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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먼 하늘을 날다

by FeelSeoGood 2023. 2. 15.

 

 나는 시를 쓸 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 자신이 미워집니다.

 

․ ․ ․ ․ ․ ․ ․ ․ ․

 

 사람은 언제나 봄에 옵니다. 내게는 그랬습니다. 봄이면, 기습적으로 다가드는 계절의 변화만큼이나 사람은 갑자기 다가옵니다. 초등학교 때의 친구들도 열여섯 해 전의 봄에 내게로 왔고, 내가 태어난 때가 봄이었으므로 부모님도 내게는 봄에 왔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제게 온 것도 봄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멀리 있습니다. 당신의 주위를 맴돌 때에도 내가 지금 당신에게서 떠나온 것만큼의 거리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기 시골 역 근처의 허름한 여인숙 방에, 모서리는 벌써 다 삭고 이제는 누렇게 연탄 온기가 남긴 자국만을 간직한 비닐 장판에 엎드려 당신과 더 가까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당신이 있는 도시에는 지금도 어쩌면 눈이 내리겠지요. 거의 땅끝인 이곳은 잔뜩 흐리기만 할 뿐입니다. 찌푸린 하늘에서 포근함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서, 온다고 해도 비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눈을 맞지 마십시오. 나는 비를 맞지 않겠습니다. 비가 오면, 하늘이 흐리면, 당신은 당신의 성을 더욱 견고히 쌓아 올리곤 했습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당신을 보는 나는 빗속에서 외로웠습니다.

 혼자이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당신도 아는 것처럼 나는 사람을 잘 사귀었으므로, 언제나 내 곁에는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더욱 견고히 쌓아 올린 그 세상에는 문이 없었습니다. 내가 들어갈, 당신이 탈출할 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밤늦게 전화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저는 상당히 많은 술을 마셨습니다. 그날은 동아리 신입생환영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그 자리에서 당신을 볼 수 있으리라는 불안한 기대가 여지없이 어긋난 날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정신마저 희부윰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부러, 가지고 다니는 수첩에다 옮겨 적어놓지 않은 당신의 전화번호를 나는, 침착히 서랍을 뒤져 찾아내었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을 때, 당신은 수화기 너머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흔한 여보세요, 라는 말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술에 의지하고서야 그럴 수 있었지만, 나는 그때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서 많은 것을 쏟아 낼 작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숨소리도 없는 전화기 너머로 당신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이미 그때 내가 꼭히 무슨 말을 하려 했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습니다. 짐작컨대, 아마도 쉽게 나의 출입을 허용치 않는 당신의 세상에 대한 원망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수 없이 많은 억지스런 의문과 바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언제나 멀리서부터 불어와 나를 스치고선 훌쩍 앞서 나가는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너무 뒤처지지 않도록 나를 돌아다보아 주는 배려도 잊지 않는 바람이었습니다. 당신의 그 배려가운데서 나는 얼마나 눈물겨웠었는지요.

 그날, 이미 당신은 나를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듯이 당신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우연히 걸려온 전화를 받듯 무심히 여보세요,라고 당신 특유의 서울 말씨로 이야기했다면, 나는 모든 걸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서울 말씨를 썼습니다. 처음 당신이 내게로 올 때, 그래서 당신이 내게 건넨 첫 마디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봄 햇살이 너무도 따사롭게 흩어지고 있었고, 가끔씩 부는 바람에 얇은 헝겊치마가 다리에 감겨서 나는 조금 짜증스러워하며 학교 앞 횡단보도를 막 건너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맞은편에서 내가 서 있던 쪽을 향해 건너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당신 역시 내가 처음부터 당신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횡단보도를 마저 건너지 않았습니다. 중간쯤에서 뒤돌아서서 당신은 곧장 내게로 오셨습니다.

 - 시를 쓰십니까?

 낯설어서 상큼한 서울 말씨로, 당신은 내게 그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횡단보도를 다 건너고도 보도로 올라서지 못하고서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 잠시의 틈을 두고서 당신은 내게 또 한 번의 물음을 던졌습니다.

 - 습작인가 보죠?

 하얀 여백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노트에서 아무렇게나 찢어 놓은 종이 한 장을 당신은 내게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너무도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낯선 어투로 계속 이어지는 당신의 차분한 물음에 미처 저는 대답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저는 기습적인 만남에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횡단보도 저편에서 건너오던 사람이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고 해도 제가 그렇게 당황했을까요?

 나는 당신이 내민 종이를 빼앗듯이 받아, 손에 들고 있던 노트 속에 접어 넣고는 급히 뒤돌아섰습니다. 아마, 돌아서기 전에 고개를 숙여 잠시 인사를 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왜 그런 표정을 지으셨습니까? 나는 제가 돌아서고도 당신이 계속해서 나를 보고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마침 봄이라 학교 앞 서점에서 대청소를 하며 거리에 내놓은 거울 속에 당신이 여전히 나를 향해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살짝 쓴웃음을 지으셨습니다. 멀리서였지만 나는 당신의 그 표정을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입학한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사월이었습니다, 그때는.

당신은 더부룩이 긴 머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길게, 겨울동안 멋대로 자라 버린 당신의 머리칼은 아직은 봄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안경이 뿔테였다면 나는 어쩌면 당신을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으로 지나쳐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제가 겪지도 못한 지난 시절의 혼돈을 담은 어수룩한 학생, 너무도 전형적인 모습으로, 돌멩이를 던지는 학생들과 최루탄을 쏘는 전경들을 배경으로 껍질이 다 벗겨진 누런 가죽가방을 앞으로 안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싼 채로 연신 쿨럭 거리며 지나가는, 그런 틀에 박힌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을 테니까요. 당신의 금테안경 속으로의 선 굵은 눈썹과 반짝이던 눈빛 그대로, 입을 굳게 다물어 짓던 작은 쓴웃음을 나는 기억합니다. 일일연속극이 끝나면 아홉 시 뉴스를 보고, 아홉 시 뉴스가 끝나면 스포츠 뉴스를 보는 사람들과 닮아 버린 지금의 눈빛과는 사뭇 달랐던, 그때 당신의 눈빛.

 당신이 내게 주워 주신 그 작은 종이 한 장은 시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시를 쓰려고 그랬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무언가를 잔뜩 적어 두고 싶었습니다. 하루 종일 마주 앉은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도 남아 있는, 아니 남겨둔 이야기, 마치 열무 삼십 단을 해 이고 난장에 나와 앉았다가 해질녘에 마지막 한 단을 굳이 팔아 치우려 하지 않고 일부러 남겨 돌아가는 시골 아낙의 남은 열무 같은, 그런 이야기를 잔뜩 적어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애꿎은 노트를 한 장 찢어서 끼적거렸던 것입니다. 나는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오래전부터. 그래서 나는 순간순간 떠오르는 많은 느낌들을 그렇게 끼적거리곤 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도피의 시를 쓰십니다. 도피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때의 제가 지금의 당신과 같은 도피의 소설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내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의 당신은 삶에 대해 정면승부 외에는 어떠한 대안도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때로 당신은 푸른 물빛처럼, 당신과 내가 있는 이 땅에서 아주 먼 곳에 있는 세상, 바다 건너에 있는 신비의 대륙이나 우주공간 저 편에 있는 미지의 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때로 지나치다 싶을 만큼 주위의 환경에 민감해하며 당신의 눈에 비친 모순들에 견딜 수 없어했습니다. 당신은 격랑도 평온함도 모두 간직한 먼바다였습니다. 당신의 편지에서 언제나, 서너 문장마다 한 번 꼴로 등장하던 말없음표처럼 당신의 세상은 침묵의 소리였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삶을 치열한 시지푸스처럼 살기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저는 아무 계획도 없이 그런 당신에게 동조를 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 침묵의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당신은 도피의 이야기로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내가 정말로 당신을 알고 있다고 이야기해도 좋은 것일까요? 지금 나는 당신에게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데 말입니다. 당신 곁에 있던 때에조차 나는 당신을 조금이라도 알기나 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적어도 당신이라는 이유로 내가 느껴야 했던 상처는 덜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상처는 조금씩, 아껴 이야기하기로 합니다, 애써. 나는 지금 아픔을 추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후회를 변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내 삶에서 절정이던 순간들을 아름답게 회상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위해 가장 충실한 감정을 키워 가던 순간들을 말입니다.

 여인숙 마당으로 난 작은 창에 빗방울이 후둑입니다. 지금은, 이제 비가 옵니다, 여기에.

 

 그 봄이 채 끝나기 전에 당신은 내게로 다시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침 수업이 비는 오후였습니다. 그날은 <한국사의 이해>라는 교양수업이 있었는데,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휴강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날따라 혼자 솔숲을 걸었습니다. 소나무마다에는 시를 담은 액자들이 투명한 햇살을 반사하며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시를 읽을 생각으로 그곳을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언제나 친구들과 함께 앉아 쉬곤 했던 그곳으로 발길이 닿았던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신을 다시 보았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당신에게 발견되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멍하니 액자 속의 난해한 글자들을 끼워 맞추느라 정신이 없는 나를 발견한 것은 당신이 먼저였으니까요. 시 하나를 그림 맞추기를 하듯 나름대로 힘들게 끼워 맞추고 돌아 섰을 때, 당신은 그곳에 서 있었습니다. 당신의 뒤로는 솔가지 사이로 흩어지는 봄볕이 눈부셨습니다.

 - 시를 쓰십니까?

우연이었을까요? 처음과 똑 같은 한 마디로 당신의 서울 말씨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지난번 횡단보도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당신은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애쓰지 않았어도, 아무 설명하지 않았어도……. 당신과 그렇게 정면에서 마주하고서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해서 제가 당신을 몰랐겠습니까? 저는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된 놀라움이 당신께 아무런 표현을 할 수 없게 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그날 당신의 시를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당신은 벌써 세 번이나 그곳에 당신의 시를 단지 걸어 놓았었다고 수줍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당신의 시는 당신이 제게 들켜버린 수줍음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자신감에 충만했었습니다. 당신은 시마저도 정면 돌파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시를 쓰지 않는다고 고백을 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쓰려 한다는 생각은 말하지 못했습니다. 시를 쓰지 않는다는 나의 말에 당신은 꽤나 실망한 표정을 지었습니다만 나는 당신의 얼굴에 번졌던 실망보다 몇 곱절의 무안함을 당신의 표정으로부터 느꼈습니다. 소나무 꽃이 피고, 노오란 꽃가루가 흩어지던 그때에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소설을 쓰는 대신에 당신을 썼습니다. 당신을 쓰면서 나는 그때 아무런 대책 없이 꿈꾸던 도피의 소설을 쓰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시가 튼튼해질수록 내가 쓰는 당신의 이야기도 튼튼해졌으니까요. 당신의 치열한 시는 내게 도피의 글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지금 당신에게서 많이도 먼 곳인 이곳에서도 나는 마지막으로 당신을 쓰고 있습니다.

 마지막이란 말로 당신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혹여 오해를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당신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누구보다 아쉬워하던 때에 비하면 이제 나는 많이도 이기적이 되었습니다. 당신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아침에 뒤적여 본 내 일기장에 당신을 만난 이듬 해 봄에 내가 쓴 몇 줄의 글이 나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공원에서 울고 있는 아이의 터져버린 풍선처럼

 울고 나면 잊혀지는 것이면 좋겠다, 너는.

 단잠을 자고 난 뒤의 꿈처럼

 깨고 나면 잊혀지는 것이면 좋겠다, 너는.

 오래되면 녹아 버리고 없는 눈처럼

 일상에 익숙해지면 잊혀지는 것이면 좋겠다, 너는.

 delete key 하나로 모두 사라지는 computer처럼

 머릿속 비밀스런 단추하나로 모두 잊히는 것이면 좋겠다,

 너는

 그리움.

 

 내가 당신에게 보여드리지 않은 단지 몇 권의 일기 중 하나일 거에요. 여전히 멀게만 있는 당신을 조금씩 알게 되는 과정은 아마도 단지 당신을 잊기 위한 과정이었나 봅니다, 제게는.

 당신은 내 일기를 보셨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나의 일기를 필독하도록 강요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해 봅니다. 아직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당신의 시를 보는 대신에 나는 일기를 보여드리기로 했었으니까요. 한 편의 시를 쓰면, 그렇게 실제의 당신과는 많이도 달랐던 세상으로부터의 한 꺼풀을 벗겨내면, 누구보다 내게 먼저 그 한 꺼풀 벗겨진 세상의 속살을 보여 주었던 당신에게 말입니다.

 저의 일기는 상처를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언제나 새로운 부담을 안겨 드렸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많이도 닮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래전에, 당신이 더욱더 나를 닮아가기 전에 나는 당신에게서 떠났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과 나는 상대의 상처를 보고서야 비로소 서로를 이해한다고 믿는 그런 부류였습니다. 상처를 목격할 수 없는 사람은 단지 ‘타인’이란 도장을 찍어서 옆으로 제쳐 놓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 부류,라는 말에 ‘어리석은’이나 ‘부질없는’ 따위의 형용사는 굳이 넣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그러한 모습들에 대해 판단하는 것을 미루어 두고 싶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저는 반성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까요.

 내가 가진 상처가 너무도 부담스러워서 속으로 곪아들고 있어도 겉으론 언제나 밝고 당당했던 그런 위선을 당신과 나는 공통분모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상대의 상처를 보지 못하면 불안해합니다. 스스로의 상처는 보여주지 않으려 무엇보다도 애쓰면서 말입니다. 언제라도 서로의 상처를 감싸줄 준비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꼭 그렇게 해야만 상대에게 스스로를 확신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서로를 행복하게 해 줄 준비에는 늘 어설프기만 합니다. 무엇으로도 쉽게 채우지 못할 외로움을 재배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당신도… 그랬습니다. 우리는 많이도 닮아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 주위를 헤매면서 당신에게 셀 수도 없는 생채기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많은 생채기를 얻었습니다. 나로 인한 당신의 생채기를 보면서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었고, 내게 난 생채기를 보면서 당신은 나를 믿었습니다. 나는 당신으로부터의 그 상처를 기다리고 있었던, 때로는 목말라했던 마조히스트였나 봅니다. 너무도 행복에는 서툴렀던 것이 그렇게 당신을 빗속에 서 있게 했었나 봅니다. 당신과 나는 서로에게 낸 생채기를 확인하면서도, 아픔으로 느끼면서도, 그게 사랑이었다고 믿었었습니다.

 언제였던가, 당신과 함께 당신의 서클룸에서 밤을 지새우던 날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흐릿한 백열등아래에서 내 일기를 보다가, 쪼그려 벽에 기댄 채로 선잠이 든 내게 와서는 무릎에 반쯤 파묻은 내 볼을 따라 손가락으로 가늘게 선을 그리다 한 방울의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무릎을 감싼 내 손등에 떨어지는 물기에 나는 눈을 떴습니다.

 처음 보았던 당신의 눈물이었습니다. 나는 그 눈물을 알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였으므로 정작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소중한 의미였던 모든 것들은 죽음을 인지하면서도 끝내 제가 태어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는 회귀성 어족의 절망적 향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절망은 오직 당신의 세상 속에서만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그때 어렴풋이나마 당신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던 모든 것에 너무도 절대적인 감정을 투영하고 있었습니다. 나에게 조차도…….

나는 당신의 눈물을 닦아 드릴 수 없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당신을 바라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나는 단지 고개를 조금 더 깊이 파묻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정면 돌파는, 그 적극성은 그 속에 더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밝기만한 세상을 향한 무력한 방패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피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건 가장 아름다운 절망이었습니다. 무조건, 이유 없음, 이라는 것처럼 절망적이지만 항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까요?

 상처이야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아껴 이야기하려 했지만, 당신을 알게 된 후로 상처는 나의 본능인가 봅니다. 당신과 나에게 외로움이 본능이듯이. 당신이 언제나 꼬리표처럼 당신의 구석구석에 가을을 묻히고 다니는 것처럼 말입니다.

 

 편지를 쓰기 전에 손을 씻었습니다. 글쓰기 전에 언제나 손을 씻는 당신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인숙 마당 귀퉁이에 달린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낡은 집과는 어울리지 않게 빨간, 새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담았습니다.

 물속에 손을 담그려다 당신이 주신 반지를 수챗구멍에 빠뜨릴 뻔했습니다. 다행히 손가락을 벗어난 반지는, 수돗가 시멘트 바닥을 굴러 수챗구멍 바로 앞 낮은 시멘트 턱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반지가, 왼손 약손가락에서 오래전부터 헐거워진 채 저 혼자 놀고 있더니, 거기에서 빠져 버렸던 것입니다. 다시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다가 울컥 눈물을 떨구고 말았습니다.

 물은 당신이 지금 계시는 도시의 지난겨울만큼이나 차가웠습니다. 문득, 차가운 물속에서 흔들리는 내 손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많이도 야위었습니다. 아마도 내 몸은 당신의 사랑을 지탱하기에는 많이도 벅찬가봅니다. 손을 담근 일렁임 위로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물은 차갑기만 했습니다.

 처음 당신과 떨어져 있었던 우리의 첫 겨울, 당신의 부재를 견디기가 무척이나 힘들던 겨울, 당신의 고향집으로 당신을 만나러 갔던 그 겨울에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흐린 날이 많았던 만큼이나 당신 역시 당신과의 새로운 투쟁에 힘겨웠었나 봅니다.

 까칠한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피고, 수염은 야윈 턱을 따라 주인 없는 고가 안마당의 풀처럼 자라 있었습니다. 당신이 한 짐씩 나무를 해 오곤 한다는 산에는 무릎이 빠질 만큼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소죽을 끓여 먹이는 일 외에는 종일 하는 일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가지고 내려온 몇 권의 시집과 노트도 장승처럼 한 구석에 버티고 서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라고 그랬습니다.

 당신은 집을 나와 읍내에서 외박을 했고 나는 당신과 하룻밤을 지새웠습니다. 집으로 들어가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려 했던 나에게 당신은 기차를 타는 나를 보아야 마음이 놓인다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나는 당신의 고집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한 번, 이곳으로 혼자 떠나 온 것만을 제외하고 서는요.

 당신은 기차표와 함께 입장권도 한 장 끊었습니다. 어깨를 한껏 움츠린 사람들이 몇 명 서 있던 역에는 여지없이 굵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습니다. 기차가 들어오고 플랫폼에서 천천히 기차를 향해 헤어짐을 수습하는 순간, 당신은 내 어깨를 돌려 나를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지만 이내 내 여윈 팔은 안개비 오는 바다의 파도처럼 일렁이던 당신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때 그리도 서러웠을까요? 하룻밤을 같이 지새우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당신이, 나를 보내는 그 기차역에서 갑자기 저를 끌어안았을 때 나는 왜 당신이 어느 때보다도 그리워 졌을까요? 그렇게 가까이 당신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안기면서 당신과의 이별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당신을 이렇게 다시 안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이제 내게서 멀어질 것이다……. 눈 속에 천천히 역으로 미끄러져 오는 기차처럼 예감은 나를 오히려 차분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멀리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보면서, 여전히 저를 보고 있는 당신을 느끼면서 나는 처음으로, 하지만 어느 때보다 깊이 이별을 예감했습니다. 가장 당신과 가까이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멀리 와 있는 저는 그때부터 오래 망설이고만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펑펑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그리고 비가 그쳤나 봅니다. 하늘에 작은 별이 몇 개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드리운 하늘 속에 더구나 여인숙 좁은 창문 속에 갇힌 별은 더욱 왜소하게만 보입니다. 그 왜소한 별이 흘러갑니다. 작은 유리창도 흘러갑니다. 별이 깜빡이고서, 사실은…….

 별도 유리창도 가만히 제자리에 있습니다. 내 눈 속에서 무언가가 흘러갑니다. 그리고 가슴속에도 무언가가 흘러갑니다.

 당신이 내게 주었던 시를 기억합니다, 아직도. 당신이 늘 가지고 다니던 전화번호수첩의 한 장을 찢어서 막 기차를 타기 전 급하게 쓴 당신의 시 끝에는 아무런 설명 없이 입대한다, 는 한 마디만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당신으로부터 당신의 입대를 통보받았습니다.

 

 작은

 강철바늘 하나를 숨기고 있자

 검은 피가 솟도록 손톱 밑을 찔러

 不盡의 情炎이 우리, 사랑이 되도록

 남김없이 토해내고 고통도 없이

 웃으며

 쓰러질 수 있도록

 아무도 모르게, 작은

 강철바늘 하나를 숨기고 있자

 

 당신이 일러 준 그 바늘을 당신을 만나지 못했던 이 년여 동안 성실히 갈아두지 않아서 아마도 나는 이렇게도 약하기만 한가 봅니다.

 당신의 군 시절 동안 거짓말처럼 나는 당신을 찾지 않았고, 당신도 몇 번의 휴가에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말한 그 강철바늘을 내 속에 은밀히 숨기고 있다고 스스로는 믿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만나지 못한 그 시간은 당신을 많이도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예전의 당신이 아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언제나 당신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시는 많이도 달라져 있었습니다.

 입대 전 당신이 썼던 시속에서 빛나던 의지는 이미 세상에 타협해 있었습니다. 살벌하리만큼 투쟁적이었던 당신의 시어들은 세상에 대한 껍질 벗기기를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예리하던 칼날은 고의로 방치되어 녹이 슬어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욱 저를 힘들게 했던 것은 당신이 감행한 그 타협을 당신은 여전히 수긍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자학하고 있었습니까? 이미 정면 돌파를 잊어버린 스스로에게 당신은 왜 도피라는 단죄를 하셨는지요? 차라리 아무런 미련도 없이, 순응하진 못한다 해도 다들 그렇듯 모른 척 적응해 버렸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당신의 시를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렇게 스스로를 못 견뎌하던 당신에게 아무런 힘이 될 수 없었던 저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여전히 남아있던 열정에 대한 기억과 그때 현실 속의 당신 사이의 갈등이 깊을수록 더욱 절망적인 사랑에 기대어 오던 당신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전이나 그때나 당신의 외로움은 변함이 없었습니다만 그 이유는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전의 당신은 세상과의 괴리감으로 방황하고 외로웠으나 그래도 당당히 맞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세상을 부수어 스스로의 영역을 찾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당신은 이미 세상과의 싸움을 포기했으면서도 여전히 외로웠습니다. 더 이상 변화를 꿈꾸지 않는 기억 속의 박제가 되어 무기력해져 가고만 있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책임지지 못하는 개혁가였습니다. 그리고 실현성 없는 모험가였습니다. 이미 현실 속에서 세상과 타협한 모습으로 숨 쉬고 있으면서도 당신의 꿈은 여전히 기억 속을 걷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세상을 정면 돌파하던 때보다 당신은 더욱 무서운 세상과의 격리를 느껴야 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지난 시절의 당신은 무기력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 당신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당신을 소중히 알고 있습니다. 내게 당신을 알았던 지난 사 년의 기억이 없었다면 나는 조금 더 쉽고 조금 더 편안한 삶에 만족하고 살아갈 줄 아는 현명하기만 한 사람들 속에서 역시 현명하기만 한 사람의 하나로 살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누구보다도 현명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삶에 대해 왜, 라는 질문조차 하지 않는 그런 사람으로, 누군가 그런 불경스러운 질문을 하려 하면 가차 없이 단죄하고 마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만났기에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더욱 저는 혼돈의 당신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꿈과 세상과의 괴리가 아닌 꿈과 현실에 있는 당신 스스로와의 분열 속에 방황하는 당신에게 힘이 될 수 없는 나를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저만치 혼자서 앞서 나가는 것으로 나를 불안하게 방치하던 입대 전의 당신이 그리웠습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제가 이곳으로 오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당신은 역시 빗속에서 어깨를 움츠린 채로 고개를 떨군 모습이었습니다. 도서관 앞에서 마주친 당신을 끌어 저는 굳이 학교 앞 석우(夕雨)까지 갔습니다. 한참 만에 두 잔의 따뜻한 커피가 나오고도 또 한참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에도 당신은 잔뜩 찌푸린 하늘만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무얼 잃어버린 것이냐, 고 물었습니다. 대뜸, 그렇게 묻고 말았습니다. 정답을 나름대로 다 알고 있었으면서 제가 왜 그것부터 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말로 굳이 확인을 하여 무어 변할 게 있었다고……. 아마도 저 역시 깊은 혼 돈속에 있었나 봅니다.

 내게 새로운 세상으로의 걸음마를 가르쳤으면서 이제는 왜 그 길을 당신이 잊으려 하느냐는 원망도 했습니다. 한참 만에, 연민보다는 깨끗한 망각이 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이 말은 당신을 무척이나 아프게 했나 봅니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당신의 시선이 잠시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시를 떠날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차마 당신을 떠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맑은 날에도 두꺼운 유리 탓에 흐린 하늘로 보이는 석우의 좁은 창은 더욱 어두워 있었습니다.

 울먹임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허리를 곧게 하고 또박또박 걸어 나무계단을 내려왔습니다. 그제야 하늘은 후둑후둑 빗방울을 떨구었읍니다. 쉽게 그치지 않을 빗줄기였습니다. 격한 소나기도 아니고 는개도 아닌 빗방울을 떨구고 있었습니다. 때 아닌 비에 젖은 사람들을 태운 버스가 고인 빗물이 푸른 물고기의 비늘처럼 아른거리는 학교 앞 정류장을 출발할 때 당신은 그곳 거리에서, 바삐 비를 피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 빗속에 서 있었습니다.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내 기억 속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는 여러 곳을 돌아 나를 이곳 작은 간이역에 내려놓았습니다. 나와 함께 기차가 내려놓은 내 짐 속에는 당신을 추억할 어떤 것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당신을 기억하게 하지 않는 어떤 것도 지난 사 년 동안의 내게는 없었습니다. 당신의 추억도 함께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도 멀리, 이곳에서 오히려 저는 당신과 가까운 것만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있는 도시를 떠나기 전에 나는, 이른 아침인 탓에 빈 채로 일렬로 줄지어 선 역 앞의 공중전화부스에서 당신에게 짤막한 전화를 했었습니다. 채 두 번의 전화벨이 울리기 전에 수화기 너머로 당신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 여보세요?

 언젠가 얼마나 아쉬워하던 말이었던가요. 지난 밤 새 자지 않고 있었는지 당신의 목소리에서 까칠함이 귀를 스치고 지났습니다.

 - 여보세요, ……은?

 저를 확인하는 어중간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서 나는 대답을 했습니다.

 당신은 내가 이곳으로 혼자 떠나는 것에 그제서야 탐탁지 않아 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당신이 전화를 받은 서클룸에서 훤히 보이는 학교 뒷산에 심어 둔 자목련이 곧 꽃을 피울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꽃이 피면……, 하고서 당신은 말끝을 잇지 않았습니다. 지난겨울은 무척이나 매서웠는데도 용케 살아 있었다고, 나는 건조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을 만나던 해에, 이사를 하는 저의 집 정원에서 옮겨와 당신과 함께 심었던 어린 자목련이 네 번의 봄을 지나서야 처음 꽃봉오리를 맺었습니다. 무성한 나무들 틈에서 혼자 외로워 보인다고 이사를 하며 아쉬워하던 내게 당신이 옮겨 심자고 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나무를 보러 몇 번 찾아갔었지만, 당신의 입대 후로는 기억조차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았어도 저 혼자 잘도 자라고 있었나 봅니다.

 이제 그 자목련이 처음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도시를 떠나 왔습니다. 그것이 그제였습니다. 당신을 거역하는데 대해 아무런 주저도 하지 않았습니다. 날이 밝으면 당신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그 자목련은 붉은 보랏빛으로 피어 날 것입니다.

 

 그래요, 이건 당신에게 가는 편지입니다. 그리고 내가 드리는 마지막 인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 당신에게 썼던 수많은 편지들 중의 한 장으로 당신의 기억에 남기를 바랍니다.

 편지를 다 쓰면 나는 언제나처럼 세 번을 접어 평범한 하얀 봉투에 집어넣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부두로 가는 길에, 횟집이 늘어서 부산스러운 길 끝에 놓인 우체통에 편지를 던져 넣을 것입니다. 어제 이 여인숙에 방을 잡기 전 미리 보아 두었던 우체통입니다. 던져진 편지는 당신의 손에 닿기 전에 빈 우체통의 플라스틱 바닥을 ‘텅’하며 한 번 두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배를 탈 것입니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어느 소읍 조그만 시계방에 카메라를 팔았습니다. 전당포에 맡길까도 했지만 이제는 누가 또 언제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아예 팔아 버렸습니다. 흔해빠진 자동카메라-하지만 그 카메라는 당신과 함께한 모든 사진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와 바꾼 돈으로 나는 내일 이곳에서 꽤 먼 어느 섬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배가 만들어 내는 물살이 가장 당신을 닮은 어디쯤에서 나는 당신을 향해 떠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나만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이곳의 갈매기는 그리 멀리 날지 않습니다. 무슨 생각에선지 먼 바다를 나는 대신에 포구의 부산함 속에 한 부분이 되어 낮은 원을 그리며 날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그 갈매기들도 멀리 가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어쩔 수 없는 사람들처럼 애써 시간을 정하고 애써 이유를 만들지 않고도 가장 좋은 날씨와 가장 명확한 이유로 그네들이 늘 유영하는 포구의 하늘이 아닌, 먼바다의 푸름이 떠받치고 있는 먼 하늘 어디쯤으로 날아가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다만 그런 갈매기가 된 기분입니다. 무리가 함께 날아가 주지 않아도 혼자라도 멀리 본능으로 그리던 먼 하늘을 찾아 가는 그런 갈매기가 된 기분입니다. 언젠가는 누구든 유영이 아닌 그런 비상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비로소 내게 나만의 이야기를 허락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제게 주시는 마지막 선물이 될 것입니다. 고이 간직하려 합니다. 당신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당신을 그렇게 그리워했던 것을 당신은 아실는지요? 나는 결국 길게도 이야기를 써 버렸습니다. 처음에 미리 했던 변명처럼 내가 시를 쓸 수만 있었어도 스스로가 이렇게 밉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미움은 소용없는 것입니다.

 하늘이 청람색으로 밝아 옵니다. 자목련이 피기에는 좋은 날씨입니다.

 그럼, 안녕히.

 

당신의 은(隱)

 

(1995 영대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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