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눈이 내린다. 벌써 삼 일째다. 오려면 <제국의 역습>에서처럼 엄청 와서 쌓이면 좋겠는데, 고작 이렇게 내려서는 눈 장난 같은 건 못한다. 길이 질척해져서 걷기만 더 힘들다. 걸으면서 나는 자꾸만 고개를 숙인다. 눈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빠를 따라가겠다고 한 건 나 혼자다. 이모와 할머니가 같이 살자고 했을 때, 처음에는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아빠까지 그러는 게 좋겠다고 하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바로, 아빠 다리를 꼭 붙들어 안고 펑펑 울어버렸다. 내가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른다. 분명한 건 아빠가 좀 미웠다는 거다. 아빠는, 같이 살자고, 적어도 한 번은 내게 말해줘야 하는 거였다. 아빠라면. 아빠니까! 겨우 처음 만난 아빠를 영영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마음도 조금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내가 그렇게 대성통곡을 하니까 세 사람이 같이 다른 방에 들어갔다가 한참 만에 나왔고, 결국 아빠가 내 손을 잡고 할머니 집을 나왔다.
아빠 집은 대체 어디쯤인 걸까? 지하철역에서 엄청 많이 온 것 같은데, 아직도 더 남았나 보다. 아빠는 한 솔로를 따라가는 츄바카처럼 느리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정작 앞서 걷는 건 나다. 아빠는 내 바로 뒤에서 나를 따라 걸으면서, 갈림길이 나오면 내 어깨를 두드려 어느 쪽인지 가르쳐 준다. 내가 일부러 천천히 걸어 봐도 마찬가지다. 할머니가 급히 싸준 가방을 들고는 내 뒤에서 아무 말도 없이 걷기만 한다. 어깨를 두드리는 손이 매번 다른데, 가방이 무거워 양손으로 번갈아 들기 때문이다. 무거울 수밖에 없다, 소중한 것들이니까. 할머니가 챙겨 놓은 데에다 내가 아끼는 것만 고르고 골라 보탰는데도 가방이 터질 것 같았다. 다음에 또 와서 가져가라고 이모가 안 말렸으면 아직도 고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중에서 몇 개는 영어 학원 가방에 담아 내가 메고 왔다. 근데 그게 너무 무겁다. 그래도 괜찮다. 소중한 것들이다, 엄마가 사 준. 근데, 눈까지 내려서 두 배로 힘들다.
지금 신은 부츠는 엄마하고 눈썰매장에 갈 거라고 샀던 거다. 지지난 겨울인가 그랬다. 금방 작아질 거라고 너무 큰 걸 사는 바람에 그때는 발이 자꾸 신에서 빠지려고 해서 씨쓰리피오처럼 걸어야 했지만, 지금은 엄마 말대로 작아져서 발가락이 아프다. 몇 번 안 신은 건데, 정말 금방 작아졌다. 할머니는 눈밭에서 뛰어놀려면 신이 발에 맞아야 한다고 그랬지만, 엄마는 양말을 두 개씩 신기면 된다고 우겼었다. 그러고도 결국 눈썰매장에는 못 갔다. 갑자기 엄마에게 일이 생겼다고 했었다. 엄마는 다음에 꼭 가자고 그랬지만, 나는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늘 바빴고 ‘좋은 말로 할 때’라는 말만큼이나 자주 그랬으니까. 다음에, 이다음에…. 하지만 엄마와 함께 할 ‘다음’은 이제 없다. 지금 같아서는 그때 더 큰 걸 샀으면 좋았겠다 싶다. 낡아서 버리게 되더라도 작아서 못 신지는 않을 테니까. 어쨌든 더 오래 신을 수 있을 테니까. 이제 더는 엄마가 내 신발을 사 줄 수 없으니까…. 신발이 꽉 껴서 발가락이 더 시리다.
나는, 또 뒤돌아본다. 열한 번짼가, 열두 번짼가? 아빠는 거기 있다. 어디 안 가고, 내 뒤에서 나를 따라오고 있다. 뿌득뿌득 눈 밟는 소리로도 이미 알고 있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아빠 얼굴을 확인한다. 그래도 아빠는 나를 보지 않는다. 앞을 보고 걷기는 하는데, 다른 어디 먼 데를 보는지 내가 돌아봐도 나하고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지하철 역 3번 출구, 계단을 올라온 방향 그대로 가다가 서진약국 옆 골목으로 쭉 들어와서 플러스마트에서 오른쪽으로 꺾었고, 조금 오르막인 길을 한 참 걷다가 파란 대문, 거기는 개 짖는 소리도 났는데, 거기서 왼쪽으로. 나는 지나온 길을 다 외우고 있다. 내가 몇 번째 돌아봤는지도 세고 있는데 그 정도는 식은 죽이다.
뭐 내 머리가 좋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다만 덤벙대지 않고 꼼꼼한 것뿐이다. 엄마가 그랬다, 내 천성이 그렇다고. 그게 칭찬인지, 놀리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크레파스로 색칠을 할 때, 밥그릇에 남은 마지막 밥풀들을 입에 떠 넣으려 숟가락으로 긁어모을 때, 누가 손에 쥐어준 동전들을 꼬박꼬박 저금통에 넣어 둘 때, 엄마는 혀로 ‘쯧쯧’ 소리를 내며 그랬었다. 꼼꼼타, 꼼꼼해…. 하지만 지금은 아빠를 확실히 믿을 수 없어서 그러는 거다. 아직은, 엄마 같을 순 없으니까. 처음 만난 아빠와 모르는 길을 가고 있는 거니까. 그러니 언제든, 마음만 먹는다면 할머니하고 이모를 찾아갈 수 있게 준비는 해야 한다. 당장은 그럴 수 없지만, 아주 나중이라면 몰라도. 아빠와 살 거라고 할머니한테 말한 건 나니까. 할머니와 이모가 우는데도 나는 가방을 메고 나왔으니까. 나는 그때, 울지 않았으니까.
아빠는 나를 안아주지 않았다. 나는 아빠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한번 꼬옥 안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할머니네 쬬꼬를 보면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쬬꼬가 쪼르르 달려올 때도 그러고, 싫다고 내빼도 쬬꼬의 배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번쩍 들어 올렸다가 꼬옥 품어준다. 그럴 때마다 쬬꼬는 그게 싫다는 건지 좋다는 건지 눈을 끔뻑이며 내 볼을 핥아서 내 품에서 벗어났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빠는 내 기대와 완전히 달랐다. 그냥 한 번 나를 잠시 아래위로 쳐다본 게 다였다. 나는 당황했고, 어색했고, 화가 나서 입이 튀어나왔다. 사진으로밖에 본 적 없는 아빠를 이 나이가 되어 처음 만나는 건 누구나 하는 경험이 아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나 된 내가 생각해 봐도 그건 어색한 게 당연하다. 매일 같이 밥 먹고, 같은 집에서 자고, 같이 목욕탕 가는 다른 보통의 아빠가 아니니까. 게다가, 조금 무섭기도 했다. 엄마가 늘 욕하고 나쁘다고 말하던 아빠였으니까. 그래도, 아빠는 달라야 했다. 정말 내 아빠라면 내 임자니까. 자기 거 찾으러 온 사람이니까. 잃어버렸던 걸 찾게 되면 당연히 기쁜 거니까. 물론 나는 잃어버린 게 아니라 맡겨졌던 거지만. 적어도 나를 번쩍 안아 올리고 크게 한 번 웃어주긴 했어야 한다. 숨이 막히도록 꽉 끌어안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아빠가 내 임자라는 건 벌써 알고 있었다. 저번에 내가 좀 가지고 놀았던, 그러다 결국 싸우고 야단을 맞았던 게임기는 재훈이 거, 중학생이 되면 제일 먼저 사기로 맘먹은 최신 스마트폰은 이모 거. 이런 식으로 모든 거에 임자가 있으니, 내게도 그런 게 있다면 그건 아빠라야 했다. 엄마는 맥주를 홀짝이다 한 번씩, ‘우리 기찬이 누구 거?’ 하면서 술 냄새나는 입술로 내 볼에다 뽀뽀를 하고는,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먼저 ‘기찬이 엄마 거!’라고 답을 정해 줬지만, 사실은 나를 맡아 길러주는 대가로 돈을 주게 되어 있는 아빠가 내 진짜 주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같이 살지도 않고, 엄마가 해주는 밥 한 번 먹지 않는 아빠가 엄마에게 돈을 왜 주겠어? 그 이름도 양육비라고 하는 걸로 봐서 그건 분명히 나 때문에 주는 돈일 거였다. 하지만 내 주인인 아빠는, 전부 엄마 말이긴 하지만, 그 돈을 거의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엄마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뭐라고 조르는 것도, 싫다고 투정하는 것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넘어져서 다치거나 아파서 울다가도 엄마 얼굴을 보면 나는 억지로 그치고 참았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한숨을 내 쉬며 그랬다. 벌써부터 눈치나 봐 쌌고, 니 인생도 뭐 다를 끼고? 부모를 잘 만났나, 타고난 재주가 있기를 하나?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뿌라. 울고 싶으믄 울고, 놀고 싶음 놀고, 노래하고 싶으믄 부르고. 나이 들믄, 안 할라 캐도 지절로 그래 된다. 니보다 쎈 놈, 니보다 돈 많은 놈 눈치 안 보곤 못 살 낀데 와 벌써부터 그라노? 에그, 빙신아….
치, 내가 재주가 없긴 왜 없어? 나는 다른 건 몰라도 내 마음대로 눈을 가운데로 모을 수도 있고 손 안 대고 귀를 움직일 수도 있다. 아, 제일 자신 있는 건, 물론 이건 누구한테 자랑하기는 어렵지만, 똥 참는 거! 나는 언제라도 똥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그러니 똥 마렵다고 엄마를 조르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오줌을 참으면 병이 되니까 바보나 하는 짓이지만, 똥 참는 건 몸에 좋을 수도 있다. 전에, 할머니가 그랬다. 근데, 엄마는 나한테 이런 재주가 있는 걸 정말 몰랐을까? 나를 팔 년이나 키웠으면서. 아, 구 년인가? 아니다, 생일이 안 지났으니까 팔 년이 맞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아빠가, 원래 그래야 했던 대로, 엄마에게서 나를 찾아 가 주기를 바랐다. 엄마와 사는 방 두 개 작은 집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똑같은 모양의 현관이 여섯 개나 있는 그 집은 그전에 살던 방 하나짜리에 비하면 엄청 좋았다. 엄마가 매일 자기 출근시간에 맞추느라 나는 잠도 안 깼는데 세수해라, 옷 입어라 소리를 질렀기 때문도 아니다. 엄마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란 거 안다.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내 진짜 임자에게 가고 싶었던 것뿐이다. 모르고 있었다면 몰라도 내 임자가 따로 있다는 걸 알고부터는 엄마가 아무리 좋아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내 진짜 임자에게 가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내 가슴께에 들어서 가끔 씀벅거리기도, 벌렁거리기도, 아프기도 한 그게 없어질 것 같았다. 주인이란 게, 임자란 게 그런 거니까.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거니까. 그렇게 되면, 정말 뭐가 좋아질지는 모르겠어도, 그때를 생각하면 심장 있는 데, 그 부근이 뭐가 들어찬 것처럼 뻐근하면서도 기뻤다. (심장이 어디 있는지 쯤은 나도 안다. ‘WHY?’ 책에서도 ‘어과동’에서도 봤다.) 물론, 이런 마음은 엄마는 절대 모르게 했다. 할머니나 이모에게도 비밀이다. 누구보다 나를 좋아해 주는 이모한테는 말해줄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랬다가 저번처럼 엄마에게 또 이를까 봐 겁이 나서 참고 또 참았다. 그때 그 일이 있고부터는 이모를 백 퍼센트 믿을 수 없으니까.
이모는 씨쓰리피오처럼 입이 싸다. 나는 그때 확실히 알았다. 세상 누구보다 나를 예뻐해 주는 사람이라고 해도 내 속마음을 전부 다 얘기해 줘선 안 된다는 걸. 이모가 아니고선 내가 아빠하고 목욕탕에 가고 싶어 한다는 걸 엄마한테 말할 사람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났지만 분명히 기억난다. 이모하고 목욕을 하고 젖은 머리로 바나나 우유를 빨면서 집에 오는 길이었다. 그냥, 이제 여탕에 가기 싫다고만 했으면 됐을 걸, 괜히 아빠 얘기를 한 내 잘못도 있긴 했다. 그래도 그건, 이모가 나를 데리고 여탕에 가는 거 싫다고 해서, 나도 일부러 아빠하고 가고 싶다고, 아빠만 있으면 서로 다 좋겠다고 소리쳐 주었던 거였다. 아직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미취학 꼬맹이가 그런 걸 엄마한테 이르다니, 그건 배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얘기를 들은 엄마가 나를 혼내는 걸 말리려 했대도 배신은 배신이다.
그땐 엄마가 정말 화를 많이 냈다. 내가 갖고 놀다 방바닥에 던져둔 제다이 검을 들고 나를 다그치며 소리를 질렀다. 너거 아빠가 니 목욕탕 한 번이라도 델꼬 갈 사람이면 을매나 좋겠노? 애시당초 기대를 하지 마라. 니는 그냥 엄마하고 사는 수밖에 음따. 철도 빨리빨리 들고, 어리광도 덜 부리고, 목욕도 혼자 하고! 씩씩하게, 당당하게!
엄마가 회사 회식에 가느라 이모가 와 있던 날이었다. 회식을 마치고 집에 온 엄마는 꼭, 술 취한 다스 베이더 같았다. 나는 엄마가 하는 말보다 눈앞에서 흔들리며 엄마의 포스를 대신하고 있는 제다이 검이 더 신경 쓰였다. 악의 무리를 소탕하는 제다이의 검이 나를 혼내는 데 쓰이다니, 정의가 살아 있다면 그럴 수는 없었다. 그건 이모보다 더 한 배신이었다.
이모하고는 삼일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영원히 그러고 싶었지만 삼일로 참았다. 그날 밤, 엄마가 나를 혼내는데, 그래서 막 서러운데, 나만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야단맞는 건 분명히 난데, 야단치는 엄마도 엄마 뒤에 서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지켜보는 이모도 다 나처럼 뭔가 억울하고 서러운 것 같았다. 술 취하고 서러운 다 베이더는 그날 조금 울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아빠는 내 주인이면서도 나를 기쁘게 안아주지 않았다. 나는 그게 이상하다. 물론, 내 거라고 내가 다 좋아하기만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샤프로 하도 찔러서 구멍 나고 더러워진 지우개나 딱 보기도 싫은 학원 숙제공책 같은 게 아니다. 아빠야 아니겠지만, 나는 아빠를 처음 만나는 거나 다름없고 게다가 난 미움을 받을 만큼 못생긴 것도 아니다. 아니, 잘 생겼고 귀엽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다. 지금까지 나를 처음 본 누구라도 그런 말을 해 줬다! 나는 적어도 쬬꼬만큼은 꼬옥 안겨볼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도 아빠는 웃지도 않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는 한참을 앉아 있다가 가자, 한 마디를 하고는 할머니와 이모가 싸 준 가방을 들고 나섰을 뿐이다.
꾸벅 인사를 하는 나를 끌어안고 이모는 훌쩍였다. 이모 뒤에 서서 할머니는 그랬다,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우짜노. 우째 울지도 않고 가노. 가가꼬도 저래야 될 낀데. 울 일 없으야 될 낀데, 그래야 될 낀데. 느그 엄마가 계속 보고 있을 끼다. 가아가 그라고도 남지, 죽어서도 지 새끼 안 보살필 아아가 아이대이.
다 베이더는 누구와 싸워도 죽지 않는데, 엄마는 죽었다. 술 취한 차에 엄마 차는 뒤집어졌다. 나를 데리러 할머니 집에 오는 길이었다. 다스 베이더의 엄청나게 큰 우주선에 비하면 엄마 차는 너무너무 작았다. 찌그러진 차에서 엄마를 빼내는 게 너무 오래 걸렸다고 했다. 다스 베이더는 아프지도 않는데, 엄마도 안 아팠을까? 무지무지 아팠을 거다. 엄마는 다스 베이더가 아니니까. 엄마는 레아 공주만큼이나 예뻤으니까 다스 베이더 같은 게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사실은, 다스 베이더도 죽었다, 아들 루크 스카이워커를 살리려고.
아빠가 미운 건 아니다. 그렇다고 막 좋지도 않다. 지금은 추워서 그냥 어서 빨리 아빠 집에나 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빠 집은 엄마와 같이 살던 우리 집만큼 따뜻하면 좋겠다. 내가 속으로 원망해서 그런가? 아까보다 눈이 더 많이 내린다. 뭐라도 좀 내가 바라는 대로 되면 좋겠다, 정말! 어…… 이건, 엄마가 늘 하던 말인데……. 엄마도 전에 이 말을 할 때마다 지금 내 마음 같았던 걸까? 엄마는 바보 같은 표정으로 창밖을 보다가도, 운전을 하다가도,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다가도 갑자기 그렇게 말하곤 했지만 한 번은 나를 보면서도 그랬었다. 그때 엄마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나는 정말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었지만, 그리고 정말 몇 번 안 되지만, 내가 엄마 말을 안 들었던 때였다. 나도 사실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때가 있다. 엄마가 시킨 대로 하고 싶지 않을 때, 엄마가 정말 내 마음을 몰라 줄 때. 엄마도 내 마음 모르니까 나도 엄마 마음대로 안 해주고 싶을 때. 그리고 엄마가 정해놓고 바라는 게 있으면서도 뭐라고 딱 분명하게 얘기하지 않을 때. 그런 건 정말 힘들다. 엄마 마음을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까 내가 뭘 해도 그대로 맞출 수가 없는 거다. 그래도 더 잘할 수는 있었는데, 분명히. 그럼 엄마가 그렇게 말하진 않았을 텐데…. 미웠을 거야, 엄마는, 내가. 그치만 이렇게 추운 날 같이 있었으면, 엄마는 내 손을 꼭 잡아줬을 거다. 예전에는 친구들이 보면 꼬맹이라고 놀릴까 봐 엄마에게서 손을 빼냈었지만 지금이라면 안 그럴 것 같다.
내 손을 제일 많이 잡아 준 사람은 할머니다. 나를 제일 많이 업어준 것도 할머니다. 엄마보다, 이모보다 더 많이.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대면 엄마는 내 등짝을 찰싹 때리고는 무서운 눈을 하고 나를 봤다. 엄마는 정말 다리가 아픈지 그냥 아픈 척하는 건지 딱 안다. 하지만 할머니는 내가 가짜로 아프다고 해도 에구구 소리를 내면서 꼭 나를 업어 줬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집에 다닐 때가 좋았다. 매일 할머니 집에 갔으니까. 아침에는 엄마가 어린이집 차를 태워 줬고 마치고는 할머니 집 앞에서 내렸다. 할머니는 매일 집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그 시간에는 이모도 없고, 그러니까 이모 핸드폰도 없고, 그냥 텔레비전이나 보다가 밤에 엄마가 오면 같이 집으로 왔다.
그때 <스타워즈>를 처음 봤다. 더 재미있는 애니 채널을 찾는 중이었다. 몇 번을 다시 하는 ‘스펀지 밥’이나 ‘엉클 그랜파’는 지겨웠다. 피자 스티브 목소리 따라 하기라면 내가 지구 최고일 만큼 많이 봤다. 케이블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보다가 나보다 더 작은 꼬맹이가 비행기도 아니고 자동차도 아닌 걸 멋지게 조종해서 사막 같은 데를 날아가는 걸 봤다. 포드 레이싱! 엎드려 턱을 괴고 있던 나는 리모컨을 던지고 벌떡 일어나 앉았고,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경주를 끝까지 지켜봤다. 어린 아나킨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스타워즈>에 빠졌다.
그다음 생일에 엄마는 진짜 광선검을 사줬고, 나는 할머니 등긁이를 던져 버리고 진정한 제다이가 됐다. 이모가 가르쳐 준 유튜브로 <스타워즈>를 보고 또 봤다. 애한테 좋은 것 가르쳤다고 엄마는 이모에게 야단을 했지만, 나는 이모가 내게 가르쳐 준 것 중에 그게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건 뭐든지 궁금한 걸 물어보면 뚝딱 가르쳐 주는 척척박사였으니까. 선생님한테 물어도 모르는 것도 유튜브에는 다 나온다. 그전부터 할머니는 내가 ‘왜요?’ 귀신을 덮어썼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는데 유튜브를 알고 나서는 할머니를 안 괴롭혔다. 누가 뭐래도 내가 다른 애들보다 더 똑똑하고 어른스러운 건 유튜브 덕분이다. 남자라면 무슨 말인지 알 텐데, 엄마나 할머니한테 물어볼 수 없는 게 있다. 남자 대 남자로, 아빠한테나 물어볼 수 있는 것 말이다. 나는 그런 것도 유튜브에서 다 찾아서 봤다. 앞으로는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그치만 지금처럼 저렇게 계속 아무 말도 안 한다면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자꾸 물어본다고 할머니처럼 싫어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저녁은 거의 할머니하고 둘이서 먹었다. 가끔은 이모도 함께 먹었고, 아주 가끔은 엄마까지 넷이서 다 같이 먹기도 했는데, 나는 그렇게 모두 함께일 때가 제일 좋았다. 엄마와 이모와 할머니는 밥을 먹으면서도 계속해서 무슨 얘기든 했다. 그 얘기들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건 별로 없지만 나는 그렇게 밥상에 앉아서 세 사람이 떠드는 걸 보는 게 좋았다. 모두 신나서 얘기했고,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한참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 (밥 먹을 때뿐 아니라 언제나) 예의도 바르고 뭘 잘 흘리지도 않지만, 그럴 때는 밥 먹다 코를 파거나 일부러 반찬을 흘려 가면서 젓가락질을 해도 아무도 야단치지 않았다. 나는 투명인간이 되어 거기 같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뭘 해도 괜찮고, 누가 뭘 하는지 아는 척을 안 해도 괜찮은 기분. 우리 네 명 전부가 어쩌면 새로운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그럴 때는 모두 행복했다. 엄마와 이모와 할머니는 가끔 싸우기도 했지만 밥 먹을 때는 안 그랬다. 사실, 싸웠을 때는 밥을 같이 안 먹었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엄마는 목소리가 컸다. 이모도 할머니도, 엄마보다 작지 않았다. 세 명뿐이지만, 쉬는 시간의 우리 반 보다 훨씬 더 시끄러웠다. 가끔은 내가 아는 얘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모르는 얘기들이었다. 서로 화를 내는 것 같다가도 금방 다시 마주 보고 깔깔거리는 식의 얘기를 하고 또 했다. 엄마가 있었으면, 다음 달 내 생일에도 그렇게 또 시끄러웠을 거다. 올해는 절대로 그 우스운 종이 고깔은 안 쓸 거라고 혼자서 다짐하고 있었는데, 엄마하고 이모가 이번에도 또 씌우려고 하면 무슨 똥고집을 부려서라도 안 하고 말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나는 이제 3학년이니까!) 그럴 일이 없어졌다. 아빠는 내 생일을 알고 있을까? 그날은 할머니한테 가야 하나? 어쩌지…….
그렇게 시끄럽게 밥 먹는 걸 다시는 볼 수 없다. 엄마도, 다시는 그런 저녁은 먹지 못한다. 하늘나라 같은 건, 당연히 안 믿는다. 어른들은 애들한테만 하는 얘기들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는 걸 나는 안다. 그런 게 한두 개가 아니고, 그 대부분은 거짓말이라는 것도. 산타클로스는 없고, 누워서 밥 먹는다고 소 되는 거 아니고, 울다가 웃어도 똥꼬에 털 같은 거 안 난다. 하늘나라도 그런 거다. 하늘보다 높은 데는 암흑천지 우주가 있는 거지, 죽으면 가는 나라 같은 건 없다. 그러니 우리 집이나 할머니 집 같은 것도 없고, 할머니가 해 주는 비빔국수 같은 걸 먹을 식탁도 없다. 그럼, 엄마는 어디로 간 걸까?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그건 어과동에도 유튜브에도 안 나온다. 당연하다. 죽어 봐야 아는 거니까. 죽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건지 엄마가 나한테만 몰래 얘기해 주면 좋겠다. 아니, 그런 거 안 가르쳐줘도 되니까, 그냥 내가 보고 싶어 할 때마다 내 옆에 있기만 하면 좋겠다. 못 만져도, 못 안아도. 그럴 리 없지만, 정말, 엄마가 하늘나라에 있다면 지금, 눈이라도 좀 그치게 해 줬으면 좋겠다.
아까 모퉁이를 돌고부터는 더 오르막길이다. 군데군데 모래를 뿌려놨지만 다 소용없다. 질척거리고 미끄럽다. 가방이 무거워서 누가 뒤에서 잡아끄는 것처럼 뒤뚱거린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걸까? 이렇게 오래 걸을 줄 알았으면 그냥 할머니 집에 있을 걸 그랬다. 걷기 힘든 것 말고도,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 집에 있는 게 나았을 것 같은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거기 아빠 집에, 아빠 말고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빠하고 같이 사는 사람 말이다. 할머니 집을 나서기 전에 아빠 혼자 사는지를 왜 안 물어봤을까? 나처럼 꼼꼼한 아이가 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실수다. 아빠를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 아빠도 엄마처럼 나를 좀 키워봐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걸 잊었다. 하지만 다시 조금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어쨌든 아빠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아빠가 나를 데려가게 해야 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만약, 엄마 아닌 다른 아줌마가 있거나 다른 애라도 있으면 어쩌지? 아빠가 돌볼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으면 어쩌냔 말이다.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아빠를 괴롭힐 거다. 그 방법뿐이다. 나를 찾아가려 하지도 않았고, 내가 알아서 그럴 기회를 만들어 줬는데도 나만 아빠를 차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리고 어쩌면 나보다 더 먼저인 누가 있다면, 나는 아빠를 향해 제다이 검을 들 수밖에 없다. 그게 정의를 지키는 길이다. 억지로라도 제다이 검을 가방이 쑤셔 넣어 온 건 정말 잘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저렇게 몸집이 큰 아빠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루크 스카이워커도 다스 베이더한테 졌다. 그래도 나는 루크 스카이워커보다는 좀 유리한 게 있는데, 상대가 내 아빠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거다. 루크 스카이워커는 처음에는 그걸 몰랐다. 그래서 다스 베이더의 한 마디에 깜짝 놀라서 져버린 거다. 지금 광선검 대결을 하고 있는 무시무시한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친아빠라는 걸 갑자기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이 어땠겠어? 그런 말을 듣고도 이길 수는 없는 거다. 제다이 전사가 포스를 불러오기 위해 제일 중요한 정신집중이 될 수가 없었는데. 다스 베이더는 진짜 나빴다. 처음부터 자기 아들인 줄 알고 있었으면서 그렇게 괴롭히고, 나중에는 검술로 죽일 뻔하고, 아들이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을 때 ‘내가 네 아빠다!’하고 말해버리다니. 칼싸움하기 전에, 처음부터, ‘너는 안 믿겠지만 내가 정말 네 아빠다.’라고 했어야 맞는 거다. 미안해서 죽을 것 같다는 표정 같은 건 안 지어도 된다. 그렇게 갑자기 말해버리는 건 나빴다. 착한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다. 정말 아빠라면 말이다. 그런데 어쩌면, 다스 베이더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시커먼 마스크를 쓰고 있고, 들리는 건 기계장치 목소리밖에 없어도, 그 말을 할 때 다스 베이더는 좀 힘든 것 같아 보였다. 목소리도 좀 떨리는 것 같았다. 나만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맨날 아빠하고 장난치고 밥 같이 먹는 아이들은 알 수 없는 걸 나는 느낄 수 있다. 나는 좀 다르니까. 그리고 결국 목숨 바쳐 아들을 살린 걸 보면 더 그렇다. 그러니까 다스 베이더는 루크 스카이워커의 아빠가 맞기는 맞는 거다.
어쩌면 아빠도 나처럼 어딘가에 광선검을 숨겨 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광선검을 꺼내 들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그래야만 한다면 피하진 않을 거다. 본래의 주인에게 가면서 그 주인과 싸워야 할까 봐 걱정하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이제부터 엄마하고 살 때 그랬던 것처럼 눈치 같은 건 보지 않을 거다. 나는 아빠에게 그럴 필요가 없다. 아빠가 내 원래 주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엄마가 그러지 말라고 했으니까.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으니까. 아직도 그게 정말로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조금씩 그래야 할 것 같다. 엄마가 없으니까. 더는 나를 야단쳐줄 사람이 없으니까. 이제는 내가 뭘 잘못하더라도 아빠 없이 커서 그렇다는 말 들을까 염려할 엄마가 없으니까. 뭐라도 내가 알아서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내 생각대로 해야 할 것 같다. 에이 근데, 너무 멀다. 학원차도, 엄마 차도 다 우리 집 바로 앞에다 나를 내려줬는데. 버스 정류장에서도 조금만 뛰어가면 됐었는데…. 춥다. 볼이 시리고 발가락이 아프다. 엄마가 조금 보고 싶다. 아니다. 그래도 고개를 들고 힘차게 가야 한다. 일부러라도 가슴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흐읍! ……에푸, 에치! 갑자기 찬 공기가 들어가니 코 안쪽부터 목 아래쪽까지가 금방 딴 콜라를 마신 것처럼 매워서 기침이 난다.
겨우 기침을 멎었더니, 아빠가 왼쪽 어깨를 두드린다. 왼쪽으로 가라는 말인가? 기침했는데 괜찮냐는 건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열세 번째로 돌아본다. 아빠는 옆으로 이어진 골목으로 턱짓을 한다. 한쪽으로 차들이 다닥다닥 붙어 서 있는 골목이다. 눈 장난이나 광선검 싸움도 못할 만큼 좁은데 골목 안쪽 끝이 막혀 있다. 그러니까, 여기? 저 골목 안에 있는 대문 중 하나가 아빠 집인 거다. 하나, 둘…. 양쪽으로 두 개씩 대문이 전부 네 개다. 마당이 있는 2층집. 담 너머 보이는 데만 봐서는 엄마와 살던 집이랑은 다르다. 어느 집에서 개가 짖는다. 쬬꼬처럼 작은 애가 아닌가 보다. 야단치는 어른 목소리처럼 굵고 크다. 혹시 저 개가 있는 데가 아빠 집이면 어쩌나 싶다. 한 번도 엄마를 졸라보진 못했지만 전부터 강아지를 키워보고 싶긴 했었다. 근데 쬬꼬 같은 작은 애라야지 저런 큰 개는 아니다. 저런 개는, 광선검 같은 걸 무서워하지도 않아서 내가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나 말고 다른 애가 있는 것보다는 저런 개가 나을까? 아니, 다른 애도 있고 저런 개도 있으면 어쩌지? 골목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냥 들어갈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아빠가 내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린다. 여기까지 왔는데 어쩔 수 없다는 생각, 할머니하고 이모는 언제라도 나를 받아 줄 거라는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 언제라도……. 언제라도! 그래,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은 일단 아빠 집으로 가자. 데쓰스타를 부수러 가는 스카이워커처럼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어…. 자, 오른발을 떼어 앞으로 내딛으면 되는 거다. 가자! 가 보자.
* * *
방향을 가르쳐 줬는데도 기찬이는 한동안 멈춰 서서 우리 집이 있는 골목 안을 살폈다. 망설이고 있었다. 두려운 것도 같았다. 어른인 나도 혼란스러운데, 기찬이는 오죽했을까. 우리 둘에게 뭐라도 확실한 건 없었다. 오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만큼 띄엄띄엄한 이 눈발처럼. 오늘내일을 모르는 사람 목숨처럼. 내일이든 모레든, 언제고 맑은 해가 쨍쨍히 비치는 날이 올 테지만,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갠다고 해도 언제고 다시 또 궂어질 테고. 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오는데도 이미 오래 걸렸다.
조금 기다고 있자니 기찬이가 드디어 골목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헌데, 발을 내려놓으며 허방다리를 짚은 듯 균형을 잃고 기우뚱했다. 질퍽하게 녹고 있는 눈 아래, 큰길과 골목이 잇닿는 부분에 단 차이가 있는 걸 미처 몰랐던 거다. 급히 다가가 넘어지려는 기찬이의 어깨와 메고 있는 학원 가방을 잡아 일으켜 세웠는데, 이번에는 내가 눈길에 미끄러졌다. 기찬이를 놓고서 땅을 짚었으면 좋았을 것을, 기찬이를 붙잡은 채 억지로 버티려 애를 쓰다가 오히려 더 크게 넘어지고 말았다. 말 그대로 큰 대 자로 길 위에 뻗은 꼴이었다. 모래와 흙먼지가 섞여 어설프게 녹은 눈에 엉덩이와 등이 다 잠겼다. 황급히 일어서려 했지만 상체를 누르는 무게감에 몸을 일으키기 어려웠다. 고개를 숙여 배 위를 보니, 내 위에 엎드린 기찬이가 보였다. 안고 넘어져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기찬이는 무릎과 손이 젖은 것 말고는 괜찮은 것 같았다. 놀란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고 있던 기찬이는 내가 바라보자 얼른 다른 데로 고개를 돌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그러다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가 닿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변했다.
가방, 기찬이 외할머니가 챙겨준 가방이 담벼락 아래 처박혀 있었다. 기찬이를 넘어지지 않게 붙잡느라 내던진 탓이다. 며칠 째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봉투 더미 옆. 눈 녹은 물이 이미 가방 아래쪽부터 스며들고 있었다. 기찬이는, 그쪽을 보고 있었다.
“가방이, 젖어요.”
기찬이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나도 바로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내 위에 엎드린 기찬이가 일어난 뒤에야 나도 몸을 일으킬 수 있을 터였다. 방수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금세 물에 젖어 안에 든 물건들을 버릴 만큼 허술한 가방은 아니었다. 이미 그렇게 되어 버린 것, 조금 천천히 수습하나 더 서두르나 큰 차이는 없었다. 나는 눈 위에 누운 그대로 우선 기찬이의 등에서 영어 학원 가방을 벗겨 안았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기찬이가 일어나기 쉬울 것이었다.
“기찬아, 이제 조심해서 일어나 봐. 네가 먼저 일어나야, 아빠도 일어설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기찬이의 빈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빠’라는 말만큼이나 조심스러웠다.
기찬이는 내 얼굴과 젖어가는 가방을 몇 번 번갈아 보더니 질퍽한 땅을 짚고 일어났다. 나도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곧장 가방으로 달려갈 줄 알았는데, 기찬이는 먼저 장갑을 벗어 바지 깃과 무릎에 묻은 눈을 털었다. 몇 번을 세게 털어도 이미 젖은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옷을 다 수습하고는 마지막으로 장갑을 한 번 더 정성스레 탈탈 털었다. 아주 작은 티끌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꼼꼼히. 어느새 기찬이의 얼굴에 울 것 같은 표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2020 『약사문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