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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문지방

by FeelSeoGood 2023. 6. 27.

 

 

  “이놈! 문지방에서 썩 내려오너라!”

  어린 시절 들었던 할아버지의 호통이 불현듯 떠올랐다. 방학이면 며칠씩 가 있던 시골집에서나 들어봤던 것이다. 출근 전 집에서 있었던 일에 정신을 쏟으며 걷다가 높은 문턱에 발이 걸려 속절없이 휘청거리고 난 다음이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 보행통로 입구에는 족히 사십 센티미터는 되는 턱이 있다. 그 높이가 보통의 계단 한 단보다 높으니 키 작은 아이들은 그 문턱을 밟지 않고 지나기 어려웠고, 어른들도 부주의하게 다니다가는 발끝이 걸리기 일쑤였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옷을 두껍게 입은 오늘은 걸음이 평소 같지 않아서 그 문턱을 디디고 넘으려던 요량이었으나, 늘 다니던 익숙한 길이라 소홀히 내뻗은 발이 무언가에 걸린다고 느끼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가까스로 무너지는 균형을 되잡을 수 있었다. 정말 넘어지기라도 했더라면, 모르긴 해도 단지 민망함에 그치지는 않았을 게다. 크든 작든 어딘가 다쳐서 한동안 고생했을 것이 틀림없다. 순식간에 닥친 위기에, 그때까지 머릿속에 있던 복잡한 생각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그 이후, 생각의 이어짐이 묘했다. 바로 직전까지 머릿속에 담겨 있던 일도 유쾌한 것이라 할 수 없었고, 위험하기까지 한 해프닝이 있었으니 없던 짜증이라도 나는 게 보통이겠는데, 그러기는커녕 삼십 년도 더 전에 들었던 할아버지의 다그침이 떠올랐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 나는, 문지방을 그냥 넘지 못하고 꼭 밟아 올라섰다가 넘곤 했었다. 키가 작았던 탓에 그러는 것이 편하기도 했지만, 그냥 밋밋하게 넘어가는 것보다 그편이 훨씬 재미있었다. 그러다 할아버지 눈에 띄기라도 하면 곧바로 엄한 표정과 함께 ‘이놈!’ 하는 호통이 날아들었는데, 내가 지금의 내 아이보다 더 어리던 때였다. 할아버지는 어여쁘게만 여기던 맏손자의 어리고 모자란 짓 대부분은 모른 척하셨지만, 그것만은 놓치지 않고 호통을 치셨다. 할아버지의 목소리와 표정이 어제 본 듯 생생하다 할 수는 없지만, 생각해 보면 잘못을 크게 꾸짖어 엄히 다스리려는 것이 아니라 짐짓 겁을 주어 나쁜 버릇을 고쳐주려는 과장된 표정과 목소리였던 것 같다. 몸을 추스르며 한숨 돌리던 순간, 할아버지의 그 표정과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쟁쟁히 울려온 것이다.

 

 

  아침을 먹으면서 아내에게서 아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조회 때 간혹 ‘교장실은 여러분에게 항상 열려있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몇 번 들었던 아이가 교장실에 가서 수업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했다고 했다. 체육 선생님이 약속한 공놀이를 시켜주지 않는다고,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했단다.

  담임 선생님도 거치지 않고 교장실에 바로 가서 이야기를 해버렸으니 당돌하고 본데없게 보이지 않겠냐는 것이 아내의 걱정이었다. 얘기를 듣자마자는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겠나 싶었지만, 아내의 염려도 아예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어서 나 역시 개운치 못한 마음이 있었다. 아직 3학년이니 어리고 귀엽게 봐줄 수도 있지 않냐 했더니, 갓 입학한 1학년도 아니고 3학년이라 더 그렇다는 아내의 대꾸가 돌아왔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아이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고 담임 선생님께 바로 전화를 드렸는데, 당장 전화선 너머의 목소리에서 탐탁지 않은 표정이 보이는 것 같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아이라고 교장실 문턱을 넘는 것이 그리 쉽기만 했을까? 공놀이를 하고 못 하고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꽤나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더구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니, 제 나름의 명확한 기준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주의를 줘야 하나, 칭찬을 해야 하나, 모른 척을 해야 하나…….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출근 전에, 제 엄마의 표정만 보고서도 주눅이 들어 있는 아이를 불러 몇 가지를 확인했다. 교장 선생님 앞에서 예의 바르게 행동했는지, 불만에 차서 입술을 삐쭉거리며 버릇없이 굴었던 것은 아닌지. 체육 선생님이나 담임 선생님께 먼저 말씀을 드려보기는 했는지, 교장 선생님은 뭐라고 하셨는지. 무엇보다, 왜 그랬는지. 하지만 그저 변명하듯 쭈뼛쭈뼛하는 아이의 대답만 듣고 섰을 뿐, 무엇이든 딱 부러지게 해줄 말이 없었다.

  야단을 치려던 것은 아니었다. 잘했다고 할 수도 없었지만, 딱히 잘못 했다고 이야기하기도 마뜩잖았다. 아이의 행동으로 다소간 곤란한 입장이 된 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일러줘야 할 것 같았는데, 그것이 야단치는 것으로 들릴까 염려되기도 하고, 그 상황을 온전히 이해시키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그랬구나 하는 표정만 지어 보였을 뿐, 헝클이듯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고 나왔다.

 

 

  할아버지는 왜 꼭꼭 나이 어린 손자에게 문지방을 밟지 말라 하셨을까? 키 크지 않는다고 상에 올라가지 말라던 것이나 복 나간다고 다리 떫지 말라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 ‘문지방 호통’에도 분명 숨은 뜻이 있을 것이다. 아이의 일과 할아버지의 과장된 호통을 겹쳐 생각해 보자면,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늘 익숙한 걸음이라도 조심하여 삼가고 행동에 쓸데없는 과장이나 모남이 없도록 하라는 것 말이다.

  요즘 집이야 문지방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할 만큼 작은 문턱도 아예 없애서 청소기 끌기도 편하고 생각 없이 지나다 발가락을 찧을 일도 없다지만, 옛집의 경우 대문이나 부엌처럼 실외가 아니라도 높은 문지방은 한 자가 넘는 곳도 있었다. 바람길 하라고 문을 활짝 열어 둔 여름에도, 천방지축이던 내가 큰방 지나 대청, 대청 건너 작은방으로 막무가내로 뛰어다닐 수는 없었는데, 이 문지방 때문에 자연히 속도를 줄이고 걸음을 조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만들 때부터 과속방지턱 역할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겠지만, 가는 데마다 있는 이 문지방들 덕분에 철부지의 걸음이 조절된 것은 사실이고, 태어나 처음 하는 걸음마가 평생 모든 행동의 시작이듯 한 사람의 걸음이 나머지 모든 행동의 근본이라 본다면, 할아버지의 심중에는 비단 문지방 하나 넘는 법에 그치지 않고 어린 손자의 무모한 행동을 훈육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리라.

  문턱에 올라서거나 그것을 밟고 넘는 것은 누가 지났는지 아닌지도 모르게 살짝 넘어가는 가벼운 걸음에 비해 투박하고 과장되며 소리도 요란하기 마련이다. 여럿이 줄줄이 문을 지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더 선명히 그려지는데, 모두가 문지방을 사뿐히 넘어갈 때, 어느 한 사람 그 문지방을 밟고 올라서서 넘어간다면 분명 그는 무리 중에서 도드라져 보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은 평소 행동에도 그런 차이를 보여서, 조심하고 삼가는 마음이 부족하여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어디에 있더라도 남들 사이에서 튀어 보이고 요란스러운 점이 있을 것이다. 결코 좋은 의미의 돋보임이 아니다. 그냥저냥 넘어가도 좋을 남의 흠이나 잘못을 꼭 꼬집어 짚어줘야 하거나, 자신에게 미치는 티끌 같은 해로움도 참지 못하는 경향의 사람일 수도 있다. 덤벙대며 쓸데없이 소란스럽거나 매사에 비판적이고 까칠한 스타일 말이다. 어느 쪽이든 주변을 편하게 만드는 모양은 아니다. 문지방 하나 넘는 모습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것을 심한 비약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부모 마음으로 십 년 너머 지내보니, 할아버지께서 그런 생각으로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경을 썼던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할아버지의 짐짓 무섭게 낮춘 목소리를 내 어디 깊은 곳에 담아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문은 물론이고, 문 없이 이곳과 저곳의 경계를 지어 놓은 턱을 지날 때면 늘 조심하고 주의하는 편이었던 것 같다. 일부러 공들여 애쓴 것은 아니었으나, 턱이 없는 경계선도 되도록 밟지 않고 넘어가려 했었다. 그게 뭐가 되었든 어떤 경계를 넘는다는 것에는 일말의 두려움이 있기 마련인데, 내 경우에는 그 두려움에 훈육받은 조심스러움이 더해져서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보다 지레 겁을 먹은 움츠림이 더 큰 적도 있었으니 꼭 좋다고만은 할 수 없겠지만, 그마저도 없었다면 또 얼마나 다듬어지지 않은 행동들을 안고 살았을까 싶기도 하다.

 

 

  아이에게 해 주었어야 하는 말이 그런 게 아닐까? 문지방을 넘더라도 조심스레 사뿐히 넘으라고.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더라도 둔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라고. 문턱에 발끝이 걸리지는 않을지, 혹시 내 행동으로 다른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은 아닌지 한숨 돌리며 찬찬히 살펴보고 걸음을 내디디라고. 이런 이야기들을 해 주었어야 하는 거라서, 아이를 앞에 두고도 그렇게 말문이 막혔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삼십 년이 훌쩍 지나서야 할아버지가 내리셨던 호통의 의미를 겨우 짐작이나마 하게 된 내가 이제 겨우 3학년인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언제든 두루뭉술하고 자신의 결을 전혀 세우지 않는 것을 좋은 태도라 할 수는 없겠지만, 매사에 주위에 대한 배려 없이 자기 생각만 옳다고 밀어붙이는 것도 역시 좋지 않다. 어른들은, 문지방을 밟지 말라는 말로, 사소한 행동도 경박하지 않게 하라는 교훈을 주어 후손들에게 미칠 작은 액이라도 피하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좀 튀어나와 있다고 해서 꼭 밟고 지날 필요는 없다고, 튀어나온 대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두고 슬쩍 넘어가면 그만이라고, 이러나저러나 그건 그저 문지방 따위일 뿐이라고, 그대로 지나지 못하고 그 위에 올라서서 까불고 놀다 보면 미끄러져 다칠 수도 있다고……. 그렇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나저나, 상을 받거나 칭찬을 들으러 간다고 해도 조심스럽기만 했을 교장실 문턱을 넘으며 아이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곳으로 들어간다는, 혹은 나아간다는 것.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였을까? 앞으로 수없이 많은 경계와 문턱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그것을 넘을지 말지 고민하게 될 것이고, 넘어야 한다면 어떻게 넘을지도 생각해보게 될 것이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넘어야 하거나 포기해야 할 수도 있을 터이다. 아이도 그 많은 문턱 앞에 서 보고 난 뒤에 이번 일을 돌아보면, 출근길에 발이 엇갈려 휘청거렸던 것 정도의 가벼운 해프닝으로 기억하게 되겠지만, 당장은 염려가 되는 것이 부모 마음이다. 이번 일을 대하는 내 태도에 따라서 아이는, 우쭐하는 마음으로 장차 위험하기만 한 무모함을 품게 될 수도 있고, 경계의 벽을 넘을 과감함을 상실하고 소극적인 마음을 키울 수도 있다.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는 것, 그 세계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를, 텃세를 이겨내고 그 안으로 한 발 내디딘다는 것. 굳이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이 그런 것이고, 도전 아닌 것이 없다. 아이는 이제 겨우 열 살이니까 말이다.

  오늘 퇴근하고 들어가면, 아이를 힘껏 안아줘야겠다. 내 할아버지와 문지방 이야기도 조금 들려주게 될 것이다. 하나하나 시시콜콜 옳고 그름을 가르쳐 줄 수 없지만,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도 당장은 충분히 이해시킬 수도 없겠지만, 스스로 해쳐나갈 용기를 응원하는 마음은 온전히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2017 약사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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