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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그런가 보다

by FeelSeoGood 2023. 6. 6.

  볕 좋은 휴일 오후다. 아직 이른 감이 있긴 해도 봄은 봄이다. 원래는 약국에 필요한 소품이 있어 목공작업을 할 생각이었지만, 봄맞이 나들이가 썩 구미에 당긴다.

  올해도 어김없이 홍매화가 어여삐 피었다는 통도사는 어떨까? 근처 울산대공원이나 태화강변 산책 정도도 좋겠다. 하지만 창밖 멀리 시선 한 번에 이내 들뜬 마음을 접는다. 건너편 아파트도 뿌옇게 흐리고, 그 뒤에 앉은 산은 아예 풍경에서 사라지고 없다.

  미먼! 약칭인지 애칭인지, 사람들이 미세먼지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한탄이나 자조가 담겼을 그 말이 나는 자꾸 ‘미망(迷妄)’처럼 들리고 읽힌다. 공기가 탁해지는 만큼 세상도, 정신도 그렇게 흐릿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까닭이다.

  나들이는 포기하고, 창가에 신문지를 펼치고 손톱깎이를 가져와 앉았다. 다듬은 지 얼마 안 지난 것 같은데 벌써 어중간하다. 기다리지도 않는데 잘도 자라고 때가 되면 깎아내야 한다. 그냥 둔다고 당장 어찌 되지는 않더라도 결국 불편하고, 심하면 부러지거나 다치기도 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세먼지나 황사도 그렇게 경험으로 미리 알고 손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매년 겪는 일인데도 해법이 마땅치 않다. 그나마 알량한 과학기술로 어느 정도 예측은 할 수 있지만, 이런 결과를 초래한 이유에 우리 인간이, 특히 인간이 만든 기술발전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해결책이 뾰족하지 않다. 사람들의 잘못이 임계점을 지나버려 이제는 되돌릴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도 버릴 수 없다. 그래도 뭐든 노력은 해 봐야 할 텐데….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발톱을 깎으려는데 발바닥 안쪽에 작은 티눈이 만져진다. 본래 티눈은 아프고 불편하기 마련이지만, 다행히 디딜 때 직접 닿는 부분이 아닌데다 크기도 아주 작아서 모르고 지냈나 보다.

  검지로 살살 문지르며 가늠해 본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매끈한 발바닥에 이물이 하나 박혀 있으니 마음이 영 개운치 않다. 몰랐을 때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는데 막상 신경이 꽂히고 나니 벗어날 수가 없다.

  결국, 티눈을 뜯는다. 딴에는 조심해서 잘라냈는데 과했던지 이내 피가 새빨갛게 망울져 똑똑 떨어져 내린다. 간단히 지혈은 됐지만, 이제는 디딜 때마다 그 상처가 쓰라리고 아프다. 말 그대로 ‘긁어 부스럼’이다.

그렇게 뜯어냈으니 매끈한 피부로 환골탈태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오히려 티눈은 더 딱딱해지고 주위의 굳은살은 세를 넓힐 터이다. 결국 티눈은 내 안달과 욕심을 먹고 자라는 꼴이 될 것이다.

  말한 대로, 처음이 아니다. 뜯어내고 잘라 후회하고도 또 뜯어낸다. 계속 모르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막상 알게 되고서는 그러려니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은 아니라 해도 걸음부터 당장 부자연스럽고 불편하다. 그나마 한 일주일 고생 아닌 고생을 하고 나면 또 얼마간은 ‘잊고’ 지낼 수 있게 된다. 티눈도 내 몸이라, 다행히도 여전히 왕성한 회복력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잊는다’기 보다 ‘방치한다’거나 ‘두고 본다’는 게 더 맞겠다. 그러다 또 어느 순간 거기에 티눈이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되면 그냥 두려고 애써도, 손대고 싶은 마음을 자꾸만 무시하고 참아 봐도 결국 실패하고 같은 일을 반복할 테니. 역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살다 보면, 눈엣가시가 한둘이 아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바로잡기는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전전긍긍, 가끔은 불편함을 넘어 짜증이 치밀기도 하는 일들. 크든 작든 나만 바뀌고 달라져서 고쳐질 일이라면 어떻게든 애써 그렇게 하면 되겠다 싶기도 하지만, 나 한 사람 바꾸는 것이나 다른 무엇을 바꾸는 것이나 간단치 않기는 매한가지이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작은 티눈처럼 그냥 둬도 괜찮은 일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아니, 그냥 두는 것이 결과적으로 더 나은 것이기 쉽다.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시해도 당장의 일상에는 별 지장을 주지 않는데 바로 잡자고 나서는 순간 불필요한 오해와 부작용이 꼬리를 무는 일들.

  주위를 돌아보면 그런 일들은 은근히 많다. 과도한 결벽이나 정의감, 쓸데없는 오지랖이 연합해서 충동질하기 시작하면 나로서는 배겨낼 재주가 없는 것이다. 심하면 교각살우(矯角殺牛)의 꼴로 끝날 수도 있는데도, 일단은 그 눈엣가시를 빼겠다고 건드리고 봐야 직성이 풀린다.

  낡을 만큼 낡은 자동차 타이어 휠에 묻은 때를 벗겨내겠다고 땡볕 아래 땀을 한 바가지 쏟고는 더위를 먹고, 책꽂이에 나름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도 분야별로 정리해야 한다며 다 끄집어내 놓고서야 막막해한다. 그나마 이런 것은 나 혼자 힘들면 그만이니 큰 문제는 아니다. 꽉 막힌 도로에서 갓길로 달리거나 얌체처럼 비집어 드는 차를 보다 못해 경적을 울리고 진로를 가로막고 나서면 볼썽사나운 언쟁이나 보복운전 같은 시비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중에 정말 거슬리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은 다른 이와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생기는 것들이다. 누가 내게 저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저런 건 좀 고쳐줬으면 좋겠는데 싶은 것들. 특별히 잘못이라 할 수 없는데도 나로서는 불편하고 견디기 쉽지 않은 상황. 일일이 다 말하기에는 내 속이 좁아 보일까 싶기도 하고, 괜히 말을 꺼내 상대의 마음이 상할까 염려도 된다. 이런저런 망설임이 이어지다가 결국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게 되기 쉬운데, 그렇다고, 인정하거나 마뜩하게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니 내 마음의 불편함은 여전한 채다.

  많이 불편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두고 보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그게 자라고 자라서 어느 정도 이상의 문제가 된다는 판단이 들면 그때는 망설이지 말고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하겠지만, 딱히 내게 해가 될 것 같지도 않은 일들에까지 꼼꼼히 참견하기 시작하면 말 그대로 세상이 참 피곤해지는 것이다. 옹졸함으로 시작해서 강박(强迫)으로, 편집(偏執)으로 굳어지는 일. 정말 사서 하는 고생이고, 그냥 둬도 괜찮은 티눈을 굳이 뜯어내는 것처럼 또 다른 ‘긁어 부스럼’이다.

  정답은 알고 있다.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까지는 그냥 그런대로 두고 볼 수 있는 여유, 그런 가장 작은 형태의 관용에 익숙해지는 것.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건 반복된 경험으로 더 잘 알고 있다. 나로서는, 성격이 문제다.

 

  목공을 하다 보면 옹이 하나 없이 깨끗한 판재를 만나기도 하고, 전체적으로는 깔끔한데 한두 개 큰 옹이가 있어 어쩔 수 없이 그 부분을 피해서 재단을 해야 하는 판재도 있다. 대게는 수종(樹種)에 따라 그 정도가 얼추 비슷하지만 같은 종류라 해도 똑같은 것은 아니고, 보통은 작은 옹이가 수두룩하더라도 판재의 기능을 못 할 정도는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은 판재가 딱 하나뿐인데 옹이 때문에 쓸 수 없게 되는 난감한 경우를 만나면 그 옹이가 참 밉상스럽지만, 나이테도 잘 드러나지 않는 매끈한 목재보다는 조그만 옹이를 무늬처럼 품고 있는 쪽이 더 정감이 가고 가구로 완성했을 때도 훨씬 보기가 좋다.

  사람도 그런 면이 있다. 성격이든 외모든, 언제 봐도 구김살 하나 없이 맑고 밝기만 한 사람도 좋지만 자기가 겪은 아픔이나 상처를 바탕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더 정이 간다.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얗고 매끈한 피부의 예쁜 얼굴 당연히 좋지만 그런 것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에게나 어울릴 뿐이고, 일반적으로는 주근깨나 잡티, 하다못해 점이라도 몇 개 있어야 현실적이다.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은 숨기지 않고 겉으로 분명히 드러내는 사람도 좋지만, 잘잘못 다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러려니 이해해주는 사람이 대하기 편하다. 사람들 사이에는 똑 부러지는 긴장보다는 기댐직 하다는 푸근함이 더 호감이 가기 마련이니까.

  사람들 눈에야 옹이를 무늬라 하겠지만 나무의 입장에서는 상처 또는 흉터라고 해야 하겠다. 막 떡잎을 틔우는 어린나무로서는 장차 어떤 상처를 입게 되고 그것이 또 어떻게 흉터로 남게 될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마는, 한여름 폭풍우, 한겨울 눈보라 다 버티며 자라나는 동안 나무가 저 스스로 그 상처를 헤집고 뜯어대지는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나중에 어떤 모양이 되어 남을까 하는 염려도 없이, 딱히 어떤 목적을 두고 돌보지도 않으며 결국에는 그 상처와 흉터 그대로 지키고 품어서 멋진 무늬가 되었다.

  티눈 두고 아낀다고 내 몸에 멋진 무엇이 될 리 만무하지만, 그런 것도 그저 내 몸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고 굳이 없애려 할 필요는 없겠다 싶다. 모르지, 반복해서 알약을 쪼개느라 생긴 손가락의 굳은살처럼 직업에서 얻은 성실한 흉터는 내 몸에 ‘멋진 옹이’가 될지도….

  그렇다고 결코 과해서는 안 된다. 지나치면 흉하다. 옹이가 너무 크거나 많은 나무는 못 쓰고, 한때 받은 상처 때문에 마음마저 ‘미먼’에 둘러싸인 듯 어두운 사람들은 가까이하기 두렵다. 말 그대로 그냥 둬도 될 만큼을 참아야지, 그 정도를 넘어 또 다른 탈을 낼 것 같으면 과감히 도려내고 어떻게든 바로 잡아야 한다. 어디까지가 그 한계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여전히 또 다른 숙제로 남겠지만 그런 것은 세월이 주는 지혜가 해결해 주리라. 어쨌거나, 몸이든 마음이든, 견딜만한 불편이나 아픔은 안달하지도 헤집지도 말고, 그냥 둬도 될 것은 관망하면서 지낼 수 있어야 하겠다 싶다.

 

  이제 그 티눈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없는 셈 쳐야겠다. 손대지 않고 저 하는 꼴로 그냥 두고 보는 게 최선이리라.

  따지고 보면 모든 병이라는 것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약국에서 20년 넘게 환자들 만나보니 드는 생각이다. 당장 어떻게 목숨이 위태롭거나 빤히 심각한 예후가 보이는 경우도 아니고 웬만큼 견딜만하다면 지켜보며 달래어 도닥이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차츰 좋아지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러니 조급하게 어찌해보려 하기보다 한동안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지켜보고만 있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니 어쩌면, 약 하나 건네는 것보다 환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그나저나, 언제가 되어야 상큼한 맑은 하늘을 만나볼 수 있을까? 이것도 여유를 두고 기다리면 해결이 될 일인가? 아니, 이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당장 대중교통 이용으로 자동차 운행을 줄이고, 발전량을 늘리지 않아도 되도록 전기도 아끼고, 직접 도움은 안 된대도 환경 회복력을 생각해서 비닐봉투니 일회용품 소비도 줄이고. 여행은 어쩌나? 일 년 내내 성실히 친환경 실천을 했어도 장거리 비행 한 번이면 말짱 도루묵이라는데….

  어이쿠, 또 안달이로구나!

(2022 <약사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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