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6 안경을 닦다 딩동! 두 시가 다 되어 가는 새벽, 매일 같이 듣는 엘리베이터 소리가 유난히 신경 쓰인다. 정적을 깨는, 가볍지만 삭막한 소리. 보통은, 가벼우면 경쾌하기 마련인데 외려 건조하고 어둡다. 기분 탓이겠지. 누구에게나 똑같은 소리일 터인데, 아이들 귀에도 이리 들리면 어쩌나 싶다. 정말 그렇다면, 이사라도 가야 하는 게 아닐까? 아이들에게는 달리 들릴 수도 있겠지. 출발선의 육상선수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나가는 아이들을 보면, 녀석들에게는 이 소리가 출발신호처럼 설레고 긴장되는 느낌인지도 모른다. 나의 달리기는 이미 익숙한 만큼 지겹기도 한 반환점 근처, 이제 막 출발선상에 있는 아이들과 나를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쩌면 아이들은, 그런 소리 따위 있는지 없는지 아예 관심 밖일지도 모르.. 2024. 10. 29. 노포(老鋪)를 꿈꾸며 고등학생 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다 이야기가 거기까지 이어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께 이런 얘기를 드린 적이 있다. “엄마, 나는… 갑자기 예전 일들이 떠오르는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대부분 좀 부끄러웠던 기억이라 혼자서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아이고, 그런 건 엄마 나이쯤은 넘어야 하는 일인데. 니는 아무래도 애늙은이인갑다!” 별일이 다 있다며 신기하게 여기셨는지, 벌써부터 그러면 어쩌냐며 측은해하셨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들 얼굴을 한 번 더 공들여 살펴보셨던 건 분명하다. 요즘 들어 특별한 계기가 없는데도 오래전 추억을 되짚어 보는 때가 잦다. 심지어 예전 어느 때 하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 내지 못한 말을 뒤늦게 혼자서 중얼거려 보기도 한.. 2023. 7. 15. 여섯 잔의 커피도 아닌데 “여보, 나 지금 지원이 학원 때문에 같은 반 애들 엄마들이랑 밖인데, 자기 아직 집에 안 왔지? 혹시 나 집에 없다고 전화할까 봐. 내가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왔거든…….” 낯선 번호의 전화 너머에서 들리는 아내의 목소리에 대해 가졌던 의문이 풀린다. 아내의 목소리가 그리 밝지 않다. 무언가 피곤한 일인 게 분명하다. 저녁도 다 지난 시간에 애들 둘을 데리고 다른 엄마들과 만나야 하는 일이라면 좋은 일일 건 없는 것이다. 세상사 그렇듯, 갑자기 일어나는 일과 예상 못한 일들의 구십 퍼센트는 나쁜 일이다. 사람들도 그걸 알기에, 철이 들어갈수록 새롭게 만나는 사람을 우선 경계부터 하고 보는 것 아닌가? 결국 진정한 열린 마음의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집에 와보니 아홉 시가 넘었는데도 불이 .. 2023. 7. 4. 문지방 “이놈! 문지방에서 썩 내려오너라!” 어린 시절 들었던 할아버지의 호통이 불현듯 떠올랐다. 방학이면 며칠씩 가 있던 시골집에서나 들어봤던 것이다. 출근 전 집에서 있었던 일에 정신을 쏟으며 걷다가 높은 문턱에 발이 걸려 속절없이 휘청거리고 난 다음이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 보행통로 입구에는 족히 사십 센티미터는 되는 턱이 있다. 그 높이가 보통의 계단 한 단보다 높으니 키 작은 아이들은 그 문턱을 밟지 않고 지나기 어려웠고, 어른들도 부주의하게 다니다가는 발끝이 걸리기 일쑤였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옷을 두껍게 입은 오늘은 걸음이 평소 같지 않아서 그 문턱을 디디고 넘으려던 요량이었으나, 늘 다니던 익숙한 길이라 소홀히 내뻗은 발이 무언가에 걸린다고 느끼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가까스로 무너지.. 2023. 6. 27. 약국 단상(斷想) 할아버지는 오늘도 할머니의 몸살 약을 사러 오셨다. 다시 뵙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르신의 표정이 염려한 만큼 어둡지 않아 반가움과 함께 조금은 안심이 된다. 늘 사 가시는 할머니의 약을 드리며 여쭤보니, 지역 2차 병원에서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라고 해서 낼모레 올라가 보기로 했다고 하신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게다. 늘 그랬던 대로 별걱정 없는 표정으로 다녀오마고 돌아서신다. 엊그제, 할아버지가 본인의 내과 기침약 처방전을 가지고 오셔서 약을 받으시며 CT 사진과 방사선과 소견서를 보여주시는데, ‘lung cancer’라고 쓰여 있었다. 자세히 설명할 수도,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저 기침이 감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고, 병원에서 지시한 대로 자식들과 상의해서 정밀검사 받아.. 2023. 6. 15. 그런가 보다 볕 좋은 휴일 오후다. 아직 이른 감이 있긴 해도 봄은 봄이다. 원래는 약국에 필요한 소품이 있어 목공작업을 할 생각이었지만, 봄맞이 나들이가 썩 구미에 당긴다. 올해도 어김없이 홍매화가 어여삐 피었다는 통도사는 어떨까? 근처 울산대공원이나 태화강변 산책 정도도 좋겠다. 하지만 창밖 멀리 시선 한 번에 이내 들뜬 마음을 접는다. 건너편 아파트도 뿌옇게 흐리고, 그 뒤에 앉은 산은 아예 풍경에서 사라지고 없다. 미먼! 약칭인지 애칭인지, 사람들이 미세먼지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한탄이나 자조가 담겼을 그 말이 나는 자꾸 ‘미망(迷妄)’처럼 들리고 읽힌다. 공기가 탁해지는 만큼 세상도, 정신도 그렇게 흐릿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까닭이다. 나들이는 포기하고, 창가에 신문지를 펼치고 손톱깎이를 가져와.. 2023. 6. 6.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