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이 눈부신 오후였다. 아버지는 일부러 그렇게 아늑한 날을 골랐을 것이다.
내가 대문을 들어서는 기척에도 아버지는 한동안 정성 들여 거울만 닦으셨다. ‘다녀왔습니다’ 하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당신을 지켜보던 내게 잠시 눈길을 주셨지만 이내 손에 쥔 걸레를 깨끗이 빨아 한 번 더 꼼꼼히 닦고서야 마무리하셨다. 아버지가 거울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신 뒤, 텅 빈 마당은 어느 한옥의 고즈넉한 오후 풍경처럼 조금 쓸쓸해졌다. 나는 왠지 그 일련의 과정에서 아버지의 온 생애를 본 것만 같았다. 짧고도 긴 시간이었다.
천성이 조심스러운 아내는 내가 보지 못한 그 오후의 일을 전해주며 염려와 곤혹이 섞인 표정으로 치매라는 말을 꺼냈다. 작정하고 닦는다면 십 분이면 충분할 일을 한 시간이 넘도록 붙잡고 계셨으니 아내가 그리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깨진 자리에 살뜰히 덧붙인 테이프마저 누렇게 색이 바랜, 이미 소용도 없는 오래된 거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 안 구석구석 모르는 곳 없이 도맡았던 아내도 본 적 없는 거울을 매일 그러시기라도 했던 듯 아버지는 익숙하게 다루셨다고 했다. 나는 그저, 몇 해 전 어머니를 앞세우고 혼자 일흔을 훌쩍 넘기면서도 아버지가 매사에 보여준 변함없는 통찰력과 균형감각을 아내에게 상기시켰다. 주머니에 담배 부스러기 하나도 흘리지 않을 만큼 꼼꼼하신 분이 봄볕 아래 마음먹고 거울을 닦았으니 그렇지 않았겠냐고. 나 역시 그때는 아버지에게 그 거울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하지 못했으니까.
이제 생각해 보면,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건가 싶기도 하다.
거울을 보고 금방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었지만 나는 곧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깨어진 거울. 오래전, 아버지가 손수 깨어 버리셨다가 수습하여 몇 번의 이사에도 버리지 않고 챙기셨던 거울. 아버지가 그 망가진 거울을 각별하게 여긴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거울에 대해 아버지가 품은 의미를 짐작하게 된 건 얼마 전이다.
며칠 후 아버지는 의식을 놓으셨다. 꼼꼼히 잘 조절해 오시던 혈압과 혈당을 일순간에 놓쳐버리신 것이다. 의사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봄이 다 가기 전에 아버지는 끝내 유명을 달리하셨다. 준비라도 했던 것처럼, 깨어진 거울 정성 들여 닦던 뒷모습 하나 유언처럼 내게 각인시켜 두시고 말이다.
아버지가 거울을 내던진 것은 내가 중학생이던 어느 봄날이었다.
여동생과 나는 안방에 차린, 둥그런 아침상에 앉아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하고도 꾸역꾸역 밥술을 떠 넣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아침 정시 뉴스가 흘러나왔다. 도시에서는 연일 시위가 이어졌고, 장마는 늦어져서 7월에야 시작될 거라고 했다. 벌써 식사를 마치고 출근을 서두르던 아버지는 대청마루 벽에 달린 거울 앞에서, 어머니가 철 이르게 꺼내 다려 놓은 여름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막 터뜨린 나팔꽃에는 아직 이슬이 달렸고, 배추흰나비가 마당 가득 고인 아침햇살에 날개를 말리던 참이었다.
거울이 깨지는 요란한 소리는 할아버지 상을 치르고 여전히 근신하던 집안의 평온을 일시에 흩트렸다. 오래된 흑백 스틸처럼 그 순간은 내게 남았다.
어머니는 재래식 부엌에서 식구들의 도시락을 싸다 말고 놀라서 쫓아 나왔다. 밥 먹던 숟가락을 던지고 대청으로 뛰어간 여동생과 내가 본 것은 나무로 된 테두리만 남기고 조각조각 깨져 마루에 어지러이 흩어진 거울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조금 전 아침상에서와는 달리 무척 상기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깨진 거울을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나는 평소에는 보지 못한 아버지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더 마음에 걸렸다.
“정태 아빠, 왜 안 하던 실수를 하고 그런대요? 이게 어떡하면 이렇게 깨진다니? 이 일을 어째! 정태야, 유리 밟을라. 이리 나오지 말아라. 정희야, 넌 빨리 빗자루하고 걸레 가져오고.”
상반신 정도 비춰 볼 수 있는, 오래전부터 대청 한쪽 벽에 달려있던 거울이었다. 그나마 집에 있는 거울 중에는 제일 커서 가족들 누구나 거울이 필요하면 으레 그 앞에 서곤 했었다.
분명한 것은, 아버지가 거울을 고의로 깨뜨렸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실수나 사고로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벽을 가로지르며 한 면을 드러낸 굵은 들보에 대못을 치고, 튼튼한 철사로 매달아 흔들림도 없이 수년을 걸려 있던 거울이었다. 지탱하는 철사를 고의로 빼내지 않고는 떨어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더구나 깨진 거울 테두리가 놓여 있던 곳은 벽에서 꽤나 멀었고 유리 조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분명, 내쳐진 것이다. 하지만 왜? 아버지는 평소처럼 차분히 출근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드가 밥 무라.”
정희가 소제도구를 가지고 오기도 전에, 아버지는 상기된 낯빛을 수습하고 내게 말했다. 하지만 완전한 안정을 되찾지 못한 목소리에는 여전히 떨림이 묻어 있었다.
아버지는 무릎을 굽혀 바닥에 흩어진 거울의 잔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손 다쳐요, 정태 아빠. 어서 출근이나 해요.”
어머니의 만류에 돌아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 아버지는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누가 밟아 다칠까 염려해서라기보다는 마치 소중한 것을 갈무리하듯, 작은 조각까지도 꼼꼼히 거울 뒷면 판자 위에 쓸어 모았다.
“여보, 그건 내가 치울 테니 어서 출근을….”
“됐소.”
어떤 말을 할 때보다 무겁게 내놓은 아버지의 한 마디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어머니도 더는 어쩌지 못하고 그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다가 손짓으로 우리를 재촉했다.
“어서 들어가 밥 먹고 학교 가. 구경났니? 지각해서 혼나지 말고!”
아버지는 대청과 마당에 흩어진 것들은 물론이고, 댓돌 위 신발까지 하나하나 털어가며 그 속에 든 거울 조각들도 마저 다 모아서 뒤꼍의 광에 넣으셨다. 어머니는 어차피 못쓰게 된 거울 뭐 하러 그러냐고 몇 마디 더 보탰지만, 절대 버리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아버지의 말을 별수 없이 따랐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새 거울 하나와 하얀색 오공본드, 투명 스카치테이프를 사 오셨다. 먼저 새 거울을 원래 자리에 달고는 곧장 광으로 들어가서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아, 저녁 안 드실 거예요? 다 깨진 거울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
“…….”
“당신도 참, 애들이 밥 못 먹고 기다리고 있잖아요!”
“무라 카소.”
저 고집 누가 말리냐며, 어머니는 거울과 아버지에 둔 관심을 거두었고, 우리는 아버지 없는 상에서 저녁을 먹었다.
두세 시간은 족히 지나서야 아버지는 작은 헝겊 조각을 들고 광에서 나오셨다. 그리고는 마치 기르던 개나 고양이가 죽었을 때보다 더 엄숙하게 그 헝겊 조각을 뒤란 담벼락 아래 묻었다.
아버지의 행동 하나하나가 내게는 풀지 못할 수수께끼였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문풍지 구멍으로 조심스레 아버지를 지켜봤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고 싶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확실히 있기는 한데, 짐작되는 게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내 행동은 괜스레 더 조심스러워졌다. 여동생은 텔레비전을 보며 깔깔댔지만 나는 주눅 든 강아지처럼 어른들의 눈치를 살폈다.
다음 날, 아버지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굳이 찾자면 말수가 조금 줄었다는 것과 전에 없이 어질고 인자한 미소를 가끔 머금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과묵한 분이라 내 조심스러운 마음이 과장되게 아버지를 관찰한 결과일 수도 있었고, 늘 그랬던 표정을 나만 특별하게 여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궁금증은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한동안 기회를 엿보기만 하다가 학교를 일찍 파한 어느 오후에 나는 결국 광을 가로지른 빗장을 풀었다.
광은 평소와 다른 것이 없었다. 쌀가마니들과 손 닿을 만한 높이에 걸어 놓은 마늘, 토란, 시래기에 빈 궤짝과 쓰지 않는 장독 몇 개,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있었다는 닷 자짜리 한약장, 문 틈새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소득 없이 광을 나오려는데 뽀스락, 발밑에서 소리가 났다. 딱딱한 바닥 위에 흩어진 고운 모래를 밟을 때와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좀 더 크고 날카로운, 잘 바스러지는 어떤 것을 밟는 느낌이었다. 그다지 비밀스러울 게 아니었는데도 딴에는 긴장하고 있던 나는 그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져서 황급히 발아래 바닥을 살폈다.
사금파리들. 빗겨 들어온 한 줄기 햇살에 반짝이는 건 사금파리들이었다. 처음에는 장독을 옮기며 떨어진 것이거니 했는데, 질그릇에서 떨어져 나온 붉은빛이 도는 가루들과는 달리 투명에 가까웠고, 각기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유릿가루, 조각이라 할 수도 없을 만큼 작은 유리 알갱이들이었다.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그 흔적들은 한약장 뒤편까지 이어져 있었다.
마침내 나는 한약장과 벽 틈새에 세워둔 거울을 찾아냈다. 바닥의 습기로부터 나무 테두리를 보호하려고 거울과 바닥 사이에는 몇 번 접은 밀가루 부대가 받쳐져 있었다.
조심스레 꺼내 본 거울은 대단하다 싶을 만큼 정교하게 각각의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 맞춰져 있었다. 나는 그 아침 산산이 조각난 거울을 기억하고 있었다. 접착제 자국이 남았고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투명테이프가 붙어있어 볼품은 없었지만, 무척이나 수고스러운 작업의 결과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재조합된 거울은 이미 사물을 그대로 비추는 본래의 기능을 잃어, 더는 쓸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이 쓸모없는 걸 왜 이토록 소중히 갈무리해 둔 걸까?
나는 거울을 원래대로 두고서 광을 나왔다. 한 가지 궁금증은 풀었지만, 한 가지가 더 남아있었다.
마당 가운데 빨랫줄을 받치는 긴 작대기를 빼 들고서 나는 곧장 그 저녁 아버지가 갔던 뒤란 담벼락 밑으로 향했다. 작대기 끝으로 몇 군데 담 밑을 파헤치자 아버지가 묻었던 헝겊 조각이 나왔다. 곱게 싸인 그 헝겊 조각을 급하게 열어보다가 안에 든 것을 쏟을 뻔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이 유리 조각들, 거울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삐쭉삐쭉하고 자디잔 유리 조각들 한 움큼이었다. 광에서 밟았던 사금파리들보다는 컸지만, 아버지가 거울을 손보면서도 제 자리를 찾아줄 방법이 없었던 파편들이었다.
고작 이것을 이렇게 고이 싸서, 더구나 그리도 숙연하게 묻었단 말인가? 아무 데나 사람 손 닿지 않는 곳에 버리면 되었을 것을 말이다.
나는 손에 든 헝겊조각과 그 속의 유리 파편들을 파헤쳐진 구덩이 안에 아무렇게나 넣고는 발로 대충 흙을 끌어모아 덮었다. 그때는 벌써 내가 가졌던 의문 따위 거의 사라져 버린 뒤였다. 짐작하지 못한 어떤 의미가 있다고 기대했던 만큼 실망이 더 커졌으므로, 내 마음은 이미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이 차지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부른 것은 그때였다.
“정태 니 거서 뭐 하노?”
언제부터 지켜보았던 것인지 아버지는 내 등 뒤, 뒤란 초입에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들고 있던 작대기를 놓치며 그대로 얼었다.
“…….”
막 퇴근하던 길이었을 아버지는 아무 대답을 못 하는 나를 잠깐 지켜보다가 작은 헛기침과 함께 대청으로 올라, 늘 하던 대로, 댓돌 위에 벗어 놓은 구두를 반대로 돌려 가지런히 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그대로 집을 나가 딱히 그래야 할 이유도 모른 채 개울가를 서성였고, 저녁때가 다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잘못을 들켰을 때처럼 무척 놀랐지만, ‘뭐 하노?’ 하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노여움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그 일로 아버지께 특별한 야단이나 꾸중을 들었던 기억은 없다. 아버지는 그냥 그대로였다. 그날의 일에 대해 언짢은 기색도, 어떤 언질도 없었다. 그저 예전처럼 든든한 언덕과 풍성한 그늘이었다. 그 거울은 일상 속에서 천천히 잊혔다.
할아버지의 심장병은 말년에서야 알았다.
자그만 체구에 마른 몸. 누가 물으면 평생 농사를 지은 분이라고 해야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할아버지를 전부 설명했다 할 수 없다. 마을의 대소사에 빠지는 법이 없었고, 장기, 화투를 위시해 잡기라고는 둘째가라면 서러웠고, 술이라면 주춧돌을 빼 팔아서라도 마셔야 했던 분. 그러면서도 때와 장소에 적당한 말과 행동을 지킬 줄 알았고, 인정이 넘쳐서 사람 아낄 줄 알았고, 안 될 일을 막무가내로 고집부리는 일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천덕꾸러기 취급은 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비틀비틀 취한 걸음에 꼬부라진 발음으로 흐트러진 모습이 잦은 데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얼마 안 되는 땅에만 의지해 살았으니 또 대단한 인정이나 칭송과도 거리가 멀었다.
갑자기 나빠지셨는지 계속 그래왔는데도 내색하지 않으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달 남짓 대학병원에 입원했으나 더 손 쓸 게 없다는 말에 설이나 집에서 쇠자고 나오셔서 달포 만에 돌아가셨다.
쨍하게 맑은 겨울날. 정월 끄트머리였지만 바람은 매웠고 땅은 꽁꽁 얼어있었다. 먼저 간 마을 어른들 다 그랬듯이 시골집 안방에 병풍을 치고 마당에 멍석을 깔았다. 정짓간에 있는 가마솥에는 밥을 하고 수육을 삶았고, 마당 한쪽에 시멘트 블록을 쌓아 만든 임시 아궁이에는 무쇠 솥뚜껑을 뒤집어 기름을 두르고 부지런히 지지고 구워냈다.
아버지와 삼촌들은 내내 빈소를 지켰고 어머니와 고모들은 상복 위에 하얀 광목 앞치마를 두르고 바삐 움직이다가도 때가 되면 같이 곡을 하고 절을 했다. 나는 딱히 뭘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그때그때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서 있고 인사하고 절하고 심부름을 했다.
“느그 할배가 니를 을매나 애낐는동, 니 아나? 아재?”
누가 내 손을 붙잡고 애통한 마음이라도 말씀하시면 나는 맏이인 아버지를 보고 배운 대로 숙연함과 고마움을 반쯤씩 섞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니 공부 잘하재? 잘해야 한대이. 니가 이 집 장소이따, 장손! 그케야 느그 할배 맘 편키 가시끼다.”
아버지가 목 놓아 울음을 터뜨린 것은 하관과 위령제를 마치고 하산하던 길이었다. 아침부터 입김으로 손을 호호 불며 모였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장지를 떠났고, 뗏장 작업을 봐줄 당숙 아재만 남고 다 같이 내려오던 중이었다. 염을 하고 입관을 할 때도, 가까운 일가의 살뜰한 위로의 말에도 감정의 동요가 없던 아버지는, 짧은 겨울 해 급히 넘어가던 그 오후에, 바람에 날려 쌓인 솔가리와 가랑잎 더미에 허물어지듯 엎어져서 눈물 콧물 범벅으로 목놓아 울었다. 그전에도 그 후로도,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고모와 삼촌 들이 다가가 오열하는 큰오빠를, 큰형을 안고 같이 울었다.
고백하자면, 아버지는 늘 타인 같았다. 매사에 사리 분별이 확실했고, 고지식하달 만큼 타협을 몰랐다. 안팎으로 따져도 꼬집어 흠을 찾아내기 어려웠지만 그래서 주위에 사람이 많지 않았던 분. 대놓고 비난받을 일 따위 결코 없었지만 좋다고 나서서 선뜻 손잡아주는 사람도 많지 않았던….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늘 나와 여동생에게 옳은 길을 가야 한다고 하셨고, 그 가르침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엄하게 꾸짖어 야단을 치셨다. 무서워서 어려웠던 건 아니다. 철이 들기 전까지 나와 아버지의 대화는 대개 반말이었다. 어른이라고, 아버지라고 겁을 먹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나와 여동생은 아버지에게 체벌을 받은 적이 없다. 짜증이나 분노가 앞선 야단도 없었다. 대신, 칭찬에는 인색했고 행동 하나 말투 하나 놓치지 않고 잘못된 점을 고치도록 지적했다. 당연히 내 자식이라고 무조건 싸고도는 일도 없었다. 취한 모습 한 번 보이지 않을 만큼 칼날같이 완벽한 자기관리를 보면서, 나는 아버지가 늘 멀리 있는 것 같았다. 공식적인 역할이 필요할 때는 누구보다 든든한 아버지였지만, 친근한 아빠가 있어야 할 자리는 늘 허전해서, 나는 때때로 서러웠다.
그래서 그렇게 무너져 내린 아버지가 내게는 새로웠다. 아버지에게는 저렇게 큰 슬픔이구나. 아버지를 잃는 건 저런 것인가 보구나. 나는 어른들을 따라 그렇게 울어볼 생각도, 나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저렇게 슬플까 하는 생각도 없이, 처음 보는 아버지의 모습에 놀라 서 있었다. 한편으론, 멀리만 있던 아버지가 성큼 가까이 다가온 것 같았다.
대학에 가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줄 알았다.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성적 같은 거에 목매는 건 유치해 보였다. 어른이 되지는 못하고 어른인 척하는 것만 배운 탓이다.
나는 휩쓸려 다니며 술을 마시고 얼치기로 구호를 외쳤다. 아버지는, 겨우 F만 면한 성적표를 보여드리는 아들이 무척이나 한심했을 것이다. 그나마 졸업 후 자격증 시험에만 합격하면 어느 정도의 밥벌이가 보장되는 전공이었기에, 당신의 판단으로는 무위도식이나 한량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들을 용인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집에서 꼬박꼬박 내주는 학비로 건들건들 대학을 다녔지만, 아버지의 학업은 힘겨웠었다.
당시에도 내다 팔 땅 한 뙈기, 소 한 마리 없어도 아들 하나는 어떡하든 대학까지 시키겠다는 부모가 많았다. 할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중학교 마치고는 농사일 거들기를 바랐던 할아버지를 거역하고 아버지는 집에서 먼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제자의 재능을 아까워한 담임선생님이 애써 알아봐 준, 학비를 면제받는 조건이었다. 아버지는 매일 꼭두새벽 지게를 매고 산에 올라 땔감을 한 짐씩 해 놓고 등교했다. 학업을 계속하려면, 그렇게라도 집에 힘을 보태야 했다. 생전에 아버지가 직접 들려준, 몇 안 되는 옛이야기다. 아침밥은 아직도 먼 새벽, 통학 기차 시간을 맞추느라 전날 밤에 남겨 둔 삶은 감자 몇 개에 간장독에서 꺼낸 무장아찌로 때우고 뛰어나가는 아들을 보면서, 할머니도 함께 서러웠으리라.
거의 고학으로 대학까지 마친 아버지에게 나는 한참 실망스러운 아들이었겠지만 그래도 믿음을 다 거두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큰 참견 없이 나를 계속 지켜봐 주었는데, 없는 셈 치거나 무시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당신의 기준에서 ‘출세’였던 판검사나 의사가 되리라는 기대는 벌써 접었더라도 제 앞가림은 별 탈 없이 하겠지 하는 믿음은 내내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성적은 엉망이었어도, 정의감은 넘쳐났다. 젊었으니까, 어렸으니까. 인생에서 중요한 건 당장 돈 벌어 떵떵거리는 것보다 마지막 순간까지 진정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부조리하고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라면 대들어 보기라도 해야 한다. 그런 것도 못 한 삶은 너무도 부끄럽지 않은가…. 겉으로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속으로는 그리 생각하고 지냈다. 운동권 언저리에도 기웃댔으나 그쪽 서적은 크게 몰입이 되지 않았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나 ‘스콧 니어링’의 책은 읽고 또 읽었다. 소위 문민정부 시대에도 곳곳에 여전한 권위주의와 불평등이 답답했다. 뛰어들어 세상을 바꿀 용기는 못 내면서 적어도 나 하나는 그러지 말자고 타협만 하는 꼴이긴 했지만.
아버지도 그런 나를 대충은 알았을 것이다. 뉴스에 보도되는 학생들의 시위에 한심한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는 아버지에게 대들어 언쟁을 만든 적도 있었다. 나는, 옳은 길을 가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냐고, 저마다 각자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들뿐인 세상이 맞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사람들이 저렇게 하고 싶은 말 하고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나라라고, 이 정도 만드는 데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희는 모른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하지만 그때의 내가 바로 아버지가 어렵게 만들어 놓은 세상의 가장 큰 수혜자였고, 기성세대가 구축한 사회구조에 이미 많이도 익숙해져 있었음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아버지는 대학 졸업 후 지방직 공무원이 되고부터 고향 집에서 멀어졌다. 요즘이면 차로 2시간이 안 되는 거리지만, ‘자가용’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차 있는 집이 귀하던 당시에는 마음먹고서야 움직일 거리였다. 책임감 강한 아버지 성격에 가정을 꾸리고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맏이 역할에 조금이라도 소홀하진 않았겠지만, 서로 간의 왕래는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전만큼 살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어른의 기준이라면, 아버지는 무척이나 어린 나이에 어른이 돼야 했었다. 어린 어른. 결코 녹록지 않았을 모든 걸 혼자 감당한 그 시절의 아버지 마음을 나는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내내 충분한 맏아들이었다. 지극 정성의 효자라고는 못해도, 할아버지 주위 누구에게라도 아들 하나 잘 키웠다는 말 어렵지 않게 들을 만큼은 되었다. 그렇지만 어려서 내가 본 두 분의 데면데면함을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는 내내 모종의 거리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부족한 뒷바라지에 대한 미안함 같은 걸 가질 분이 결코 아니었지만, 혼자서 그만큼 되기까지 아들이 겪었을 수고로움을 모르지는 않았을 테니, 아비로서 어찌 대견한 마음만 있었을까? 그렇게 묵묵히 앞가림해 내면서도 겉으로 한 번의 내색도 없는 아들의 모습이 오히려 무언의 시위처럼 비쳤을 수도 있으리라. 내가 아버지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에 기대 볼 여지를 쉽게 찾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도 할아버지와의 사이에 강 하나를 만들어 놓고 건너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내가 아버지에게 느끼는 종류와는 또 다른, 아버지가 직접 만든 고의적인 거리감이었다. 직접 들은 바가 없으니 추측일 뿐이지만, 아버지는 할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물려받은 땅 조금씩 떼어 팔며 평생 하고 싶은 대로 살았던 할아버지가, 아버지는 미웠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금방은, 아버지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표정은 전보다 조금 차가웠고, 말수는 더 줄었다. 당시에는 슬픔의 모습인 줄 알았지만, 나중에는, 애증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술에 취하는 게 뭔지를 알게 된 후에야 할 수 있었던 생각이다.
그런 아버지가, 거울을 깨뜨리고 난 다음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평생 하지 않던 약주를 하는 날이 생겼고 곧, 드물다 할 수 없을 만큼 잦아졌다. 하루는, 불콰해진 아버지가 나를 향해 혼잣말처럼 ‘니가 언제 내 마음을 알겠노?’ 하며 쓸쓸히 웃기도 했다. 나는 또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아무 대답도 못 했지만, 아버지의 달라진 모습이 영 불안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여전한 아버지였으니까.
그 이듬해 아버지는 인근 대도시로 영전했고 바로 한 해 뒤 행정구역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우리 가족은 더는 지방을 떠돌지 않게 되었다.
“별일이다, 별일. 사람이 바뀌더니 없던 수완이 다 생기나 보다.”
전근 소식에 환한 얼굴로 저녁을 차리며 어머니는 신바람이 섞인 혼잣말을 했다. 어머니는 도시의 아파트에 대한 기대로 들떴지만 나는 내가 자란 마당, 뛰놀던 마을을 떠나는 게 못내 아쉬웠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아버지는 드라마를 보곤 했다. 어머니는 안방에, 아버지는 거실에 각자 이불을 편 지 몇 년 지났을 때다. 간혹 귀가가 늦을 때 보면, 아버지는 불도 안 켠 거실에서 혼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엉덩이는 소파에 깊숙이 묻었지만 구부정한 상체는 팔짱을 낀 팔꿈치 아래 놓인 쿠션으로 받친 채, 뉴스도 스포츠 중계도 아닌 드라마에 빠져 계셨다.
내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노하게 했던 게 그 무렵이다.
돈은 없어도 시간은 많던 시절이라 예정 없이 잡힌 술자리가 늦게까지 늘어진 날이었다. 자리가 끝나면 알아서 집에 가겠다고 미리 전화했지만, 아버지는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나를 데리러 학교 앞까지 와서 삐삐를 쳤다. 어쩌다 보니, 남은 중에서는 제일 선배였던 내가 자리를 주도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여전히 분위기가 올라있는 무리에게 분명한 설명도 못 하고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많이 마셨지만 취하지는 않았고, 부끄러웠다. 화가 나기도 했다.
다 사라지지 않은 취기가 치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다음 날 아침, 어머니가 끓여준 북엇국을 놓고 마주 앉은 아버지께 그랬다. 좀 더 일찍 엇나가봤으면 좋을 뻔했다고.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정학 같은 거 먹을 사고도 치고 부모님 호출도 당해보고 그랬으면, 좀 더 일찍 어른이 되지 않았겠냐고.
“야가 지금 뭐라 카노! 니 그기 뭔 말이고?”
밥술을 뜨다 말고 노기 띤 얼굴로 한참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는 그대로 수저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날 이후 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온 적은 없다. 반대로, 면허를 딴 뒤로 내가 아버지를 모시러 간 적은 몇 번 있었다.
그중 어느 저녁을 기억한다. 너나없이 지내는 동료들과의 모임에서 아버지가 많이 취한 날이었다.
연락을 받고 서둘러 갔지만 아버지 일행은 이미 식당 앞에 나와 있었다. 술꾼들의 헤어짐이 으레 그렇듯 도로 한 편에 둘러서서 얘기가 계속되었으리라. 지나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는 목소리들. 아버지는 기분 좋은 흥분이 담긴 어설픈 발음으로 나를 주위에 일일이 소개했고, 나는 몇 번씩 인사를 했다. 아버지가 먼저 출발해야, 아직 흥을 깨고 싶지 않은 나머지 분들이 방향을 정할 분위기였다. 술기운에 주춤주춤 휘청이는, 전과는 많이 다른 아버지를 채근해 모시고 오면서, 잠시 나는, 아버지의 아버지가 된 것 같았다.
집 앞에서, 아버지는 깨지 않는 술을 이기려 애쓰며 차에서 내려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걸음. 흔들리다가, 멈췄다가, 우편함에 머리를 부딪힐 뻔도 했다. 급히 다가가 아버지 어깨 밑에 팔을 끼워 넣었는데,
“됐다.”
선명치 않은 발음에도 단호한 목소리. 아버지는 내 손을 뿌리쳤다. 아버지의 자존심을 읽어 더는 어쩌지 않았지만, 나는 섭섭했다, 위태위태한 아버지에 대한 걱정만큼이나.
‘아버지, 저는 당신의 아들인걸요. 당신이 제 아버지이듯이 말입니다.’
그때도 지금도 그 말을 못 한 아쉬움은 전혀 없는데, 그 말을 못 했다는 사실은 내내 기억에 남아있다.
나는 졸업할 즈음 만난 아내와 몇 년을 사귀다 아버지의 퇴임 전에 부랴부랴 결혼했다. 그 후에야 나는 조금이나마 어른에 가까워졌고, 그만큼 아버지는 늙어갔다.
발인 날, 화장을 마친 봉안함을 받아 안고서야 나는 아버지의 부재를 실감했다.
뜨거운 불 속에서 한 줌 가루가 된 아버지는 안치 때까지 내내 따뜻했다. 당연히 아버지의 것이 아니겠지만 여전히 당신의 것 같기도 한, 아버지에게서 내가 체감할 수 있는 마지막 온기였다.
의지와 상관없이 흐르던 맥락 없는 눈물들, 사흘 내내 이어졌다. 이유가 없었다. 슬픔은 내 속에 가득 차 있었지만, 문상 온 친구, 선후배 들과 농담하고 웃었다. 조문객이 없을 때는 빈소 앞에 앉아 아버지 영정을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따로 찍어둘 생각을 못 해 정년 퇴임 때 사진을 썼으니, 십수 년도 더 전의 모습이었다. 장례식장도 나도 그저 평온하게 가라앉은 듯 잠잠했다. 눈물이 계속 나지는 않았다. 그러다 한순간, 어떤 개연성도 없이, 명치 바로 위에서 시작해서 목을 향해 주먹만 한 뜨거운 게 치오르면 곧 시야가 흐려졌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쓱쓱 몇 번을 닦아내면 울음은 곧 그쳤다. 다시 손님을 맞아 예를 갖추고, 얘기를 나누고, 제를 올리다가 또, 때도 없이 눈앞이 뿌예지곤 했다.
아버지를 잃은 애통함이 전부는 아니었다. 내 마음에 들어차 있던 것들은 직접적으로 아버지의 한 생이 마쳐졌다는 슬픔, 그래서 내게는 세상에 나를 내놓은 근원이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고독, 나 역시 똑같은 길을 따르게 되리라는 숙명을 알게 된 숙연함 같은 것에 기인한 것이 맞기는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무언가가 차곡차곡 쌓여오고 있었다는 것을. 언제 어떻게 얼마나 보태져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먼지처럼 고운 흙이 잔잔한 호수 바닥에 앙금처럼 내려앉듯, 제각기 모양도 크기도 다른 슬픔이 쌓이며, 조용히 견디어 왔던 게 아닌가 싶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내 속에 숨겨두었던 그곳이 갑자기 드러난 것 같았다.
장지까지 오신 친척, 어른 들을 배웅하고서 화장실에 들러 찬물에 얼굴을 씻었다. 볼을 타고 말라붙은 눈물 자국도 없었고 당장 졸리지도 않았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사십구재가 남았지만 일단 사흘간의 장례식은 마쳤고, 집까지 꽤 먼 길의 운전이 남았는데, 그저 멍했다. 가는 길에 일부러 커피라도 사 마셔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여전히 내게 남은 것들, 이를테면 죄책감, 아쉬움, 회한 같은 게 조금은 같이 씻겨지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쉽지 않겠지만 형식적으로라도, 다음 날부터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그렇게 얼굴에 거푸 찬물을 끼얹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잠시 휘청, 했다.
햇빛이 내 눈에 난반사되었기 때문이었던가? 아니, 조그만 창문으로 비껴든 오후 햇살은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보았다. 거울 안에,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건 분명히 나인데, 거울 안에는 딱 내 나이의 아버지가 있었다. 착잡한 표정으로, 조금 더 살이 붙고, 안경을 썼지만 분명 아버지였다. 아, 아버지! 나는 휘청거리다 못해 짚고 있던 세면대에서 손이 미끄러지며 넘어질 뻔했다. 벽에 달린 핸드타월 통을 잡고 버티며 급히 정신을 다잡은 나는 눈을 꽉 감았다가 떠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거울 속에는 내 얼굴이 있었다. 분명히 나였다. 나, 아버지와 다를 것 없는 내 얼굴이 거기 있었다. 순간, 통곡하듯 울음이 터졌다. 아쉽고, 서글펐고, 고맙고, 든든했다. 밖에서 기다리던 아들이 급히 뛰어 들어왔지만 어찌할지 몰라, 오열하는 나를 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 봄날 아침에 아버지가 거울을 내던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역시 당신의 모습이 비친 거울에서 할아버지를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같아지지 않으려 애썼고 다르다고 많이도 부정했어도, 눈매가, 가르마가, 표정이 그런 것처럼, 생각도, 행동도 점점 할아버지와 같아지는 당신을 보았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같아지지 않으려 한 것은 이미 같았기 때문이고, 벗어나려 한 것은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고, 원망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것을.
아버지의 오래된 거울은 한복 상자에 보관되어 있었다. 아내와 함께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아버지 방 장롱 위 안쪽에서 찾았다. 더는 입지 못할 낡은 고동색 두루마기로 감싸서 넣어둔 거울에는 두루마기보다 더 오래된 스카치테이프가 누덕누덕 붙어 있었다. 이리 깊이 두셨으니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욕심 없던 분이라 남긴 것 얼마 안 되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것들이 많았다. 생전에 입으시던 옷가지와 이불 중 사십구재에 쓸 몇 벌과 헌 옷 수거함에 넣을 만한 일부는 따로 두고, 나머지는 버렸다. 돋보기안경, 자개 무늬가 박힌 손톱깎이 같은 생활소품들은 결정이 쉬웠다. 각종 서류와 주민등록증, 면허증같이 사진이 붙어 있는 증명서, 취미로 모으셨던 옛날 돈, 우표. 퇴임 때 받았던 훈장, 누렇게 삯은 어려서부터의 상장들, 사회에서 받은 감사패, 공로패 들, 혼자서 연마하며 써 두신 서예, 문인화 작품 들 등 개인의 역사라 할 수 있는 것들 앞에서는 망설였다. 태운다면 몰라도, 쓰레기봉투에 넣지는 못할 것 같았다. 마지막 장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일가의 생몰 연월시가 적힌, 비망록을 겸한 전화번호부도 있었다. 하나씩 찬찬히 들여다보고 꼭 남겨야 할 것만 따로 상자에 담았다. 아버지의 길고 긴 한 생이 내 머릿속에 다시 차곡차곡 그림처럼 채워졌으나, 그 역사의 중요 증거들은 그저 작은 상자 하나 분량일 뿐이었다.
나는 한복 상자에 두루마기 대신 큰 수건을 겹쳐 깔고 거울과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담았다. 아내는 그 다 깨진 거울을 무엇하려 그러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상자를 다시 장롱 위, 원래 자리에 올려 두었다.
“한동안만, 여기 둡시다. 아직 버릴 수가 없어. 그리 오래진 않겠지만.”
(2022 『월간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