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두 시가 다 되어 가는 새벽, 매일 같이 듣는 엘리베이터 소리가 유난히 신경 쓰인다. 정적을 깨는, 가볍지만 삭막한 소리. 보통은, 가벼우면 경쾌하기 마련인데 외려 건조하고 어둡다. 기분 탓이겠지. 누구에게나 똑같은 소리일 터인데, 아이들 귀에도 이리 들리면 어쩌나 싶다. 정말 그렇다면, 이사라도 가야 하는 게 아닐까? 아이들에게는 달리 들릴 수도 있겠지. 출발선의 육상선수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나가는 아이들을 보면, 녀석들에게는 이 소리가 출발신호처럼 설레고 긴장되는 느낌인지도 모른다. 나의 달리기는 이미 익숙한 만큼 지겹기도 한 반환점 근처, 이제 막 출발선상에 있는 아이들과 나를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쩌면 아이들은, 그런 소리 따위 있는지 없는지 아예 관심 밖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퇴근 후에 문상을 다녀오는 길이다. 두 시간 남짓 혼자 운전을 하면서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덤덤히 조문객을 맞는 상주의 표정 뒤에 들어있는 회한과 오열 같은 것이 보이는 듯했다. 망자와는 생전에 일면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각별한 애도의 마음보다는 인지상정이 앞섰겠지만, 부모 두 분 아직 건강하시다 해도 연세를 생각해 본다면 얼마 안 있어 내가 그 자리에 설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밤공기만큼이나 아파트 복도의 불빛도 차갑다. 가을이 깊었다.
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서 습관처럼 숫자 버튼을 누른다. 잠시 뒤, 덜컹 우웅 하는 작은 흔들림과 함께 엘리베이터는 제 할 일을 또 묵묵히 수행하기 시작한다. 일상이다. 변함이 없다. 무심코 시선을 돌렸는데, 엘리베이터 거울에 내 모습이 비친다. 분명한 대칭, 나와 좌우만 바뀐 똑같은 모습인데 그 모습이 낯설다. 그 낯섦은, 일상이 아니다.
거울 속에 있는 가장 객관적인 나는, 내 머리가 알고 있던 나보다 초췌하고,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인다. 피부는 거칠고 푸석푸석하고, 자세히 보면 좀 처진 눈 밑에는 희미하나마 눈그늘이 자리 잡았고 이마 위로 새치도 대여섯 가닥 돋아나 있다. 제멋대로 자란 수염은 단정치 못함을 넘어 처량하게까지 보인다. 갑자기 갑갑하다. 목을 죄던 검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활력 있고 자신감 가득하던 나는 어디로 갔나?’ 하는 회한은 ‘아, 저기에 비친 모습이 정말로 내 모습인 거구나.’ 하는 어쩔 수 없는 수긍 이후에나 겨우 따라 나온다. 실은, 그 수긍에 이르기까지 내 의식 속에는 일말의 저항이나 부정도 없었던 듯하다. 낯섦은 내 마음속의 감정일 뿐,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정도의 이성, 거울에 비친 내가 더도 덜도 아닌 내 그대로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쯤 찰나에 떠올릴 노련함은 갖추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마흔이 지나고도 이 년이 흘렀다.
거울 속 모습이 찌그러져 보여 안경을 고쳐 써 본다. 새로 맞춘 안경이 아직 익숙하지 않다. 시야가 흐리다 싶었던 건 벌써 오래 전이었지만, 피곤이 쌓여 그렇겠거니, 잠깐 이러다 괜찮아지겠지, 하며 버티다 안경점에 찾아간 것이 한 달쯤 전이다. 전에는 잘도 구별하던 정도의 잔글씨를, 안경을 쓰고도 읽기 어려웠고 좀 더 작으면 아예 글자가 아닌 점처럼 뭉개져 보이는 데다, 잘 보겠다고 눈을 가까이 대보면 초점 틀린 사진처럼 전체가 흐려지고 말았다. 십 년이 다 되도록 똑같은 렌즈를 낄 만큼 더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는데, 막상 안경점에서 누진다초점 렌즈를 하라는 권유를 받고서야 내 눈이 나이 들었음을 실감했다.
책을 보든,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든, 전처럼 오랜 시간을 지속할 수 없었다. 당연히 집중력이 떨어졌고 더불어 일의 효율이 떨어졌다. 그런 것보다 더 당혹스러운 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초점을 맞출 수 없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불쑥불쑥 실감하게 되는 것이었는데, 누군가 내게 보여주기 위해 눈 바로 앞까지 스마트폰을 들이밀거나 알약에 음각으로 표시된 글씨들을 구분해 보려 할 때,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힘을 줘 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다음이면 예상하지 못한 기습을 당한 듯 당황스러웠고, 일정량의 좌절감이 뒤따랐다.
전 같지는 않다고 느끼는 게 눈뿐이던가? 생각과 말에도 시차가 생기기 시작했다. 뻔히 아는 사람 이름이나 지명, 상황에 꼭 맞는 표현 따위가 머리에서, 입에서 뱅뱅 돌기만 할 뿐 떠오르지 않곤 했다. 한참 말을 하다 말고, ‘저, 저…’나 ‘왜, 그…’ 하고 어색한 시간 끌기를 할라치면 내가 바보가 되어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머릿속 어딘가에 기록해 두긴 했고 그랬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는데, 그게 어딘지를 몰라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생각한 게 바로 말이 되어 나오던, 그러니까 머리와 혀 사이에 조금의 시차도 없던 때는 생각해 본 적도 없던, 머리와 입을 오가는 전령 따위를 떠올려 봤을까? 머릿속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보관한 기억을 찾아 꺼내와 성대와 혀 사이쯤에 장전시켰다가 정확히 필요한 순간에 입 어딘가 있을 말 방아쇠를 당겨주는 전령 말이다. 전에는 결코 그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과 말의 연결고리는 지극히 당연하였으니, 상상으로조차 그런 걸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부리는 그 전령이 태업을 하는 게 아니고, 제 깐에는 한다고 애쓰는데도 그 능력이 한계를 보이는 것, 그렇다고 새로운 전령을 구해다 부릴 수도 없는 것. 그게 현실이다.
학교를 마치고 돈 버는 자의 서글픔을 알기 시작한 지 이십 년이 다 되어 가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내세울 정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허덕이며 힘겹게 견뎌온 것도 아닌, 고만고만한 일상이었다. 굳이 따져 말하자면 큰 시련이나 절망 없는 평온한 나날이었다. 어떻게 지내왔든, 당연하게도,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시간의 흐름에 나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딱 그만큼, 남들과 똑같은 만큼의 나이가 들었겠지. 하지만 마치 지난 십몇 년 동안 내 자신의 모습과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스스로가 낯설게 보이는 걸 보면 내 마음속에서 가늠해 온 시간의 흐름과 내 몸이 겪어온 그것에 차이가 있었나 보다. 몸은 물리적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며 달려왔는데, 마음속 어딘가 재깍거리고 있는 시곗바늘은 지금보다 몇 년, 혹은 십몇 년쯤 전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게다. 종종 거울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세월이 바꿔놓은 내 겉모습을 각인시키기라도 했다면 게으른 마음의 시간이 제대로 쫓아와 줄 수 있었을까? 그랬더라면 지금처럼 내 겉모습에 배신감을 넘어 낯섦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마음이라도 젊은가? 아쉽게도 그렇지도 않다 싶다. 꼼꼼히 따져볼 것도 없이, 그것이 물건이든 시류이든 새로운 걸 만나면 거기에 익숙해지려 애쓰기보다는 어떻게든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이용해 새로운 적응 과정을 피해 갈 궁리만 했다. 그렇게 해도 안 되겠으면 그냥 무시하는 것으로 뒤처진다는 두려움을 감추고 마는 것이다. 신 포도일 거라고 위안하는 여우처럼 가소롭게 영악했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내가 아주 보수적인 사람이 되어 버린 듯도 했다. 항상 그 반대편을 향해 가려 애써왔는데 말이다. 어쩌면 사실은, 천천히, 쉬지 않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점점 보수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다, 그냥 나이 들어가는 것뿐이라고 하자.
사실, 근래에 사소한 일에 상처를 받는 일이 전보다 늘었고, 다른 사람도 나처럼 작은 일에도 영향을 받겠더니 해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그것이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닌 배려를 행하는 정도일 거라고 위안하고는 있지만, 염려가 느는 만큼 결단이나 추진력 같은 역동적인 단어들은 내 마음의 중심에서 점점 밀려나 작아져만 간다. 그것들이 있던 자리에는 무엇이 들어와 앉았나? 무언가가 그 빈자리를 꿰차고 앉은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이 ‘불혹’에 걸맞는 평정심이나, 뭐라고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는 없어도 세상이 돌아가는, 삶이 이어져 가는 이치와 고갱이를 어림잡는 혜안 같은 것이길 바라는 건 아직도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가끔, 어디쯤 와 있나 생각해 보곤 한다. 정말 반환점 근처인지, 결승선이 가까웠는지, 아직도 달려온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남았는지. 꽤 오래 달려온 것 같기는 한데, 끝이 어디인지 모르니 가늠하기 어렵다. 습관처럼 교대로 다리를 내뻗지만 잘하고 있는 것인지, 가야 할 길을 벗어난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왜 달리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적 없는 삶이라는 달리기에서 왜라는 질문은 교만일 수 있겠으나, 필요하긴 할 것이다, 언젠가는. 어떻게 달리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정정당당하게, 부끄럽지 않게 달리고 싶었다. 어차피 등수를 따질 경기는 아니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잘 하고 있긴 한 것인가?
이십 대에는 서른이 되면 내 안에 있는 혼돈에 질서가 부여되어 어떤 모습으로든 체계화될 줄 알았다. 삼십 대에는 완벽하진 않으나 얼추 그 비슷한 느낌으로, 삶이 계획대로 되어 간다고 느끼던 때도 있었는데, 마흔이 되자 섣부르고 거친 난도질로 다듬어 놓은, 내가 믿던 모든 것이 또다시 흔들리고 경계가 모호해졌다. 마음의 시력도 나빠지는 것인지, 무엇을 받아들이고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분명한 느낌은 이제 없다. 무엇이 되었던 ‘절대’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것이 심각한 선악의 문제든, 단순한 좋고 싫음의 문제든 말이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어떤 선택이든 반드시 옳은 결정을 했다는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리 잘못된 결정은 아닐 거라는 위안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확신에 차 있지만 불안하던 것이 확신하지 못 하지만 여유 있게 된 것인데, 둘 다 모순 같아 보이지만 말하자면 이런 모순도 인정할 수 있는 뻔뻔함을 터득한 것이다.
문상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안개등을 켜고 속도를 늦춰야 했다. 띄엄띄엄 오가는 차들의 불빛이 안개 속에서 불쑥 나타날 때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초점 렌즈 너머로 거리를 봐야 하니 평소보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운전하느라 목과 허리가 무거웠다. 하지만 분명히, 처음 안경을 바꿨을 때보다는 많이 편안해졌다. 아무리 좋은 안경을 한다 해도 예전과 똑같이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몸도 마음도 그렇게 적응해 가야 하는 것이다.
차창에 내려앉는 안개를 걷어내기 위해 연신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흐려지면 닦아내고, 또 흐려지면 닦아내고. 그러면서 천천히 앞으로 가는 거다. 십 리 밖까지 훤하게 보이는 맑은 날이라면야 더 좋겠지만, 늘 그럴 수는 없으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절망하지 말고, 지금까지 왔던 경험으로 방향을 정하고, 그것이 목적지를 향한 정확한 길이라는 확신은 없어도 길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검임은 알 수 있는 것. 더 이상 미세하고 작은 부분까지 정밀하게 초점을 맞춰 볼 수는 없다 해도 일이 돌아가는 인과관계나 사람들 사이의 어우러짐 같은 전체적인 모습은 더 잘 파악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인정하고 위안하며 더 달려가야 하지 않겠나.
딩동!
엘리베이터가 멈춘다. 거울 속의 나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헤어지면서 보니, 저쪽의 나도 별 미련이 없는 표정이다. 시원스레 돌아서는 모습이 조금 전처럼 안쓰럽지 않다. 지금처럼 적당히 들뜨고, 이겨낼 만큼만 실망하며 천천히 달려가리라 믿는다. 아파트 복도 창 너머로는 안개 가득한 밤 풍경이 가득하다. 점점이 박힌 가로등 불빛이 마치 점묘화 같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 안경을 벗어 꼼꼼히 닦는다. 간간이 마음의 눈도 닦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길잡이가 되어줄 세상의 가로들 불빛을 잘 알아볼 수 있도록 말이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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