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부터 폭염이 계속되고 있었다. 냉방이 충분하지 않은 장례식장에는 지하 공간 특유의 습한 공기가 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였다. 조문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취기 오른 소리로 얘기를 주고받는 서넛을 빼고 나면 손님 떠난 상을 치우는 이도 없이 이미 무덤 속인 듯 적막했다. 문상을 온 사람들은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훔쳐냈지만, 상복을 입은 은재는 미동도 없이 이틀 내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야이야, 니도 인자 쫌 드가가 쉬이라. 이만하믄 올 만한 손님들 다 댕기 갔고, 낼도 일이 많다. 암만 차 타고 간다 캐도 산에 가는 기 쉬운 기 아이다. 기숙아, 야 쫌, 현지이 애미 쫌 델꼬 드가라. 쪼매라도 눈 좀 부치구로."
시어머니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시누이가 한 손으로 은재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어깨를 감싸 쥐며 은재를 일으켜 세웠다. 어제부터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었다. 그때마다 은재는 시종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끝내 사람들의 권유를 뿌리쳤기에, 시누이의 팔에는 완강하다 싶을 만큼 많은 힘이 실려 있었다. 권하는 시누이도 마다하는 은재도 서로가 다 아는 마음이었다.
'형님! 나 그냥 저 사람 앞에서 잘못을 좀 더 빌면 안 될까요? 저이가 용서한다고 말해줄 리 없겠지만, 그래도 여기 앉아 있다 보면 무슨 말이든 해주지 않을까요?'
은재는 시누이를 보며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누구든 붙잡고 그렇게 토해내고 싶었지만 차마 꺼내 놓을 수 없는 말이었다. 눈물도, 무표정도 은재에겐 조심스러웠다. 제 속을 누가 알아볼 것도 아닌데, 모든 게 드러나고 말 것처럼 생각되었다. 누가 봐도 그저 남편을 먼저 보낸 슬픔에 젖은 젊은 여자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은재는 불안했다. 혼자 남았다는 서러움보다 이렇게까지 되게 만든 남편에 대한 미움이 자꾸만 생겨났고, 무엇보다 스스로가 무서웠다. 어찌 그랬을까? 혹시 어쩌면 마음속에서는 그러기를, 그럴 수 있기를 바라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대로 이렇게 남편을 핑계 삼아도 되는 것일까? 은재의 가슴속에는 가늠되지 않는 슬픔과 두려움의 질문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래도 제 마음 알아줄 이는, 넋이 되었다 해도 남편뿐이었기에 은재는 도저히 영정 앞을 떠날 수 없었다.
은재의 눈빛에서 말보다 더한 간절함을 읽은 시누이는 은재의 어깨를 몇 번 다독였지만, 곧 다시 힘을 주어 은재를 일으켜 세웠다. 은재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시누가 이끌고 떠미는 가족실로 향했다.
좁은 방에 들어서 혼자가 되자, 회한인지 체념인지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이 가득 고여 들어, 바닥에 쓰러지며 은재는 오열했다.
여보, 기범 씨, 거긴 편안할까? 당신 더 아프지 않고,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을까? 걷고 뛰고, 웃고 울고, 나 없어도 당신 내키는 대로 다 할 수 있을까? 어서어서 서둘러 가요. 돌아보지 말고, 미련 두지 말고. 훨훨 날아가요. 그리고 무엇보다, 아프지 말고…. 나, 미워하지 말아요. 난 평생 아파하게 되겠지만. 그게 내가 받는 벌이라 생각하고, 나 용서해 줘요, 여보.
말로는 차마 하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하는 젊은 올케의 등을, 눈물로 두 볼이 번들번들한 시누이가 쓸어주었다.
장례식장을 다녀간 사람 중 몇몇은 분명 뒤돌아 은재의 험담을 풀어놓았을 것이다. 남편 앞세운 처지에 거짓으로라도 흐느껴 울 법도 하건만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과 낮은 목소리로 일관하는 은재의 모습은 지나치게 냉정하다는 핀잔을 만들기 충분했다. 짐만 되는 남편 저렇게라도 보내고 나니 그나마 젊은 여인네 운이 폈다는 따위의 대놓고 떠들만한 게 못 되는 이야기는 당연히 없었지만, 사랑이 깊었던 만큼 황망함이 크기 때문일 거라는, 갑자기 당한 일에 실감이 안 나서 그럴 거라는 식의 은재를 편들어줄 이야기가 나올 여지마저 그녀의 그 냉랭함이 틀어막았다. 조문을 받는 팔월 하순의 꼬박 이틀간 장례식장 맨 안쪽의 좁은 영안실에는 여전한 여름 더위가 가득했지만 은재의 주변만은 서늘한 공기가 드리운 듯했다.
사고는 밤부터 새벽 사이에 있었다. 기범의 회복에 별 희망을 두고 있던 것은 아니었어도 갑작스러운 아들과 동기간의 죽음 앞에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충격에 빠졌다. 일찍 딸 하나를 본 뒤로 한참 만에 얻은 아들이었고 터울이 컸던 만큼 때론 엄마처럼 돌보던 동생이었다. 늘 죽음 언저리에 있던, 온전하다고 할 수는 없는 삶이었어도 남은 사람에게는 여느 죽음과 똑같이 아쉽고 허탈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애달프고 서러웠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래를 뽑아내 줘야 했지만 아직 인공호흡기를 단 것도 아니었고, 어눌한 발음이었지만 힘들게 말을 이어 의사 표시도 할 수 있던 상태였으니까.
은재는 아이들 방에서 잠이 들었다고 했다. 이사 갈 집을 찾아보느라 바삐 움직인 은재를 종일 따라다닌 둘째가 그날따라 칭얼대며 엄마를 찾았고, 아이를 토닥이느라 평소처럼 기범을 곁에서 지키지 못했다고 했다.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빠져든 선잠은 오래가지 못했고, 문득 깨어 시계를 보니 새벽이었다고. 전에도 종종 그런 적이 있었지만, 그날은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아이들 방으로 건너올 때 기범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평소에도 그러다 잠이 들면 나중에 텔레비전을 꺼주는 경우가 많았다. 혼자서는 고개도 제대로 돌릴 수 없는 사람이 텔레비전 소리에 잠을 설치겠다 싶어 피곤한 몸을 일으켜 기범에게 갔다고 했다.
가끔 일으켜 앉힐 때 등을 받히려 머리맡에 세워둔 길고 큰 쿠션이 기범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질식에 의한 사망. 은재의 전화로 출동한 구급대원들과 그들의 연락을 받고 도착한 경찰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침대에 기대 세워져 있었던 쿠션이 어떻게 기범의 얼굴로 넘어졌는지, 그렇게 되었다 해도 코와 입에 밀착된 게 아닌데 그 정도만으로 어떻게 그리 쉽게 사망에까지 이르렀는지, 황망하기 그지없었으나 원래도 호흡이 힘든 환자는 그 정도도 충분히 사인이 된다는 판단과 망자에게 운이 없었다는 체념에 묻혔다.
“아이고, 그리 오래 누워 고생하더니 결국 저리 가는구먼. 가는 길이라도 편안해야 할 텐데, 이리 소란스러워 어쩌누.”
잠옷 바람으로 나와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는 아래층 집주인 할머니에게 경찰은 간단히 몇 가지만 확인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을 거라고, 더는 그 고생 없을 테니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어쩌면 지금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혼잣말이 업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경찰들 뒤로 들릴 듯 말 듯 보태졌다.
놀란 열두 살과 여덟 살의 남매를 다독이고, 시누이에게 전화를 하고, 장례식장으로 옮겨오는 몇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은재는 기억하지 못한다. 슬픔이든, 절망이든, 어떤 정형화된 감정이 가슴에 고여 들어와 은재의 이성이 그 속에 침잠했기 때문이 아니다. 지극히 또렷한 정신으로 당황하지 않고 일을 처리했던 것 같은데도 막상 은재를 쥐고 흔들며 어찌 된 거냐고, 내 동생이 왜 저리 되었냐고 체념 반, 절규 반인 시누이를 마주하고는 그 앞의 기억은 하나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찌 저리 보내나, 어찌 저리 보내나, 그 착한 내 동생 어찌 저리 보내나. 은재가 흘릴 눈물까지 대신 흘리려는 듯 이어지는 시누이의 오열을 들으며 그래도 그게, 허망하고 아쉬운 마음에 하는 말이라는 것을, 누굴 탓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았다.
시어머니는 은재를 끌어안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품어주는 사람은 시어머니밖에 없는데도, 은재는 죄스러운 마음에 제대로 안기지도 못하고, 엉엉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다.
따뜻한 남자였다, 기범은. 살가운 표현 한 번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숙맥이었지만, 퇴근길에 붕어빵이라도 사 오는 날엔 봉투째로 아이들 품에 안겨주면서도 따로 하나를 숨겨 은재에게 건네던 사람이었다. 일하는 자동차정비공장으로 간혹 오는 행상을 외면하지 못하고 뭐라도 한 봉지씩 사서 가져오던 사람이었다. 양말과 고무장갑, 수세미에 요즘은 좀처럼 쓰지 않는 나프탈렌 같은 것들. 몇 번 쓰지도 못하고 버려야 할 조악한 물건들. 은재가 주는 용돈이 좀 많았다면 그보다 몇 곱절은 더 사 올 사람이었다.
“다리도 불편한 그 아저씨 가방에 물건이 너무 많이 남았더라.”
기범의 진지하면서도 해맑은 목소리에 은재는 잔소리를 더 보태지 못했다.
은재는 아프지 않은 그와 오 년을 살았고, 아픈 그와 칠 년을 살았다. 언제부터 아팠던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니, 이렇게 나누는 시간의 구별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 운명이라는 것이 있어서, 애초에 그는 아프게 되어있었는지도 모르고, 애초에 은재는 아프게 될 그를 만나고 또 떠나보내게 되어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부터 기범이 그랬다. 손아귀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고. 가끔은 다리도 후들거린다고도 했다. 그렇게 말해 놓고도 아직 젊은 놈이 그러면 안 되는데 하며 웃음기 섞인 엄살로 자기가 했던 말을 희석시켰다. 요 며칠 너무 무리해서 그런다거나 계절 바뀌며 입맛이 별로라 기운도 없나 보다고, 기범은 자기가 알아서 별일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필요 없다고 마다하는 기범의 등을 떠밀어 보약을 지어다 먹여도 봤다. 좀 좋아지나 싶더니 다루는 공구를 떨어뜨리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부랴부랴 찾아간 병원에서도 특별한 진단을 내놓지 않았다. 그저 일시적인 거라고, 무리하지 말고 적절히 쉬어가며 일해야 한다는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들뿐이었다.
몇 개월 뒤 다리에 힘이 빠져 무릎이 꺾이고 골반이 아파오기 시작했을 때에야 의사는 종합병원의 진찰을 권했다. 지겹도록 이어진 일주일간의 검사들 끝에, 기범의 근육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갈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종 진단이라고 했다. 당장 회복할 방법은 없다, 딱히 치료할 방법도 없다, 다만 당장의 불편함과 병의 진행을 늦추기 위한 약물치료를 할 수 있는 게 전부라는 설명이 있었다.
그때까지, 병원을 갈 일이 별로 없었다. 기범과 은재는 아직 젊었고, 애들도 어렸지만 특별한 병치레가 없었다. 지금까지 은재에게 병원은, 하루 이틀 몸조리하면 나을 감기에도 일주일씩 약 주는 데였다. 담당 의사는 꽤 긴 시간을 할애하여 차근차근 설명했다. 되도록 전문적인 의학용어는 빼고 알아듣기 쉬운 말로. 그렇게 쉬운 설명들이어서 더더욱, 은재는 어이가 없고 사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의사의 친절하지만 건조한 목소리를 들으며, 희망을 앗아가는 것이 이렇게 간단할 수 있구나 하고 은재는 생각했다. 아픈 건 기범인데 은재의 온몸에 힘이 빠져, 안고 있던 돌쟁이 현우를 놓칠 뻔했다.
차츰 나빠질 환자의 상태에 대해 환자 본인보다 보호자가 미리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의사는 그랬다. 큰 근육들부터 위축과 무력이 점점 심해질 것이다. 당장은 일상생활의 가벼운 불편뿐이겠지만 결국 거동이 불가능하게 된다. 면역이 약해지고 감염에도 취약해지므로 간단한 병도 조심해야 한다. 근무력이 호흡에까지 영향을 미치면 기침하는 것도 어려워서 가래를 다른 누가 뽑아내 줘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기범과 은재의 표정을 살피며 잠시 뜸을 들이던 의사는 딱히 묻지도 않은 결론까지 통보해 주었다.
“언제일지는 몰라도, 최종적으로는 대부분 호흡부전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아니어야 했다. 이렇게 건강한데, 그럴 리가 없었다. 이 사람은 지금도 저기 거리에 걸어 다니는 많은 사람들처럼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숨을 쉰다. 암세포가 발견된 것도 아니고, 잡아내지 못하는 세균에 공격받은 것도 아닌데 그럴 리가 없다. 무엇 때문에, 무슨 잘못을 해서 이런 병이 생긴 거냐고 따져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딱히 종교가 없던 은재는 어디고 그래 볼 데가 없었다. 따져볼 데가 있다고 해도, 초점 잃은 눈으로 굳어버린 기범을 앞에 두고 당장은 그래볼 수도 없었다. 우선은 남편을 일으켜 세우는 게 먼저였다.
부부를 쏙 빼닮은 딸 현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씩씩한 여자였다, 은재는. 키도, 손도, 얼굴도, 심지어 눈과 입도 작아서 첫인상은 여리고 소극적으로 보이기 쉬웠지만, 산타클로스 선물 보따리 정도는 너끈히 채우고도 남을 무모함을 어딘가 몰래 숨겨두고 있어서 일상이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결코 당황하거나 주눅이 드는 일은 없었는데, 탁월한 임기응변으로 자신의 무모함이 빚어낸 예상치 못한 일들에 능숙히 대처했으며 무엇보다 뼛속까지 그러해 보이는 낙천적 성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시작은 은재로부터였다. 여자라면 기본소양이게 마련인 직감이나 육감이 보통 여자들의 반도 안 되는 은재가 눈치챌 정도였으니, 기범이 은재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출퇴근 시간처럼 회사 내 일반정보의 수준이 된 지 한참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아, 좋으면 좋다고 말을 하든가요!"
회사 복도 자판기에서 커피를 막 꺼내고 있던 기범에게, 은재는 터지기 직전의 풍선 같은 조급함을 어쩌지 못하고 특유의 무모함 하나를 덜컥 꺼내 놓았고, 당연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기범을 매우 당황시켰다. 놓칠 뻔한 뜨거운 종이컵은 간신히 붙잡았지만, 평소보다 두 배는 커진 눈과 불에 댄 듯 빨개진 귓불로 '네, 네?' 하고 두서없이 되묻는 것 말고 기범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은재는 결혼하고 나서도, 기범의 그 표정을 두고두고 놀렸다.
조심스러운 사내 연애였지만 은재와 기범은 이 년이나 뜸을 들여 결혼했다. 남들 다 하는 눈꼴신 애정행각도 있었고, 다투고 토라지는 갈등도 빠지지 않았으며, 힘이 들 때 누구보다 든든한 위로가 되어주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서로에 대한 확신을 다져간 시간이었다.
두 사람 모두 때가 되었다고 여길 즈음 기범이 한 청혼에 은재는 잠시 아주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작은 입이 찢어질 듯 큰 웃음과 함께 두 가지 조건을 붙였다. 사람들이 보는 데서 코털을 뽑으면 안 되고, 안아달라고 하면 아무것도 묻지 말고 언제라도 꼭 안아 줄 것!
“혼자 있을 때도 뽑지 않을게! 입술까지 자라도 안 뽑을 거야. 네가 백 킬로그램, 아니 백오십 킬로그램이 되어도 널 안아 줄게!”
매일 밤 물구나무를 서서 자야 한 대도 그러마 했을 기범이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그냥 꼭 품어주는 거. 나 가끔 아플 때, 그렇게 위로해 주는 사람이 되어줘.”
잠시 뜸을 들였다가, 기범이 말했다.
“나도 소원 있는데…….”
그날 저녁에 당장, 기범은 은재의 손을 잡고 동대문으로 달려갔다. 젊은 여자에게 어울릴 발랄한 무늬의 비싸지 않은 치마들이 삼면 가득 걸려 있는 점포들을 누비고 누볐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이었지만 기범은 자기 옷을 사러 온 듯 당당했고, 그보다 몇 배는 들떴다. 철들고는 입어본 적 없는 치마를 고르는 일이 은재는 부끄럽고 쑥스러웠다. 늦은 초경에 처음 생리대를 사러 간 여자애처럼 진열된 옷들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점원이 은재에게 말을 붙이면, 기범이 나서서 대답하고, 점원이 다시 은재에게 확인하면, 은재가 마지못해 끄덕이기를 반복한 끝에 은재는 자잘한 꽃무늬가 빼곡히 들어찬 빨간색 날염 롱스커트 하나를 받아 들고 피팅룸에 들어갔다.
“뭐 이런 게 소원인 거야! 남자라면 세계평화는 못 되어도 남북통일 정도를 소원이래야 하는 거 아냐?”
치마가 어색한 은재는 거리에 나와서도 여전히 쭈뼛거렸고 기범은 그런 은재를 세상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랫단에 한 뼘 정도 잡힌 주름 장식이 키 작은 은재를 더 예쁘게 만들어 주었다.
“웨딩드레스도 입어야 하고, 언제고 치마를 입을 일이 있을 테니까 이건 연습 삼아 입어는 보는데, 자꾸 그렇게 보고 있으면 다시 안 입을 거야. 놀리는 것 같잖아!”
“아냐, 정말 너 오늘 너무너무 예뻐. 이 치마 평생 입어 줘라. 아니다, 그럼 아끼느라 매일 못 입겠네. 아끼지 말고 매일매일 입어 줘라. 아, 아니다. 지금 저 집에 가서 똑같은 걸로 한 열 벌 더 사 올까?”
발병한 지 3년 만에 기범은 혼자서는 간단한 산책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집 안에서도 혼자서는 스스로를 충분히 건사해 낼 수 없었다. 어차피 몸이 성하다 해도, 저 하나 똑 부러지게 챙길 줄 아는 남자 세상에 별로 없을 거라고, 은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우스갯소리를 했다. 은재가 그럴 때면 기범도 낄낄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찡그린 표정에 천식 환자 숨소리 같았지만 은재는 알았다, 기범이 웃고 있다는 걸. 그리고 또 알았다, 기범이 순전히 즐거워서 웃는 건 아니라는 걸.
기범도 은재도 서로의 힘든 부분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각자 힘든 것을 내색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서로에게 고마움을 표 내어 말하지도 않았다. 힘들다 하든 고맙다 하든, 두 사람이 감당해야 할 운명의 무게를 고스란히 드러내게 될까 봐 두려웠다. 어찌해도 끝내 피할 수는 없겠지만, 맞서거나 수긍하겠다는 따위의 진지함은 미루어 두고 그저 일상적인 삶의 모습으로 가볍게 채워 가려했다. 그렇게 해서, 아무렇지 않다고 여기고 싶었다. 그래야 특별할 것 없다고 여길 수 있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지금’이 더 오래갈 수 있도록. 은재도 기범도 그들이 서로 웃는 ‘지금’이 그나마 가장 괜찮은 날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조금씩이든 갑자기든, 어차피 하루하루 나빠지기만 하는 거니까.
은재는 결혼하며 그만두었던 예전 자리로 다시 출근했다. 병이 진행되어 퇴사하는 기범의 사정을 알게 된 회사의 특별한 배려 덕이었다. 기범도 처음에는 은재와 아이들이 아침마다 헐레벌떡 나가고 나면 뭐라도 해보려 애를 써 봤다. 가족들에게 짐만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아프기 전에는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던 일들이, 이제는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일이 되어있었다. 몇 개 안 되는 빨래도 무거워서 널 수가 없었고, 좁은 마루에 청소기를 끄는 것도 힘에 부쳤다. 못하기만 할 뿐이면 다행이었다. 기범의 노력이 오히려 저지레를 만들었다. 세제를 통째로 쏟았고, 청소기 먼지통을 엎었고, 접시와 화분을 깨뜨렸다.
은재는 여전히 씩씩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힘겨웠다. 기범이 다시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대로 더 나빠지기만 한다는 사실. 앞으로 더 뭐라도 바랄 수 없다는 사실 앞에 무너지려는 은재를 붙잡고 있는 것은 아이들뿐이었다. 안 그런 척, 천성대로 낙천적인 척 지냈지만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화가 났고 짜증이 치받쳤다. 적응이 되었나 싶다가도 몸이 힘들어진 만큼 마음이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아픈 아빠 때문에 마음이 웃자란 아이들을 떠올리며 버텼다. 어느새 은재는 가족을 지키는 최전선에 서 있었고, 동시에 최후의 보루가 되어있었다.
안방에 환자용 침대가 들어오던 날, 신혼 가구로 장만한 화장대를 거실로 꺼내야만 했다. 방안에 딱 그만한 공간을 미리 만들어 놓았는데 막상 침대를 넣으려고 보니 문이 작아서 문제였다. 침대를 세워서 넣고 방향을 돌려 제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더 큰 공간이 필요했다. 인부 두 사람이 화장대를 들어내자 언제 찍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두 사람의 사진이 뽀얀 먼지를 덮은 채 거기 있었다. 은재는 사진을 들어 손바닥으로 먼지를 쓸어냈다. 어느 산등성이, 딱 붙어 서서 환하게 웃고 있는 기범과 은재 뒤로 연분홍 철쭉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에도 꽃만큼이나 환한 미소가 담겨…. 어, 어…. 쿵! 와장창!
위태한 목소리, 무거운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터졌다. 은재는 급히 거실을 살폈다. 거울이 산산조각으로 깨져 있었다. 헐거운 연결부위를 단단히 붙잡지 않은 탓이었다. 틀만 남은 거울과 깨어진 유리 조각이 흩어진 바닥, 거울 없는 화장대를 든 채 얼어붙은 인부들 뒤편 소파에 기범이 앉아 있었다.
화장대 안의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본 게 언제였는지 은재는 기억나지 않았다. 기범이 아프고 언제부턴가 안방 한쪽에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화장대였다. 신혼 가구를 장만할 때 은재는, 화장대를 놓고 몇 번을 망설였었다. 처음에는 거울만 하나 따로 걸고, 낮은 서랍장 맨 위 칸에 많지 않은 화장품이나 소품을 넣어둘 생각이었다. 넓지도 않은 신혼집, 공간도 넓게 쓰고 그렇게 아낀 돈으로 당장 실용적인 가전제품 하나라도 더 좋은 걸 사고 싶었다, 이 화장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기품이 있었고 아담했지만 거의 전신을 비춰볼 거울이 달려 있었다. 무엇보다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유난히 예뻐 보였다. 신접살림 중에 제일 애착을 보였던 것이었고, 기범의 간호와 재활을 위한 물품들에 하나씩 자리를 내주던 은재의 물건 중 마지막까지 안방을 지키고 있던 것이었다.
이미 굳어져 표정이 풍부할 수 없는 기범의 얼굴에도 서글픔이 묻어 있었다. 떨리는 팔을 힘들게 들어 거실 바닥을 향해 휘저으며 어눌한 발음의 몇 마디를 계속하고 있는 기범이 막상 자기보다 더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걸 은재는 알았다.
“다친 덴 없으세요? 어차피, 별 쓸모도 없어서 떼어다 버릴까 하던 거였어요. 당신, 괜찮아? 아유 놀래라. 난 또 뭐라고. 집이라도 무너지는 줄 알았네.”
은재는 들고 있던 사진을 기범의 손에 쥐여 주고 기범의 입가에 흘러나온 침을 닦았다. 그리고는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쩔 줄 모른 채 서 있는 인부들을 밀쳐내고 거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빗자루를 가져와 자디잔 조각들을 멀리서부터 쓸었고 큰 조각들은 따로 모아서 신문지에 싸서 버렸다. 진공청소기로 한 번 더 꼼꼼히 수습하는 동안 인부들은 설치를 마친 환자용 침대에 기범을 안아 옮겨주고 서둘러 돌아갔다. 은재는 인부들이 발을 다칠까 봐 신발을 신고 움직이게 했고, 그 탓에 안방과 거실에 희미한 신발 자국들만 어지러이 남았다. 물걸레로 발자국을 지우고 오니 사진을 꼭 쥔 기범이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새 침대가 그렇게 좋아? 뭘 그렇다고 우냐?”
“으응, 저언…보다, 헐씨인, 편하…고, 좋아.”
“그럼, 더 잘 자고, 더 잘 먹어서 어서어서 일어나. 내년 봄에는 이 사진처럼 철쭉밭에도 다시 가게.”
욕창 패드를 제자리에 맞추며 은재는 일부러 더 밝게 말했다.
기범은 한동안 말없이 다시 한번 사진을 들여다봤다. 누운 채로 사진을 보느라 들어 올린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은재는 기범이 앉아서 사진을 볼 수 있도록 버튼을 눌러 침대의 등받이 경사를 조절했다.
“와, 이거 봐! 이거 정말 편하다!”
“차암… 예쁘었, 네…. 당신, 하고… 나. 우으리, 다….”
여전히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한 기범의 목소리가 일부러 호들갑을 떠는 은재의 목소리에 겹쳤다.
기범은 창을 향해 돌아눕고 싶었지만 혼자서는 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은재에게서 등을 돌리고 싶은 것이었지만, 고개만 겨우 돌릴 수 있을 뿐이었다. 은재가 보고 싶지 않아 돌아눕는 것도 결국 은재에게 부탁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새삼 무력감이 들었다. 몸에서는 힘이 빠져나가더라도 마음의 힘은 튼튼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다짐은 애초부터 지키기 어렵고 힘들 줄 알기 때문에 한다는 것만 새삼 알게 됐다. 할 수만 있다면, 하루에도 몇 번씩 끝을 내고 싶었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이제 끝이라고, 내가 결정하고 선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일이기만 하다면 말이다. 언제가 되었든 은재에게 그 말을 전할 수밖에 없는 날이 올 것 같아 미리 준비해 두긴 했다. 그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점점 자주 들었다. 아직 확신이라 할 수는 없지만, 하려면 너무 늦기 전에, 기범이 제 뜻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을 때라야 하니까. 말이든 표정이든 제대로 된 본심을 전할 수 없으면 오히려 은재에게 상처만 주게 되고, 은재의 마음에 원망만 남게 될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생각해도 기범의 철저히 이기적인 바람이었다. 은재가 기범의 마음을 백번 이해한다고 해도, 그 짐은 오롯이 은재가 질 수밖에 없었다.
창가에 놓인 행운목 화분을 볼 때마다 기범은 꼭 자신의 처지 같다고 생각했다. 누가 옮겨주기 전에는 꼼짝없이 놓아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 햇볕이 따가워도 그냥 견뎌야 하고, 목이 말라도 그냥 참아야 한다. 숨도 쉬고, 아프고 가렵고 다 알겠는데, 간간이 바람이라도 일어야 흔들리는 꽃잎과 이파리들처럼 기껏해야 움직일 수 있는 건 손가락, 발가락, 눈꺼풀 같은 것뿐이다. 몸은 굳어도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 예민해져서 사소한 것에도 더 상처받았다. 화초도 아마 그랬을 텐데, 기범도 여태 식물은 그저 원래 그렇다고만 여겼다.
행운목은 열흘 전쯤 하얗고 가느다란 꽃잎을 펼치고 온 집안에 향기를 가득 채웠다. 은재는 미소를 지으며 몇 년에 한 번씩 꽃을 피우며, 꽃이 피면 이름대로 행운이 가득하게 된다는 얘기를 전했다. 밝을수록 그림자가 도드라지듯, 향기가 강한 꽃일수록 시드는 냄새는 고약해진다. 이미 꽃잎이 누렇게 말라 들어가는 행운목은 지린내 같은 잔향을 남기고 있었다. 행복이 컸던 만큼 슬픔을 견디기가 힘들어질지도 몰랐다. 기범은 마지막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슬픔을 늘어지도록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서든, 남을 가족을 위해서든.
은재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 모임에 다녀온 날이었다. 남동생 식구들까지 함께 엄마 환갑을 축하하는 자리였던 탓에 예상보다 귀가가 늦어졌다. 시어머니께 기범을 부탁해 두어서 은재는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지만, 정작 기범은 편하지 않았다. 이제는 꼼짝도 못 하고 누워있는 아들을 지켜보게 하는 게, 그런 아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엄마를 봐야 하는 게. 처가의 중요한 행사에 얼굴이라도 비칠 어림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화도 났다. 고생만 하는 은재가 오랜만에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에, 저리 애들만 데리고 혼자 가서 좋아야 또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이 섞였다. 무엇 하나 기범이 어쩔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은재도 마냥 즐거울 수는 없었지만 모처럼의 가족 모임에서 평소 형편을 핑계로 소홀히 했던 친정 식구들을 두루 챙겨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아픈 사위 두고 환갑 챙기기 민망하다며 몇 번을 마다했다가 두 남매의 고집에 만들어진 자리였다. 처음은 여느 집 생일과 다를 게 없었다. 케이크에 초를 꽂고 아이들을 앞세워 노래도 불렀다. 남매가 같이 넣은 용돈 봉투를 드리면서 동생이 해맑게 한 얘기에 아빠가 동생을 꾸짖으면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아들, 딸, 손자, 손녀 다 데리고 해외라도 갔어야 했는데 이렇게 드려서 죄송하다고, 두 분이 가까운 데라도 다녀오시라고. 아들의 살가운 인사였지만, 아빠는 얼굴이 굳어졌다. 매형이 어쩌고 있는지, 네 누나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알면서 그런 얘기가 나오냐고, 당장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을 두고 다 같이 여행이라니 생각이 있느냐고. 동생을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아빠는 아빠대로 딸이 안쓰러워 그랬겠지만, 정작 은재는 자신이 야단을 맞는 것 같았다. 동생도 올케도, 엄마도 아빠도, 은재는 볼 낯이 없었다. 그런데도 따져보면, 막상 은재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서, 뭐라고 얘기라도 보태면 더 미안한 일이 될까 봐, 은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집에 와서, 은재는 한참을 울었다. 시어머니를 배웅하고, 아이들을 다 재우고 난 뒤였다. 현진이는 식당에서부터 엄마 눈치를 보면서 계속 현우를 챙기더니, 잠투정하는 동생을 토닥이다 같이 잠들었다.
기범은 잠들지 못한 채 누워서 처음부터 내내 듣고 있었다. 소리를 참으려고 애썼지만 은재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생각했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묻지 못했다. 안다 해도 기범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말하고 싶었다면, 은재가 저렇게 숨어서 울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신, 기범은 마음을 정했다.
한참 뒤에 은재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기범은 온 힘을 모아 소리를 짜내 은재를 불렀다. 여으버어, 어으, 으은재야아!
벌써 잠든 줄 알았던 기범의 소리에 은재는 얼른 표정을 바꿔 기범을 보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우물거리는 기범의 입 앞에 귀를 가까이 대고도 몇 번의 확인을 거치고 나서야 은재는 기범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핸드폰. 동영상. 내 핸드폰. 영상, 편지. 찾아, 봐. 지금, 꼭.
은재는 늦었으니 자고 내일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기범은 고집을 부렸다. 은재는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했지만, 평소 같지 않은 기범의 고집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벌써 해지되어 통화가 안 되는, 마지막으로 기범이 손에 쥐고 있던 게 언제인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스마트폰을 통장이며 도장, 두 사람의 결혼 예물이 뒤섞여 담긴 서랍에서 꺼냈다. 방전된 핸드폰에 충전선을 연결하고 갤러리를 뒤적여 기범이 말한 영상을 찾아냈다. 핸드폰을 어디에 세워두려는 듯 영상의 첫 부분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기범의 웃는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지금보다 훨씬 분명한 발음과 밝은 표정의 기범이 거기 있었다. 화면 속에서 기범이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범이 채 몇 마디를 시작하기도 전에, 은재의 두 볼에는 억지로 멈췄던 눈물이 다시 주르륵 흘러내렸다.
일상은 의외로 견고했다. 더 나아지려고, 어떤 희망이라도 찾아보려고 애쓰던 때에는 그렇게 위태하고 불안하기만 하더니, 다 포기하고 나서야 은재는 알게 되었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돌아가는 게 자연만이 아니라는 걸. 사람살이도 그렇다는 걸.
아침이면 기범의 침대 옆에 펼친 이부자리에서 눈을 뜨고 습관처럼 기범을 살핀다. 아이들과 아침을 챙겨 먹고 아이들은 학교로 은재는 직장으로 가고 나면 아홉 시에서 열두 시까지 요양보호사가 기범을 돌본다. 오후 시간에 시어머니나 시누이가 오는 때도 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은 은재가 퇴근해서 돌아올 때까지 현진이나 현우가 아빠를 봤다. 아이들에게는 벅찬 일이었지만, 응급상황이 아닌 일상의 수발은 이제 아이들도 다 해낼 만큼 적응이 되어있었다. 이제는 표정도 없이 계속 누워만 있는 아빠에 스스럼없이 익숙해진 아이들이, 은재는 대견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아빠에게 응석이나 애교를 부려본 기억도, 제대로 야단을 맞아본 기억도 없을 것이다. 멍하니 아이들이 아빠에게 하는 걸 지켜보던 은재는 혹시나 아픈 아빠를 짐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저 혼자 놀라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다잡기도 했다. 자신이 그런 마음을 갖고 있지 않고서야, 아이들이 그럴 거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처음에는 기범이 미웠다. 온통 미운 마음뿐이었다. 자신이, 아이들이 애쓰고 고생하는 걸 몰라준다는 배신감이 가득했다. 어쨌든 가장 힘든 건 기범이겠지만, 몸이 그렇다고 생각이, 마음이 고장 난 게 아닌 이상 기범은 여전히 가족을, 사랑을 기억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은재는 생각했다. 기범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는 되지만, 결코 인정은 되지 않는 얘기였다. 그리고 이내 무서워졌다. 기범이 말하는 그 일도 무서웠고, 그런 말을 하는 기범도 무서웠다. 왜 자기에게 그런 일이 생기는지, 운명이란 게 있다면 그것도 무서웠다. 병에 걸린 건 피할 수 없었지만 기범이 말하는 그 일은 피할 수 있는 것이지 않나? 그러니 그건 운명이,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일이 아니지 않나?
은재는 더는 기범을 보고 웃지 않았다. 회사 일을 하고, 퇴근을 하고, 간단한 저녁을 준비해서 먹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면서 학교 이야기를 듣고, 양치를 꼼꼼히 하라고, 손발 깨끗이 씻으라고 잔소리를 하고, 텔레비전 드라마를 조금 보다가 잠이 들었다. 주말이면, 줄여서 이사 갈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주인 할머니가 편의를 봐줘서 바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가긴 가야 할 형편이었다. 그 사이사이 언제라도 기범에 관한 생각이 없던 때가 없었지만, 기범을 향해 쏟는 마음은 일부러 줄이고 단속했다. 그게 기범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가혹한 벌이었다. 딱 그만큼 은재도 똑같이 받는 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기범에 대한 원망을 풀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기범의 상태는 더 나빠져서 음식을 삼키는 것도 힘들어졌다. 어떻게든 콧줄을 달 정도가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바로 내일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날이 될 수도 있었다. 기범은 은재를 볼 때마다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기범이 눈으로 하는 말을 읽게 될까 봐 은재는 되도록 기범의 눈을 피했다. 그럴수록 기범은, 눈동자를 움직일 수 있는 시야 안에서, 은재를 끊임없이 쫓으며 기다렸다. 은재가 다시 자기를 똑바로 바라봐주기를. 은재가 그렇게 자신의 현실과 자신이 어렵게 결정한 일을 피하지 않고 대해 주기를. 그렇게 은재가 이해해 주기를.
모르는 척했지만, 은재도 알고 있었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기범이 은재에게 하는 말. 핸드폰의 영상을 보여준 날부터 한 번도 달라지지 않은 기범의 바람을.
어쩌면 그게 사랑일지도 몰랐다. 기범의 판단은 자신이 겪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이 제일 크겠지만, 단지 그것뿐인 건 아니라는 걸 은재도 알았다. 남은 가족을 생각해보지 않았을 기범이 아니다. 기범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 속에는, 자기 때문에 고생하는 가족들을 무력하게 지켜만 봐야 하는 일도 들어 있을 것이다. 결국은 처음부터 은재도 그런 마음 씀이 더 아팠던 것이다. 그래서 밉고, 그래서 무서웠던 것이다.
몇 군데 복덕방으로 소득 없는 발품만 팔다 온 저녁, 아이들을 재우고 은재는 기범에게 갔다. 전처럼 기범이 꼭 안아 줬으면 싶은 날이었다. 기범의 침대 가장자리에 조심스레 앉아서 기범에게 많은 말을 했다. 오늘은 못 찾았지만 갈 만한 데를 곧 찾을 거라고, 정 없으면 딱 마음에 들진 않아도 한 군데 봐둔 데는 있다고, 어쨌거나 이 겨울은 지나고 날이 따뜻해지면, 아이들 새 학기에 맞춰서 이사해야 할 거라고, 현진이가 더 크면 방을 하나 만들어 줘야 할 텐데 그게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때 되면 어떻게 되지 않겠냐고, 얼마 전에 본 시험에서도 또 백 점 맞은 거 아느냐고, 현진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제 할 일 알아서 하니 걱정할 필요 없을 거라고, 현우는 아직도 천진난만인데 저도 곧 철들지 않겠냐고, 현진이가 너무 일찍 철이 들어서 현우가 그러는 게 외려 귀엽기도 고맙기도 하다고, 오늘 같은 날은 당신하고 같이 다녔으면 좋았을 거라고, 그랬으면 데이트할 때처럼 손도 잡고 같이 붕어빵도 사서 입김을 호호 불며 먹었을 거라고, 사실은, 당신 미워서 벌주고 있었던 거라고, 정말 어떻게 그런 말을 준비했는지, 또 내게 보여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은재는 침대에 누운 기범에게 쓰러져 울었다. 기범은 알았다. 청혼하던 날 은재에게 했던 약속대로 지금이 은재를 꼭 안아 줘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하지만 기범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운 채 미안하고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속으로만 말했다. 기범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따스한 햇살이 야트막한 담장으로 둘러싸인 잔디 마당에 내리쬐고 있다. 띄엄띄엄 서 있는 나무에 파릇한 새순이 돋은 걸로 봐서 이미 봄 속에 풍덩 들어와 있는 것 같다. 황사도 미세먼지도 없는 맑은 하늘도 온기를 머금고 있는 걸 보면, 정말 제대로 된 봄이다. 은재는 마당 가운데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마당 곳곳에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 있다. 잘 아는 얼굴들도 있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다들 격식을 갖춘 걸 넘어 멋지게 차려입었다. 이미 서로를 잘 알고 있는지 스스럼없이 웃고 인사를 나눈다. 누구도 슬픈 표정이 없다.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밝은 표정으로 한편에 차려놓은 다과와 음료를 즐기고 있다. 술도 마시지만 취해서 주정하는 이 없고, 바쁘거나 조급해서 안달하는 사람 없다.
은재는 여기가 어딘가 떠올리려 애를 써 본다. 언젠가 한 번은 와본 적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은재에게 다가와 알은체를 하고, 손을 잡고 살갑게 인사를 한다. 은재는,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연신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답례를 한다. 예쁜 드레스를 차려입은 현진이는 걸음도 동화 속 공주처럼 사뿐사뿐이다. 현우는 턱시도에 나비넥타이로 꼬마 신사가 되어서도 강아지를 따라다니느라 바쁘다. 강아지는 담장을 따라 피어난 파란 물망초 꽃들을 옮겨 다니는 나비 하나를 쫓고 있다. 까만 점 몇 개 예쁘게 박힌 하얀 나비다. 화려하지 않아 정겹다. 여전히 영문은 모르고 있지만, 처음으로 보는 아이들의 멋진 모습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누구의 결혼식인가? 어떻게 이 많은 사람이 다 모였지? 은재는 여전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지도 않는다. 은재의 기억이나 머릿속 말고, 표정이나 행동은 이미 다 준비되어 있고 알고 있는 듯 이어지고 있다.
잠시 사라졌던 현진이가 양쪽으로 각각 외할머니와 할머니 손을 잡고 나타난다. 친정엄마도 시어머니도 밝고 고운 한복을 입고 있다. 은재는 두 분을 맞으려고 일어서다가 긴 치맛자락을 밟으면서 잠깐 중심을 잃는다. 주위를 둘러보느라 여태 자신을 살펴보지 못했다. 은재도 텔레비전 시상식에서나 봤을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있다. 누가 봐도 이 자리의 주인공이다. 왜 나일까? 내게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왜 나일까?
은재는 갑자기 화려한 자신의 모습이 당혹스럽다. 남편도 아픈데 이런 성대한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왜 이런 자리가 만들어졌는지 몰라 걱정이 밀려온다. 그런 은재에게 현진이 손을 잡고 온 두 어머니가 다가와 웃으며 어깨를 다독인다. 걱정하지 말라고, 괜찮다고 표정으로 전하는 것 같다. 잠시 은재의 마음속에 일었던 불안이 잦아들고 다시 조금 전과 같은 평안함이 퍼진다.
갑자기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며 왁자하게 반기는 목소리에 간간이 박수가 섞인다. 정말 기다리던 주인공이라도 등장한 모양이다. 몰려든 사람들의 무리가 양쪽으로 천천히 갈라지며 그 사이에서 한껏 고무된 표정의 기범이 당당하게 은재를 향해 걸어온다. 기범이 그토록 활짝 웃는 모습을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나 싶다. 기범도 현우처럼, 턱시도에 나비넥타이를 하고 단정하게 자른 머리는 잘 넘겨 빗었다. 레드카펫 위에 선 연예인처럼 화려하고 멋지다.
기범이 일어나다니. 오래전 기억인가 싶었는데, 어제까지 보았던 야윈 얼굴이 맞다. 겉보기는 그대로인데 활기가 넘치고 움직임이 자유롭다. 그토록 바라던, 바로 그 모습으로 기범이 다가온다.
어느 사이에 은재를 다독여주던 두 어머니는 사라지고 없다. 혼자 있는 은재를 기범이 다가와 꼭 안아 준다. 너무 세지도 않고, 너무 조심스럽지도 않게. 은재가 몇 년 동안 사무치게 바랐던 순간이다. 정말 기범이 이렇게 안아 준다면 은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은재는 눈물 대신 오래전 늘 그랬듯 미소를 함박 짓는다. 기범이 은재를 안았던 팔을 풀고 풍경이라도 구경하듯 마당 가 담장 쪽으로 걸어간다. 거기 서서 시선이 닿는 저편 아래쪽,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기범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은재는 마침내 오늘이 무슨 날인지 깨닫는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여기에 모였는지. 아, 그렇구나…….
은재는 조용히 현진이와 현우를 불러 자세를 낮춰 아이들과 눈을 맞춘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서 온화한 미소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현진아, 현우야. 엄마 말 잘 듣고, 오늘 하루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해줄 수 있지? 아빠에게도 우리에게도, 오늘은 무척 중요한 날이거든. 아빠하고 얘기도 많이 하고 아빠를 꼭 안아 드리렴. 그리고 절대로, 아빠 앞에서 울지는 마. 아빠는 우리가 우는 걸 보고 싶지 않을 거야. 알았지? 자, 약속!
여보, 은재야!
놀랐지? 놀랐을 거야. 그래도, 좀 반갑지? 나, 지금쯤 많이 망가지고 미워져 있을 텐데…. 나 이거 찍으려고, 세수도 새로 하고, 머리도 빗고, 수염도 깎았어. 아, 코털도, 코털도 잘랐어. 좀 말끔해 보이고 싶어서.
아무도 없는데 핸드폰 보고 말하려니까 어색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영상통화라도 자꾸 그래 볼 걸. 방송에서 보던 영상 편지라는 거, 연예인들 다 써준 대본대로 하는 거라고, 좀 가식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막상 대본 같은 게 없으니 쉽지가 않네.
사실 이거 세 번째 찍는 거야. 아, 이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내가 말 안 했으면 NG 없이 그냥 한 번에 OK 컷 찍은 건 줄 알았을 텐데. 그걸 못 숨기고 다 말하네. 나 원래 이렇게 입이 가볍지 않았는데, 너랑 같이 살면서 닮아진 거야. 말이 너무 많아졌어, 좋아서, 행복해서.
은재야!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어떻게 표현해도 내 마음 다 전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넌 말 안 해주면 아직도 모를 것 같아서, 꼭 얘기해주고 싶었어. 너무 좋아서 들고 있던 커피잔 떨어뜨리고 그런 건 아니지? 우리 구은재 씨, 내가 말 안 하고 혼자서 마음에 담아만 뒀다고 얼마나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노래라도 한 곡 불러주고 싶은데, 내가 전처럼 멋지게 부를 자신이 없어. 몇 번 해 봤는데, 호흡이 짧아서 마음에 안 들더라고. 그래도 듣고 싶으면 말해. 내가 언제 한 번 마음먹고 시도는 해볼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못해질 거라 별로 자신은 없지만.
아직 별로 상상은 잘 안 되는데, 좀 지나고 나면, 어쩌면 지금처럼 편하게 말하는 것도 안 될 거라고. 찾아보니 그렇더라, 눈을 깜빡여서 글자 하나씩 맞춰가면서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많이 망설였지만, 일단 찍어 두기로 했어. 정말로 이걸 네가 보게 될지는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그치만 어쨌든, 뭐라도 남겨 놔야 할 것 같아서.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나중에 정말 이 얘기를 하고 싶을 때가 온다면, 그때는 당신한테 지금처럼 담담하게 전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지금 이거하고 있어.
은재야! 사랑하는 우리 여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다르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내가 말하는 그대로만 들어줬으면 좋겠어. 나도 숨기거나 과장 안 하고 내 마음 그대로만 얘기할 테니까, 당신도 다른 생각 더 보태지 말고 담담히 들어줘. 부탁이야.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 얼마나 더 나빠졌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이걸 당신한테 보여줬다면 나는 이미 견딜 만큼 견뎠고, 힘들 만큼 힘든 다음일 거야. 간절히 찾던 한 줄기 빛 같은 거, 더는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거야, 지금. 요즘 나와 너를 보면 몇 달 뒤에도, 몇 년 뒤에도 아마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긴 해. 그런데 더 오래되면, 십 년 뒤에 또 더 오랜 뒤에도 생각대로 계속 잘 해낼지, 나는 자신이 없어. 미안해. 약한 소리 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식물인간처럼 있더라도 딱 정해진 몇 년만 앓고 돌아오는 거라면, 견딜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우리, 알고 있잖아? 의사 말도 그렇고,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좋아졌다는 사람 없으니까. 지난 일 년, 나를 봐도 그렇고.
의식은, 감각은 그대로인데,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삶을, 나는 살아갈 자신이 없어, 은재야.
나는 점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갈 거야. 어떻게 발버둥을 쳐 봐도 바꾸기는커녕 스스로를 건사하지도 못하는 삶을 견딜 수 없어.
그래서 부탁해.
네가, 나를, 보내 줘.
내 영혼은 지금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내 육체에 갇혀서 절망하고 있을 거야. 당신과 아이들에게 갚을 수 없는 미안함으로 나 자신을 증오하면서. 그런 내 영혼을 네가 풀어 줘. 훨훨 날아가도록. 고치에 갇혀있던 나비가 첫 날개를 펴고 날아가듯이, 이 세상에서의 삶은 그것으로 끝이 되겠지만 내 영혼은 비로소 자유로운 안식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부탁해.
아주,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이해해 주길.
언제라도, 하지만 너무 늦지 않은 때에, 베개로 내 얼굴을 덮고 나를 꼭, 잠시만 꼭 안아 줘. 내가 고치를 깨고 날아갈 잠시 동안만. 내가 좋아하는 빨간 꽃무늬 치마, 그걸로 베개를 감싼다면 더 좋겠어. 그걸로 충분해.
어쩌면 지금쯤, 네게 이걸 보여주려고 마음먹고 나서부터, 내가 혼자서 어떻게 할 힘이 남아 있을 때, 내 힘으로 결정을 내리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 아마 그렇게 후회하고 있을 거야. 그랬다면 이건 영원히 아무도 못 보고 지나가겠지. 그랬어야 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으니 네가 이걸 보고 있는 걸 거야.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미안하고 미안해, 은재야. 하지만 내가 할 수 없는 지경이라면,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생각해. 아니, 너 아닌 다른 사람은 안 돼. 너, 나와 가장 가깝고, 나를 제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
우리가 세상에서 맺은 인연, 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었어. 지금 이렇게 힘들지만, 세상에 태어난 걸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아. 당신을 만났고, 우리 아이들, 현진이, 현우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당신과 함께한 시간 동안 내가 갚아야 할 고마운 게 너무나 많은데, 그걸 다 못 해줘서 미안해. 앞으로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그런 절망스런 상황이 또 미안해. 아무리 미안하다고 해도 갚을 수가 없다는 거 알아.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 말고 다른 말로 할게.
고마워, 은재야.
사랑해.
(2021 『약사문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