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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노포(老鋪)를 꿈꾸며

by FeelSeoGood 2023. 7. 15.

 

  고등학생 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다 이야기가 거기까지 이어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께 이런 얘기를 드린 적이 있다.

  “엄마, 나는… 갑자기 예전 일들이 떠오르는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대부분 좀 부끄러웠던 기억이라 혼자서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아이고, 그런 건 엄마 나이쯤은 넘어야 하는 일인데. 니는 아무래도 애늙은이인갑다!”

  별일이 다 있다며 신기하게 여기셨는지, 벌써부터 그러면 어쩌냐며 측은해하셨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들 얼굴을 한 번 더 공들여 살펴보셨던 건 분명하다.

  요즘 들어 특별한 계기가 없는데도 오래전 추억을 되짚어 보는 때가 잦다. 심지어 예전 어느 때 하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 내지 못한 말을 뒤늦게 혼자서 중얼거려 보기도 한다. 때를 놓치지 않았다면 고백이나 변명이 되었을 그 말들을 그때의 상황에 맞추어 몇 번을 다듬어도 본다. 무의미한 첨삭이고 부질없는 퇴고다. 고백이나 변명. 뭐가 되었든 화려할 필요가 없었던 것들이다. 다만 진심이 전해질 수 있다면 족했을 것들. 그런 걸 되뇐다는 건 당시에 전하지 못한 마음이 남았다는 것이고, 그것이 아직도 아쉽다는 뜻이겠다. 여전히, 또는 내내.

  누군가 ‘인간이 받은 최고의 축복은 바로 망각’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아무것도 잊을 수 없다면, 어떤 것도 잊히지 않고 간직해야 한다면 아무래도 기쁨보다는 괴로움이 더 크겠다. 나쁜 기억을 견뎌내는 것이 녹록지는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어차피 기억이든 망각이든 의지대로 선택되고 조절되지 않는 바에야 꼭 선물로 불러야 할 만큼 기꺼운 것으로만 생각되지는 않는다. 트라우마가 남을 만큼 호된 사건을 겪어본 적 없는, 다행스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니다. 불혹을 넘은 사람치고 삶의 비의(悲意) 한 번 느껴보지 못한 이는 없을 테니까. 노랫말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러저러한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 뜻을 다 알지 못한대도 기억에 각을 세워 다투지 않고 적당히 타협할 수 있다면 그게 또 추억이 되는 법이다. 미련과 아쉬움이 남은 기억도 돌아보면 대부분은 따스하기 마련이다.

  여러 SNS 중에 사진 한두 장, 짧은 동영상을 올려 공유하는 앱이 있다. 특정 상표 피하자고 위트 있게 붙인 이름으로 부르자면 ‘인별그램’! 상업적 목적의 게시물을 제외하면 거기에 올라온 대부분은 크든 작든 자기 자랑 아닌 것이 없다. 나 이렇게 예쁘고, 이런 데도 가 봤어요! 나 이거 먹어 봤고, 나 이런 것도 가지고 있어요! 이런 말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사진들에 사람들은 대리만족이나 질투를 담은 하트를 주고받는다. 그런 중에도 가끔 경박스럽지 않고 잔잔한 사진들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최근에 누군가가 올린 대구의 옛 골목을 찍은 사진들에 시선이 딱 멈추었었다. 따져본다면 사진은 결국 지나간 시간, 모두 추억일 테지만, 그 당연한 사실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강렬한 자기주장을 하는 사진들 속에서 외려 차분해서 눈에 띄는 풍경이었다.

  대구는 어려서 내가 자랐고, 떠나온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연고가 있어 때때로 들리고 잊지 않는 곳이니 따져본다면 고향이나 다름없다. 대구 중구 ‘진골목’의 사진들. 구청에서 옛 정취를 일부러 보전해 놓은 골목이다. 멀지 않은 곳에 남아 있는 몇 채의 20세기 초반 건물들과 묶어 조성된 근대 골목 관광코스에 잇닿아 있어서 최근 들어 사람들이 좀 찾는가 보다. 오래전에 폐점한 가게들의 간판을 그대로 남기거나 다른 곳에서 가져와 꾸미기도 한 듯 칠팔십 년대 감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골목의 풍경. 근처에 살았던 적은 없지만 한 번은 지나쳐 갔을 곳. 내 어릴 적 어디서나 만날 수 있던 모습들. 하트를 한 개밖에 보낼 수 없는 것이 아쉬운 사진들.

 

shoosue5님께서 인스타그램에 게시하신 사진입니다.

 

  진골목 사진 속에 남아있는 ‘정소아과’ 간판을 보고, 감기만 걸리면 갔었던 신암동의 소아과 이름을 기억해 내려 애써 봤다. 자가용 있는 집이 몇 안 되던 시절, 엄마 손을 잡고도 버스를 타고 내리는 게 버거울 만큼 조그만 때였다. 병원 이름이 적힌 간유리가 끼워진 커다란 나무 현관문이 생생하고 지금도 병원이라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소독약 냄새를 내게 각인시킨 곳이 거기인데도, 어인 일인지 그 이름만은 확실히 기억나지 않았다. ‘정소아과’처럼 원장님 성에 ‘소아과’라고만 붙인 단순한 이름인 건 확실한데, 맨 앞의 그 한 자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40년 전에 나를 진료했던 원장님은 그때도 젊지 않으셨으니 벌써 작고하셨을 것이고, 병원도 남아 있을 리가 없을 테지만 그 이름마저 내 기억에서 사라진 것은 너무 아쉬웠다. 약 짓고 상담하며 반나절을 때때로 애써보다 포기하고 전화로 여쭤보니, 어머니는 아예 그런 병원이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셨다. 연년생 누나는 당연한 듯 ‘김소아과’라고 하는데 일부러 소리 내어 되뇌어 보아도 처음 배우는 외국어 단어 읊듯 내 입에는 왠지 그 이름이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김소아과’라는 이름은 어떤 마법 주문처럼 내게 또 다른 옛 가게들을 떠오르게 했다.

  좋은 일이 있거나 기념할 만한 날 가끔 가족들이 같이 가서 만두를 먹던 종로통 화교학교 옆 중국집 ‘영생덕’. 얼마 전 일부러 부모님을 모시고 가보니 옛 가게의 느낌은 그대로인데 내 기억에서처럼 어두침침하지 않고 밝았다. 만경관 극장 쪽에서 걸어 들어가면서 왼쪽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오른쪽이었다. 가게를 이전했던가? 따로 물어보진 못했다. 기억과 일치하는 것은 계산대 뒤편 유리 상자 안에 놓여있던 상아조각뿐이었다. 버스 타고 지날 때마다 건물이 예뻐서 눈에 담아두던 동부 정류장 앞 ‘은행약국’은 간판집이 되었더라. 약국은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도 그 앞을 하도 많이 지나다녀서 마음에 남았는데, 다들 고만고만 특색이 없던 건물들 사이에 반짝이지 않는 주황색 벽돌과 같은 계열의 기와로 된 은행약국은 단연 돋보였었다. 지금은 건물도 낡아 예전처럼 단아하지 않고 지저분해졌지만, 어려서 약국에 대해 내가 가졌던 좋은 느낌은 아마 그때 만들어졌을 것이다. 동구시장의 ‘미도당 빵집’이 아직도 남아 있어 어디보다 반가웠는데, 왕복 120원 버스비를 들여 1000원어치 빵을 사면 1개 100원이던 빵을 꼭 11개 넣어 주던 곳이다. 어느 날, 당시로는 최신기계였던 식빵 자르는 기계를 들여놓았는데, 그걸 처음 본 날 빵을 다 사고도 갓 구워 식힌 통식빵을 올려놓기만 하면 한 번에 얇은 조각이 되어 나오는 장면을 한동안 구경하고 있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에 일부러 한 번 가 봤을 때 그 노란 기계가 그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세월의 흔적은 피할 수 없어 색은 바랬고 이제는 더 이상 쓰지 않는지 제빵 재료 상자가 그 위에 겹겹이 쌓여 있었지만, 그때 그 기계인 건 분명했다. 꽈배기를 튀기던, 나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여자가 왠지 예전 사장님의 딸 같아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하며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사장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니, 그런다고 뭘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그 순간은 꼭 뭐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는지도 모르겠다. 물어볼까, 하다가 결국 그러지 못했다. ‘그러지 못했다’기 보다는 ‘그러지 않았다’고 해야 맞는데, 숫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 내가 알던 그 빵집 딸이 맞든 아니든, 나는 추억 속에서 질문을 하겠고, 그분은 현실에서 대답할 터이니, 나는 40년 전에 있고, 여자는 지금에 있는 꼴. 말 몇 마디로 그 간극을 훌쩍 뛰어넘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40년 전 어디쯤 마음을 두고 있는 내가 현실로 돌아와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고, 현실의 그분을 40년 전으로 단숨에 훅 이끌어갈 재주도 내게는 없었다. 결국 내가 찾으려 했던 것은 내 기억에 남은 추억이었으니까. 눈으로 보이고, 코로 맡아지고, 귀로 들리는, 그 모든 매개를 통해 더 생생히 되살아나는 추억들. 아, 하나 더 있구나! 주문처럼 입으로 읊어서도 생생해지니….

  명소라고 할 만큼 누구에게나 유명했던 가게들은 아니다. 그저 나에게만 소중했고, 내 기억에서만 그리운 집들이다. 한 해 남짓만 더 지나면 내 약국도 만으로 20년 한자리에 있게 된다. 이미 엄마 손 잡고 아장아장 걸어오던 아이가 제대하고 왔다가 인사를 하고, 교복을 입고 감기약 지으러 오던 소녀가 시집가서 아이를 안고 오기도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화로 약국의 위치를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나는 건너편의 더 유명한 가게를 알려주고 길 건너 맞은편에 있다고 설명한다. 처음에는 은행이었다가 요즘은 유명 프랜차이즈 햄버거집으로 그 ‘기준’이 바뀌었을 뿐이다. 한때 약사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이야기였던 ‘육일약국’처럼, 택시를 타고 출근할 때마다 알만한 ‘기준’을 먼저 말하지 않고 기사님이 모를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병영에 있는 서진약국 갑시다!’를 외쳐도 봤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유명한 랜드마크가 되기보다 몇 안 되더라도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가끔 추억으로 생각날 수 있는 곳으로 남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내 기억에서도 어렴풋해져 버린 ‘김소아과’를 봐도 그렇지만 작은 의원이나 약국이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게다. 대를 이어 운영하는 오래된 식당과 같은 유구함은 애초에 꿈도 꾸지 않는다. 그래도 울산의 원도심인 성남동에 가 보면 ‘울산 시민과 함께 반세기’라고 간판에 당당히 써 둔 약국도 볼 수 있는데, 쉽지는 않겠지만 내게도 그 정도는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싶다. 하지만 단지 오래되기만 하면 무엇할까? 세월의 더께만큼이나 꾸준한 것이 있어야 하고, 또 전혀 반대의 개념인 것 같지만, 그저 역사에 매몰되지 않는 새로움을 늘 갖추고 있어야 의미가 있겠다 싶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내가 정말 바라는 한 가지는, 누군가 한참 나중의 나이든 내게 와서, 내 추억의 가게들을 찾아가 내가 그러려 했듯 오래전 이야기를 물어볼 때, 내가 기꺼이 그 사람의 추억이 머물고 있는 그 시간 속으로 자진해서 풍덩 뛰어들어 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살살, 아주 조심해야 한다. 그 누군가의 추억 속으로 넘어가는 내 동작이 너무 과장되거나 요란해서 그이의 추억여행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 그저 내가 눈 마주치고 가볍게 맞장구쳐 주는 것에서, 가끔 고개 끄덕이고 조그맣게 웃어 보이는 것만으로, 그이가 자기의 기억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하나 둘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걸 통해서, 내가 그렇게 나쁘게 살아오지는 않았구나 하고 자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때도 나는 여전히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되뇌며 다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습관 같은 읊조림에는 아쉬움 따위 많이 옅어져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럴 수 있다면, 아주 나중에,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려면 당장의 하루를 성실히 이어가야 하겠지? 자, 내가 어디 있는지 주위를 다시 한번 돌아보자.

  여기는, 오늘로 태어난 지 만 18년 4개월이 된, 울산, 병영, 서진약국이다.

 

(2019 <약사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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