 쓸쓸함이었다. 잔소리와 참견, 사소한 부딪힘과 함께 표정만으로 주고받던 교감도 사라졌다.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던 소소한 격려 같은 게 없으니, 더는 증명해 보일 것도, 확인받아야 할 것도 없었다. 인정과 응원이 그리웠다. 그냥, 가족이라 부르던 관계가 증발해 버렸다.
직원들 퇴근 후에도 공장에서 미적거렸다. 공장을 나오면 곧바로 귀가했다. 내가 책임질 사람은 여전하지만 나를 챙겨줄 사람은 없으니 일상이 조심스러웠다. 한번 흐트러지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혼자서는 뭘 하든 재미가 없었다. 의미가 없었다. 점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게 되었다.
애틋함이 커지진 않았느냐고? 물론 처음엔 그랬다. 그렇지만 가장의 여러 역할 중에 경제적인 것 말고는 모두 잘려 나가고 남은 그 하나의 무게감만 몇 배가 된 상황이 계속되면서, 마음은 점점 삭막해졌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저쪽은 다 무너질 수 있다는 긴장이 다른 모든 걸 압도했다.
아이들이 함께 있었다면 좋은 아빠였을까? 모르겠다. 다들 그러듯 각자의 세상에서 서로를 멀찍이 바라만 보면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이 되고, 나는 나대로 늙어가게 될지도 모르지. 이미 저 나름의 고집이 생긴 사춘기 남자애 둘을 혼자서 건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을 텐데. 함께였다면, 내가 힘이 되었을까?
둘이 고생하는 만큼 아이들은 편할 수 있다는 아내의 말을 위안 삼았다. 아니, 가장 힘든 건 애들일지도 몰랐다. 새로운 환경에서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방식에 적응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여러 생각이 들 때마다, 아내 말이 맞다는 결론을 내려 애썼다. 몇 해 전 여름 브리즈번에서 보았던 아이들과 아내의 표정, 한국에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그 얼굴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일 거라고.
못 온다는 연락이 온 건 연휴 일주일 전이었다. 그간 공장 사정은 더 나빠졌다. 주거래처 한 곳이 도산했다.
전화기 너머의 아내는 시종 싸늘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려니 했다. 연금보험을 깨야 할지도 모른다고 얘기하려다 말았다. 걱정의 무게를 보태고 싶지 않았다. 노후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갖고 있자 했던 것이었지만 어쨌든, 직원들 급여는 맞춰야 했다.
빤히 아는 형편이지만 그래도 비빌 데가 거기뿐이라 형에게도 갔다. 말없이 한숨 가득한 담배 연기만 내뱉는 형 옆에서, 남편의 망설임을 무지르며 형수가 나섰다. 빠듯한 수입과 적지 않은 조카들 학비에 대한 넋두리, 모르지 않는 이야기들. 하나 있는 집마저 위험하게 할 수 없으니 더는 담보든 보증이든 안 된다고. 뭐라고 대꾸를 못 하는 사이에, 형수는 시어른들 제사 때도 연락 한번 없는 손아래 동서에 대한 섭섭함을 보탰다.
어떻게든 될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 했다. 급한 주문 건이 있어서 추석에 못 온다는 거짓말도 했다. 일부러 조금 웃어 보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형수는 그렇게 바쁜데 돈은 왜 안 돌아가냐고 했고, 형은 어려운 마당에 일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명절 전에 얼굴 봤으니 됐다고 했다. 대문까지 나와 인사하는 예의 바른 조카의 손에, 지갑에 남은 오만 원을 쥐여 주었다.
따라 나온 형이 물었다.
“이번 추석에는 애들하고 제수씨 들어오니?”
뭐라고 대답을 못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몸부터 챙겨라. 가족들 떨어져 있을수록 알아서 더 잘 챙겨야 해.”
몇 개비 남지 않은 담배를 꺼내는 형의 목소리도 힘이 없었다.
-3
아내는 가벼웠다. 표정에서, 분위기에서 알 수 있었다. 아내에게서 느껴지는, 뭐라도 크게 안달하지 않는 여유, 그게 곧 행복이라 생각했다. 그 안에 내 공도 있다 싶어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정식 입학에 필요한 랭귀지 코스를 반년이나 앞당겨 마쳤고, 우현이의 아토피도 몰라보게 좋아졌다. 우람이 생일에 맞춘 일주일의 휴가, 짧기만 한 브리즈번의 8월이었다.
렌트한 집에서는 바다가 멀지 않았다. 우리는 인적 드문 해변의 고운 모래 위를 함께 거닐었다. 서로의 어깨와 허리를 감싸 안았고, 남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은 우리 가족의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응원 같았다.
저녁이면 현지 마켓에서 구한 재료로 한식과 양식이 섞인 식탁을 차렸다. 우리는 함께 둘러앉아 장난치며 웃고 먹고 떠들었다. 아내가 맞았는데 내가 괜한 반대를 했구나. 한국에서 간간이 느끼는 공허감은 뭐든 감상적으로만 보는 내 못난 습관 때문이구나. 나는 반성했다.
텔레비전 볼 시간도 없었다. 아이들은 잠시도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아이들은 한국을 떠나고 처음으로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을 만끽했다. 랭귀지 스쿨에서 받은 상장 자랑, 호주에서 찍은 사진들과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 때론 엄마의 엄격함에 대해 밉지 않은 불만이나 험담도 몰래 나누면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냈다. 시간이 너무도 빨리 지났다.
현지 기념품점에서 있었던 일이다. 원주민 악기 디저리두를 불어보려는 아내를 점원이 제지하고는 오히려 내게 해보라며 건넸다. 황당해하는 제 엄마에게 우현이가 설명했다. 여자는 불면 안 된다고, 아이를 못 갖게 된다고. 그 순간 우리는 디저리두 같은 건 완전히 잊어버렸다. 점원의 그 빠른, 우리는 못 알아들은 말을 아들이 알아들었다는 사실이 중요했으니까.
애들을 재운 뒤 집 앞 포치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차가운 맥주를 한 병씩 들고 있었다.
하나도 안 힘든다면 거짓말이라며 아내는 웃었다. 애는 쓰는데, 아직은 실수투성이라고. 사람들 다 좋지만 분명 한국 같지는 않고, 인종차별도 있어서 늘 긴장하고 있다고. 그래도 그런 것쯤 금방 익숙해질 거고 아이들과 자기는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고, 아내는 그랬다. 아이들이 좋으면 다 괜찮다고.
아내는 아이들의 일취월장에, 자기 계획이 틀린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자기도 불안했다고, 최선이라고 생각은 했어도 결과가 나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고. 한 번도 티를 내지 않아서 그런대로 잘 해내고 있다고만 여겼는데, 눈시울까지 붉어진 아내가 안쓰럽고 대견했다.
아내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칭찬이나 격려, 감사의 말이든, 다른 뭐라도. 꼭 안아주거나 업고 동네 한 바퀴를 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내에게 힘을 줄 수 있다면.
“고마워.”
내가 할 말을 아내가 먼저 했다.
그때 알았다. 아내는 힘들지만 행복하구나. 힘든 만큼 행복하구나. 나도 한국에서 그래야겠구나. 애쓰는 만큼 행복할 수 있겠구나.
“잘해 왔잖아, 당신은 지금처럼 잘 해낼 거야. 당신이 이렇게 다부지게 있으니 아이들도 잘 따라오겠지.”
나는 한껏 고무되었다.
“나는, 당신, 믿어! 내가 한국에서 열심히 벌어서 보낼게, 아무 걱정 마!”
다음 학기에 우람이는 6학년, 우현이는 2학년으로 호주 초등학교에 가게 될 거였다. 작은놈 기준으로 앞으로 15년, 죽었다고 생각하고 일만 하자. 그러면 아이들은 제대로 된 길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그때가 돼서, 우리도 여유를 좀 찾으면 될 거다. 환하게 웃는 아내를 보며, 나도 마음을 다잡았다.
-4
정말 될까 싶었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공장을 인수한 건 잘한 일이었다. 가라앉는 배를 버리듯 다른 데를 알아봤더라면, 운 좋게 이직이 됐어도 계속 고만고만한 형편이었을 게 뻔했다.
말이 좋아 부장이었지 자판기 커피 한잔할 여유도 없이 매일 거래처를 뛰었다. 주행 거리가 한해 8만에 가까웠다. 그나마 공장에 돌아와서는 많지도 않은 기술자를 도와 설비와 한 몸으로 붙어있었다. 아무리 녹초가 돼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날들이었다. 둘째가 생기고는 치킨 한 마리 시키기도 부담스러워하는 아내에게 내내 미안했었다.
처음엔 사장의 제안이 농담인 줄 알았다. 매출이 점점 줄긴 했어도 그만하면 나쁜 편이 아니었으므로 누가 나서도 나설만한 공장이었다. 결정을 못 하고 있을 때, 아내는 해보자고 했다. 어차피 이 공장에 대해 생산부터 영업까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당신이니 못할 건 없지 않으냐고. 일회용품 규제는 더 심해지겠지만 1인 가구가 늘면서 당분간은 수요가 많을 거라는 판단도 보탰다.
집을 사려고 모으던 돈에 가능한 대출 다 끌어모으고 형님께도 손을 벌려 부장에서 사장이 되었다. 직접 다니던 기존 거래처를 잘 지켰고 경기까지 좋아지면서 주문이 몰려들었다. 일 년이 안 되어 더 좋은 조건의 대출로 바꾸고 형님께 빌린 돈도 갚았다. 꼬박꼬박 이자도 드리고 그간 무심했던 조카들 용돈도 주기 시작하자 형수의 표정에 일말의 불안은 남았어도 불만은 없어졌다. 한동안은 월급쟁이 때보다 더 바빴지만, 공장이 제 궤도에 오르고 벌이도 몇 배가 되니 고된 줄도 몰랐다.
작은 평수이기는 해도 다세대 주택을 떠나 새 아파트로 옮겼다. 먹는 거, 입는 거 더 비싸고 좋은 걸로 바꿨다. 아이들 학원도 몇 개씩 늘었다. 과하거나 쓸데없다고, 알아도 모른 척하던 학원들이었다. 아내도 새로운 부류의 학부모들을 만났고 그들과 나누는 얘기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환경이 넉넉해진 만큼 마음도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전보다 좋은 것을 샀는데도 그보다 더 좋은 게 보였다. 나도 아내도 천성이 소박해서 적당히 절제하긴 했지만, 가끔은 아예 어려울 때보다 더 큰 박탈감이 들었다. 더 좋은 차, 더 큰 집, 더 좋은 동네….
내가 집을 늘려 옮기자고 했을 때, 아내는 아이들 유학 얘기를 꺼냈다.
이제는 우리도 그럴 수 있다고, 하루라도 더 늦기 전에 보내야 한다고. 공장 잘 꾸려간다 해도 물려줄 만한 정도는 못될 테고, 애들 각자 제힘으로 미래를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모양으로는 우리나라 시스템에서 치고 나갈 수 없을 게 빤하다고. 우리 애들은 우리보다 더 나아야 하지 않겠냐고. 남들이랑 똑같이 해서는 훨씬 앞에서 출발한 다른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가능성을 확 올려줄 기회가 필요하다고.
주변에서 떠드니까 괜한 헛바람으로 그러는 거 아니냐고 아내를 다그쳤다. 가족이 떨어질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자 자동차 정비든 청소든 함께 가서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아이들의 마음이 중요했지만, 열두 살과 여덟 살에게 판단을 맡길 수는 없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학교 보내고 키우면 안 되냐고 했더니 아내는, 남들 다 하는 대로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더 큰 세상을 경험하게 해 주면 좋지 않겠냐고 했다. 아내와 내가 아는 남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아내는 다른 세상에 있었다.
아내가 아는 그들은 조금이라도 일찍 영어의 바다에서 아이들을 헤엄치게 하기 위해 당장 소중한 많은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다. 식구가 둘러앉은 단란한 저녁 식사나 주말 개그프로에 다 같이 넋을 놓고 박장대소하는 따위의 것. 소소한 잘못에는 짐짓 엄하게 야단치지만, 감당이 힘든 큰 허물 앞에서는 누구보다 감싸고 보듬어 역성을 들어주는 마음 같은 것. 내게는 훨씬 소중한 것들이었다.
나도 우현이의 아토피는 마음에 걸렸다.
가려워서 긁고 짓무른 데가 아파서 뒤척이느라 단 몇 시간도 곤히 잠들지 못하는 우현이와 함께 아내도 많은 밤을 지새웠다. 잘 본다는 피부과와 한의원, 약국을 섭렵한 경험과 인터넷에서 얻은 지식으로 아토피라면 논문 몇 개는 쓸 정도였지만 정작 아이는 별 차도가 없었다. 최후의 수단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었다. 실제로, 아내의 사촌이 있는 퍼스에 보름쯤 머물렀을 때, 우현이는 약을 반으로 줄이고도 편안해했다. 찡그림 없이 몇 시간이나 하고 싶은 놀이에 집중하는 모습은 아토피가 시작된 돌 즈음 후로 처음이었다. 우현이의 표정보다 아내의 마음이 더 펴졌을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더, 호주로 보내고 싶어 했다.
곧잘 하던 우람이도 학년이 오를수록 등수가 쳐졌다. 우리나라 같은 무한 경쟁 시스템에서는 애들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도 우리만큼도 되기 힘들다는 것이 아내 말의 요지였다. 우리가 이미 겪어서 알지 않냐고. 입시도, 취업도 경쟁 또 경쟁. 어찌어찌 그거 통과해도 점점 힘들기만 하지 여유라는 게 있냐고. 우리가 기업 하나 물려줄 만큼은 못 돼도 좋은 환경에서 뿌리내리게 도와줄 능력은 되지 않느냐고.
“공장을 인수해 봐서 당신도 알잖아, 여보? 큰 결실을 얻으려면 약간의 모험은 필요한 거야. 내 선택이 언제 틀린 적 있었어? 당신 골라서 결혼한 거 봐. 나 촉 좋은 여자야.”
결혼기념일 저녁 둘만의 데이트였다. 우리는 둘 다 조금 들떴다. 불안했지만 그만큼 더 희망에 부풀었던 결혼 전처럼, 우리는 오랜만에 생각 없이 즐거웠다.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일 때는 없었던 애교도 넘쳤다. 표정과 눈빛, 아내를 감싼 분위기까지, 우리 앞에 놓인 밝은 미래에 대한 아내의 확신을 웅변하고 있었다. 오래 고민했던 일이니 순전히 그 이유 때문이랄 수는 없지만, 나는 그날 아이들의 유학에 동의했다.
일단 결정되자, 진행은 일사천리였다. 처가 쪽 친척이 있는 호주로 정하는 건 쉬웠다. 호주 안에서도 어디로, 어떤 형태로 할 것인가도 간단치는 않았으나 아내의 선택은 시원시원했다. 처음에는 나도 아내가 가져오는 여러 안내서와 인터넷 사이트를 꼼꼼히 살폈지만, 아내의 결정은 매번 일리가 있었으므로 점점 아내에게 모든 걸 맡기고 그저 옆에서 응원하는 입장이 되었다. 나는 내키지도 않고 잘하지도 못하는 일을 척척 해내는 아내가 진심으로 고맙고 대견했다.
나라고 구경만 한 건 아니었다. 막상 닥쳐보니 이미 여러 번 계산기를 두드려 본 것과는 달랐다. 환율도 달라졌고, 아내가 동반하기로 하면서 경비가 늘었다. 아무래도 아이들만 보내는 것보다는 내가 혼자 남는 게 나았다. 돈, 그리고 기꺼이 혼자가 될 각오, 그게 나의 몫이었다.
돈이 들더라도 기왕이면 안전하고 편한 곳으로 하라고 했다. 어떻게든, 더 열심히 뛰다 보면, 그런 정도는 더 벌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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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바람에 벼 이삭이 흔들린다. 추석이 지났다고, 제법 서늘하다. 이미 황금빛인데도 추수를 끝낸 논은 없다. 아직은, 따가운 한낮 햇살이 더 필요하리라. 해는 곧 넘어갈 것이다. 서편 하늘이 붉다.
명당을 찾느라 수년간 발품을 팔았다고 했다. 당신 누울 자리에 그리 공을 들인 할아버지도 저 노을에 반한 걸까? 좋은 풍광 아랫대까지 보여주려고 이리 넉넉한 곳을 정하셨겠지.
아버지, 어머니, 보고 계시지요? 하늘은 온통 붉고 노란 황혼인데 산자락에 이는 소슬바람이 새들을 재촉하네요. 어서 제집들 찾아가라고. 저 나락 다 거둬들이고 나면 두 분도 참 쓸쓸하시겠어요. 갈잎도 다 떨어지고 내년 봄 새 움이 틀 때까지 또 어떻게 지내실지.
산 아래 가게에서 소주를 샀다. 잔도 없이, 부모님 함께 누워계신 묏등에 세 번 드리고 나머지는 내가 다 마셨다. 달래려는 건지, 더 후벼 파려는 건지, 나도 내 속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쓴 소주만 씹어 삼켰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제 급할 건 아무것도 없다.
어둠이 짙어진다. 취기가 오른 두 볼에 스치는 바람이 차다. 숨을 크게 들이쉬니 아직도 다 낫지 않은 기침이 연달아 터진다. 두 손으로 몇 번,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린다. 이내 속 깊은 곳에서 트림인지 한숨인지 모를 무언가가 역한 냄새와 함께 터져 나온다. 끄으, 으, 후, 아….
추석날 밤, 아내는 끝내 아이들과의 통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미 잠들었다 했다. 깨우라 했지만,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안 그래도 여기 애들보다 작은데, 잠이라도 제대로 자야지. 술 취한 아빠하고 통화하면 애들만 힘들어. 술 깨고 해.”
형님댁에 다녀왔는지, 아내는 건조하게 물었다. 그랬다고, 거짓말을 했다. 직접 보지도 못한 차례상이나 명절 풍경은 보태지 않았다. 아내의 안심을 지켜주는 수고를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명절 호들갑과 그만큼 깊은 남편의 절망은 브리즈번의 평온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할 테니까.
아내에게 할 말이 있었지만, 전화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아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많았으나, 허락 없이는 할 수 없었다. 씩씩하고 당당하게 살아라, 아빠가 늘 응원하고 믿는다. 아빤 언제나 너희들 편이다. 엄마 말 잘 들어라…….
통화가 되었어도, 꼭 그렇게 말하진 못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예민했던 우람이는 평소와 다른 아빠를 알아챌지도 몰랐으니까.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그저 애들 목소리만 듣고 있었겠지.
결국, 아내가 나보다 훨씬 더 간절했던 거다. 모든 걸 다 걸어 아이들을 지켜내려는 간절함. 아니면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자기 확신에 대한 간절함. 뭐가 됐든, 어느 면에서든, 나는 모자랐다.
얼마 못 보냈다고, 힘들어도 기운 내라고, 낮에 다시 전화하겠다고 하면서, 나는 웃었다.
투정 부리려던 게 아니었으니 어떻게든 나를 붙잡아 달라고 보챌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아내의 단호함 앞에 서글픔은 곱절이 되었다. 처음부터 마지막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지만, 통화를 하면서, 그다음 일들을 나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비겁하게도 나는,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다. 분명히, 무던히 살아가는 것에 비해, 지금 나의 선택은 비겁한 일이다. 그래도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저 절망의 끝, 아무 기대도 걸어볼 수 없는 상황들이 모여드는 종착역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마음만 가득했을 뿐이다. 내가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어쩌면, 어떤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고,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나는 거기에 저항 없이 수긍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다. 그래, 변명이다. 그러나 결국, 막연했던 예상대로 나는 지금 여기, 부모님 계신 묏등에 기대앉아 석양을 바라보고 있다.
다시 아내에게 전화하려다, 만다. 핸드폰 배경 화면 속 아이들과 아내의 웃음이 밝다. 반갑고, 고맙다.
사진을 더 넘겨본다. 브리즈번에서 최근에 보내온 사진들. 아이들은 둘 다 한껏 들떴고, 웃고, 즐겁다. 일부러 그런 사진을 골라서 보냈겠지만, 분명 여기보다는 더 자유로울 것이다.
어느새 아이들이 유학을 떠나던 날 출국장에서의 사진이다. 제 엄마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한 명씩. 각자 배낭을 멨고, 아내는 꽤 큰 크로스백을 멨다. 우람이와 아내의 얼굴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돌지만, 우현이는 마냥 천진하게 브이를 그리고 있다. 그 뒤로 더 옛날 사진이 이어진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나. 아장거리던 아이들이 이제 나보다 더 크다.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지난 일들은 다 그립고, 아련해서 아름답다. 지금도, 손톱만큼의 희망도 없는 지금도, 어떻게든 지나고 나면 괜찮아 보일까? 먼 훗날에는 예쁘게 윤색될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훗날이 있기만 하다면.
사진에, 나는 없다. 거의 내가 찍었으니까. 호주 사진에도 아내는 없고 아이들뿐이라 다행히, 아내와 내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은 보지 않아도 된다.
새 병을 열어 산소에 한 번 더 붓고 앉으니, 부모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걱정 말그라, 다 잘 될 끼다, 그기 뭔 큰일이라고 이카고 있노….
음복인 양 몇 모금 삼키고는 속으로 대답도 했다.
그 사람, 자기 잘 되자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다 새끼들 잘되라고 하는 일이에요. 두 분도 아시죠? 뭐 대단한 인물 되기야 하겠습니까만, 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남들보다 나으면 뭐 하고 처지면 어때요? 원하는 거 하고 살면 되는 거지. 전 그래서 그 사람 안 말렸어요. 애들이 아빠 보고 싶고 한국 오고 싶다면 데려와야지요. 하지만 지금은 거기가 좋은가 봐요. 낯선 데서 잘하는 거 대견하지요? 너무 걱정 마세요. 그래도 저희 뿌리가 어딘지는 잊지 않겠지요.
들리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선영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이야기한다. 취기 때문인지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끈해지지만 거기까지다. 아버지 앞에서는 안 된다. 하소연이나 넋두리는 몰라도, 듬성듬성 들어선 흰머리가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어 눈물을 보이고 싶진 않다.
눈을 떠 바라보고는 있지만, 대체 어디쯤을 보는 건지 도무지 초점이 맞지 않는다. 하늘도 보이고, 붉은 노을도 알아보겠는데, 내가 그것들을 보고 있다는 실감 같은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건 벌써 오래전의 일들, 좋고 행복했던, 또 아프고 후회스러운 기억들이다. 원망 같은 것 간간이 끼어들지만, 애써 탓하는 마음은 점점 옅어져서 거의 사라지고 없다. 한편으로 무척 홀가분하다.
변명이지만, 달리 선택이 없다. 나는 막다른 길 끝에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이미 정해진 길을 따라온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 끝은 삶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벗어나려 발버둥 친다면 그 마지막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 더는 힘이 없다. 지쳤고, 눕고 싶다. 이대로 누워 잠들고 싶다. 일어나야 할 시간 같은 건 모른 채. 무어라도 잡고 버틸 지푸라기라도 있었으면. 멀고 먼 터널 끝, 한 줄기 가느다란 빛도 나는 찾을 수 없다. 모두가 행복할 수 없다면 남은 사람들의 행복이라도 지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선택한, 나의 결정이다.
어쨌든, 내려가긴 해야지. 여기는 아니다. 아버지, 어머니 뵀으니 내려가야지. 걱정하실라. 뭘 하더라도, 내려가서 해야지.
하늘에는, 추석 지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달은 벌써 한쪽이 찌그러졌다.
(2023 『약사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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