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로독! 핸드폰에서 얼음 구르는 소리가 났다. 윤희는 들고 있던 달걀 상자를 냉장고에 대충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은행 앱의 팝업에는 마이너스로 시작하는 빨간색 숫자들이 떠 있었다. 카드값. 잔액의 반이 빠져나갔다. 장바구니에 남은 우유와 어묵을 마저 넣으려 냉장고를 다시 여는데 달걀 상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원래도 단단하지 않은 걸 불안하게 감싼 것에서 나는 둔탁한 파열음. 금세 누렇고 진득한 액체가 꿉꿉한 장판 위로 새어 나왔다. 윤희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지저분하게 퍼지는 달걀물만큼 천천히 식탁 위의 두루마리 휴지로 손을 뻗었다.
또로독! 또 한 번 얼음이 굴렀다. 신용카드 앱이었다. 귀하의 청구금이 성공적으로 인출되었습니다! 그 ‘성공적’이라는 말에 장을 보며 가라앉혔던 짜증과 무력감이 되살아났다.
양육비는 사흘 전에 들어왔어야 했다. 날짜를 지키리란 기대는 없었어도 기다리긴 했었다. 불신은 깊었지만 간절함이 더 컸으니까. 지난 반년 동안 양육비 송금은 네 번이 전부였다. 그것도 두 번은 모자랐고, 날짜를 지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정이야 짐작하고도 남았다. 뭐라도 필요한 대로 뚝딱 만들어 낼 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수완은 없으면서 착하기만 한. 그러니 일부러 안 주는 건 아니었다. 다만, 어떻게든 돈을 맞춰볼 악착같음은 손톱만큼도 없었을 게 뻔했다.
남은 돈으로 월세를 주고 나면 또 카드로 버텨야 했다. 매일 반나절의 식당 일로는 생활이 버거웠다. 근무 시간을 늘려달라고 벌써 얘기했지만, 사장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코로나 전만큼 손님이 회복됐어도 지난 2년이 그랬던 것처럼 당장은 변수가 많았다. 어디서 독한 변종이라도 나오면 또 영업제한이 떨어질 수도 있고, 코로나 이전과는 손님의 패턴도 달라졌다. 왁자하게 먹고 마시는 단체는 없고 많아야 네댓이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아홉 시가 넘으면 끊겨서, 매출의 큰 몫이던 심야영업은 아예 없다고 봐야 했다. 종일로 채용하면 상황 맞춰 편하게 자를 수 없으니, 사장으로서는 시간을 나눠 두 명을 돌리는 게 나았다. 그러니 매몰찬 성격은 못 되는 사장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것이었다. 어쨌든 저번 일로 신경은 더 써 주겠지.
며칠 전 식당에서의 일을 떠올리자 윤희는 다시 화가 치밀었다. 결국 윤희는 달걀물이 범벅된 휴지 뭉치를 내던지고 싱크대 문짝에 기대 털썩 주저앉았지만, 곧 새 휴지를 뜯어 바닥을 마저 닦았다. 달걀물이 묻지 않은 손등으로 조금 고인 눈물도 훔쳤다.
이혼을 후회한 적은 없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버텼다면 더 나빠졌을 것이다. 최악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한 번 방향이 비틀어진 삶에는 곳곳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또 다른 최악이 있었고 조금만 삐끗하면 추락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윤희는, 긴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라고, 계속 발버둥 치면 어느 순간 한 줄기 빛이 보일 거라고 반복해서 스스로를 세뇌했다. 지금 포기하면 정말 막다른 끝에 몰리게 될 거라는 협박은 애써 뒷전으로 미뤘다. 굳이 상기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참혹한 현실 인식은 이미 충분했으니까. 윤희에게 필요한 건, 실낱같더라도 꺼지지 않을 희망이었다.
지우가 없었다면 별거로 끝냈을지 모른다. 실직이 남편 탓이 아니었으니 죽든 살든 함께 이겨내고 싶었다. 코앞의 일도 계산 못 하고 정의감으로만 앞장선 순진함은 원망스러워도, 지킬 가족이 없었다면 남편도 그런 선택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술에 취하면 씹어뱉던 비틀거리는 절규는 언젠가부터 공감되지 않았다. 내가 나 하나 좋자고 그랬냐고, 씨발! 자기 몸 하나 통제 못 하고, 지키려 했다는 가정마저 흔들고부터는.
남편도 대기업 로고 박힌 점퍼 입고 정시에 출퇴근하던 때가 있었다. 전자제품 애프터서비스센터. 목에는 플라스틱 사원증을 걸었지만 외주 파견직이었다. 재계약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다 무늬만 대기업 소속인 불법을 고치자는 노조에 가입했다. 회사는 보복으로 일감 배정을 줄였고 그만큼 고과가 나빠지자 사직을 종용했다. 단순한 억울함에 시작한 일이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할 지경으로 몰렸다. 결과적으로, 아니라고 외치는 순간 결말이 정해진 싸움에 뛰어든 셈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힘이 없었으니까. 그때는 윤희도 남편 편이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남편 잘못이 아니었으니까. 당장 생계가 막막했다. 남편은 배달 라이더를 하며 시위 때마다 회사 앞으로 달려갔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스쿠터도 데모도.
코로나로 음식 배달이 폭증했다. 그만큼 진상도 많았다. 자기들 밥벌이에서는 을이기만 한 사람들이 배달료 몇천 원에 유세를 부렸다. 핸드폰에 깔린 몇 개의 배달앱에 남편의 모든 것이 통째로 매였다. 원청도 파견도 아닌, 처음 겪는 가혹한 고용이었다. 배달 시간은 무조건 지켜야 했다. 눈비도 폭염도 교통 상황도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불법 고용 끝에 부당 해고를 한 회사였어도, 그런 보호막조차 아쉬웠다. 남편은 온라인 주문 시스템의 끄트머리 부품이었고, 시스템이 과열될 때 제일 먼저 닳고 부서졌다. 세상의 일터는 노동을 등가 교환하는 장이 아니었다. 내 몫의 자존감과 유한한 삶을 한 조각씩 떼어 처분하는 곳이었다. 불행히도 남편은 그 밑천이 넉넉지 않았다.
한 건이라도 더 하려다 보니 위험이 예사였다. 결국 장마 폭우에 스쿠터가 미끄러졌다. 노란 신호 꼬리를 물고 교차로를 헤집어 횡단하던 중이었다. 119가 남편을 실어 갔고 부서진 스쿠터는 경찰이 길가로 옮겼다. 의식 없는 남편 대신 찾아본 스쿠터 배달함에는 붉은 소시지와 검은 올리브 위로 푸르고 하얀 곰팡이가 꽃밭이 된 피자가 구겨져 있었다. 장마 끝난 폭염의 도로에서 윤희는 잠시 어질했다.
상자에 붙은 주문서를 보고 가게를 찾았다. 피자값요? 배달앱이 알아서 하지 않나? 앉아서 먹고 갈 변변한 테이블도 없는 매장, 기름때 꾀죄죄한 유니폼의 알바생도 확신이 없었다. 이미 오래 락스에 담갔겠지만 그만큼 더 담근대도 빠지기 어려운 기름때처럼 알바의 목소리도 찌들어있었다. 윤희는, 당장 가게의 손해는 아니라기에, 그 작은 책임이라도 벗은 게 다행스러웠다.
남편은 오랜 치료 끝에 퇴원했지만, 후유증이 남았다. 배달보다 훨씬 간단한 일도 하기 힘들었다. 병원비, 후유 치료, 아무것도 산재가 되지 않았다. 벌이가 없으니 무력하고,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 술만 늘었다. 윤희가 일자리를 찾아다니다 늦은 날, 말다툼 끝에 취한 남편의 손찌검이 날아들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술 깨면 뉘우치고 사과해도 술 마시면 또 그랬고 점점 심해졌다. 결국 별거와 이혼을 생각했으나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생계를 위해 윤희가 알바를 나간 동안 지우에게도 손을 댄 걸 알고서야 윤희는 마음을 굳혔다.
몸 망가져 돈 못 버니 남편 버린다고 주위에서 쑤군댔다. 어차피 사람들은 시시콜콜한 일은 몰랐고 윤희도 해명할 마음은 없었다. 세간의 평판보다 지우와 살아내는 게 급했다. 어쩔 수 없이 엄마 혼자 있는 친정으로 들어갔지만 잠시였다. 해고 이후 계속 남편을 못마땅해하던 오빠가 늙은 엄마 등골 빼먹는다고 입을 댔다.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형편이 어려울수록 쓸데없는 자존심이 더 도드라졌다. 붙잡는 엄마를 뒤로하고 친정에서 멀리 떨어진 반지하로 옮겼다. 가까이 있으면 아무래도 자꾸 기댈 것 같았다. 오빠와 상관없이, 엄마에게 계속 그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지우는 속 썩이는 법이 없었다. 일이 늦을 때면 혼자 끼니를 챙기는 건 물론이고 윤희의 밥까지 차렸다. 어느 날부터는 빨래도 청소도 했다. 그럴 시간이면 공부를 하래도 일 마치고 와보면 또 빨래가 가지런히 널려 있었다. 숙제 다 했고, 공부도 다 했어, 엄마. 그럼 이런 거 하지 말고 그냥 놀아. 윤희도 처음에는 그랬다, 미안하고 염치가 없어서.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고마움과 대견함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해졌다. 손가락도 까딱하기 싫을 만큼 고단했으니까. 지우가 하지 않았으면 또 며칠을 미뤘을 테니까. 윤희는 지쳐갔고 지우는 알아서 단단해졌다. 말수가 줄었고, 속을 잘 내비치지 않았다. 윤희도 지우를 붙잡고 말해본 적은 없었다.
고마워, 지우야. 엄마가 고맙다고만 하고 있어서, 미안해.
윤희는 그저, 일하는 식당에서 몰래 집어 온 입가심용 생강사탕을 지우 주머니에 몇 개씩 넣어 줄 뿐이었다.
“왜? 너 잘 뛰잖아? 너라면 큰 대회에서도 입상할 수 있어, 지우야.”
담임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찍어내며 지우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운동회 반별 계주에 나간 게 화근이었다. 그냥 못 한다고 해야 했었다. 누가 제일 잘 뛰냐고 선생님이 물었을 때 아이들이 지우요, 하고 합창했어도. 달리는 건 좋았지만, 선생님 눈에 띄진 말았어야 했다.
지우는 마지막 주자였다. 뛰고 싶은 대로 뛰었더니 앞선 애를 둘이나 제치고 1등으로 들어왔고, 그래서 결국 오늘, 담임에게서 학교 대표로 시 대회에 나가라는 얘기를 들었다. 대회까지 남은 한 달 동안 다른 출전 선수들과 방과 후 훈련을 받아야 하고 유니폼과 육상화는 학교에서 준다고.
‘더 적극적으로’, ‘밝고 활기차게’, ‘도전해 보는 경험’ 같은 담임의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지우는 대답했다.
“저 달리는 거 싫어해요. 그냥, 필요해서 뛰는 거예요.”
다 알아서 해준다지만 엄마들이 나서야 할 게 뻔했다. 다른 엄마들과 똑같이 할 수도 없겠지만, 한다면 하는 대로 힘들고 못 하면 못 해서 마음 상할 일. 그런 게 아니라도 학교를 늦게 마치면 당장 엄마 대신 챙기는 것들을 할 수 없게 되겠지. 그러니 안 하는 게 맞았다.
모든 게 아림이 때문이었다. 지우의 달리기 실력을 소문낸 것도 지우 이름을 합창하게 부추긴 것도 아림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날 편의점에서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면 아림이도 지우의 달리기 실력을 몰랐을 테니까.
전학 후 한 달이 되도록 어울리는 무리가 없던 지우에게 학원 방향이 지우 집과 같은 아림은 유일한 친구였다. 그날 하굣길, 아림을 따라간 편의점에서 둘은 아이스바를 하나씩 골랐다. 이미 아림이 여러 번 샀었기에 지우는 망설이다 꼬깃꼬깃 접힌 오천 원을 꺼냈다. 거스름을 받아 돌아서며 보니 빠닥빠닥한 새 지폐 두 장이 붙어서 천원이 더 왔다. 지우는 바로 알바 언니를 불렀다.
“저, 여기 천” “천 원짜리 아이스크림은 이것뿐이죠? 포켓몬빵은 언제 들어와요?”
아림이 돈을 내미는 지우의 손을 잽싸게 덮어 누르며 과장된 발랄함으로 알바의 관심을 돌렸다.
“그거? 이제 없어. 안 나와.” “네, 고맙습니다!”
알바 언니의 무심한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깍듯한 인사를 한 아림이 지우를 편의점 밖으로 밀어냈다.
“느, 브브야?”
빠른 걸음으로 편의점을 벗어나며 아림은 복화술 하듯 입술을 붙이고 소리를 낮춰 말했다. 웃고 있는 입꼬리와는 달리 잔뜩 힘을 넣은 눈은 지우를 타박하면서.
그때 편의점 언니가 문을 열고 둘을 불렀다. 그걸 본 아림이 냅다 뛰기 시작했다. 아림의 손에 끌린 지우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언니는 둘을 부르며 몇 걸음 따라오다 포기하고 편의점으로 돌아갔다.
길모퉁이를 돌 때 지우는 느린 아림을 앞질렀다. 아림은 좀 더 지우를 쫓다가 숨을 몰아쉬며 멈췄다.
“그만 가! 이제 안 와. 안 온다고!”
아림은 거친 숨이 골라지자 꼭 쥐고 온 아이스바를 발랄하게 뜯었다. 한 개 값으로 두 개를 먹다니, 개꿀! 일부러 훔친 것도 아니고, 주는 대로 받은 건데 그걸 돌려주면 어떡하냐? 바보냐? 자기 덕에 천 원 번 줄 알라는 얘기를 하다 말고 아림은 정색하고 양손의 엄지를 세워 지우를 향해 내밀었다. 야, 근데, 너 달리기 대박!
그 일이 내내 찜찜하더니, 결국 교무실까지 불려 오게 된 것이다.
그래도 아림을 탓하고 싶진 않았다. 나서서 수다 떨기 좋아하는 성격 때문이지 지우를 힘들게 하려던 건 아니니까. 당장 친구는 아림 뿐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지우는 아림이 좋았다. 정확히는, 부러웠다. 아림은 자기 걸 나누는 데에 너그러웠고, 반 아이들에게 못되게 굴지 않았고, 싫은 내색은 했지만 화내는 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인기가 있는 편은 아니어서, 영악한 애들은 아림의 그런 면을 은근히 이용했지만 정작 아림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악착같은 면이 없는 만큼 여간해선 상처도 받지 않았다. 지우가 보기엔 그게 아림의 가장 큰 약점이자 장점이었다.
“넌 엄마가 학원도 안 보내고, 좋겠다.”
가끔 속없는 소리를 해도 얄밉진 않았다. 지우는 자기 얘기를 안 하고 아림은 속마음을 전부 내보이는 차이일 뿐이라 여겼다. 엄마 아빠는 의사가 되라고 하지만 나는 댄서가 될 거야. 그러려면 날씬해야 되는데, 세상에서 먹는 게 제일 좋은걸, 어떻게 살을 빼겠냐? 그러니 나는 학원 다닐 돈으로 다이어트 체형관리랑 방송댄스를 가는 게 맞는데. 그치만 어쩌겠어? 절대 안 된달 게 뻔해. 아림의 얘기는 늘 과장된 절망과 무력한 수긍이 섞인 한숨으로 끝났다. 아림이 그 통통한 얼굴에 세상 잃은 수심을 가득 채우면 키가 한 뼘은 더 작은 지우보다 두세 살은 동생 같았다.
그럴 때면 지우는 그런 동생 없는 게 다행이다 싶었다. 아림이처럼 철없는 동생까지 있었으면 엄마는 진짜 힘들었을 테니까. 아빠도 힘들다는 걸 알지만, 되도록 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빠를 생각하면 갑갑했다. 착하지만 나쁘고, 보고 싶지만 무섭고, 사랑하지만 미웠다. 혼란스러웠다. 지우는 늘 엄마 아빠에게 미안했다. 내가 없었으면, 엄마 아빠는 괜찮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아림이 진짜 부러웠다. 미안할 필요 없이 투정만 부릴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아림은 몰랐다. 그러니 그 작은 거북이 키링을 갖고 종일을 징징댈 수 있는 거겠지. 고작 손바닥만 한 거북이 하나를.
편의점 사건 다음 날부터 아림은, 가방에 달고 다니던 거북이 키링이 없어졌다고 틈만 나면 칭얼댔다. 좋아하는 교회 오빠가 줬다고, 무척 아끼던 것이긴 했다. 잘 찾아보지는 않고, 세상 잃은 듯 서글펐다가, 자기 하는 일이 다 그렇다고 자책했다가, 맛있는 거 앞에선 다 잊은 듯 금방 헤헤거렸다. 키링이 발이 달렸냐? 없어지긴 뭘 없어져? 지가 잃어버린 거지. 엄마라면 그랬을 거였다, 지우가 아림이처럼 굴었다면.
지우는 사실, 달리는 게 좋았다. 달리면 후련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지만 그때가 좋았다. 그 순간에는 다른 걸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으니까. 숨은 턱까지 차오르는데도 체했던 게 내려간 것처럼 가슴은 시원했다. 그렇게 되려면 숨구멍이 말라붙어 까끌까끌해지도록 뛰어야 했다. 어떤 때는 금방 그렇게 되었고, 어떤 때는 한참을 뛰어야 했다. 그래서 지우는 오르막길이 더 좋았다.
선생님에게 거짓말은 했어도 마음에 걸리는 건 없었다. 안 그랬으면 더 많은 얘길 해야 했겠지. 지우도 다 모르는 집안 사정을 전부 말할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누구에게서든 안타까운 시선을 받는 건 싫었다. 그래서 지우는 지난 학교 친구들과도 조용히 헤어졌고 그 후로도 연락하지 않았다.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도 예전처럼 돌아갈 거니까. 그때가 되면 아림이처럼 아무에게나 뭐든 다 얘기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당장은 아니다, 선생님에게도.
문방구에는 늘 그렇듯 아이들이 서넛씩 뭉쳐 있었다. 쫀드기를 먹고 카드 따먹기를 하고 결국은 지게 돼 있는 가위바위보 게임에 돈을 넣고 열심히 버튼을 눌렀다. 늘 그렇듯, 하는 애보다 구경하는 애들이 더 요란스러웠다. 하루도 저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애들. 지우는 걔들보다 우산을 두 개씩 들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엄마들이 더 궁금했다. 저 아줌마들은 무슨 얘기를 할까? 무슨 얘기길래 저렇게 계속 웃을까?
지우는 아이들이 몰려 있는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교문을 나와 바로 왼쪽 오르막길로 향했다. 급식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어느새 빗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지우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으면서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고무줄로 머리를 단단히 묶었다. 양쪽 어깨의 가방끈도 바짝 당겨 쥐었다. 그러고는, 달렸다. 숨구멍이 까끌까끌해지면, 지우는 후련해질 것이었다.
“언니, 울지 마! 뭐 죄졌어? 싸워야지! 운다고 뭐 달라져?”
빨던 행주를 짜내며 진영 씨가 소리쳤다. 윤희가 겪은 상황이 탐탁잖아서인지 비트는 손목이 아파서인지, 진영은 한껏 인상을 썼다. 그래도 일을 더 키울 자신은 없는지 홀까지 들릴 정도로 목소리가 크지는 않았다.
정말 뭐라도 해야 했는데. 그 남자처럼 소리를 빽 지르든, 앞뒤 재지 말고 욕이라도 퍼붓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다그쳐 노려보는 남자 앞에서 윤희는 아무것도 못 하고 얼굴만 벌게져 있었다. 사장은 그런 윤희를 주방으로 밀어 넣으며 누구 편인지 모를 말을 낮게 던졌다. 일단 여기서 진정 좀 해 봐요. 윤희를 끌어갈 때는 짜증스럽기만 하더니, 다시 홀로 나가면서는 잽싸게 사람 좋은 얼굴을 만들면서.
윤희는 진영 씨의 카랑한 핀잔을 듣고서야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오금과 허벅지 사이쯤의 이물감은 그런 게 있었다는 사실만 분명히 기억날 뿐, 이미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다. 뱀이 기어오른 건지, 벌레가 지나간 건지, 날카로운 칼날이 스친 건지. 그런 놀람 때문에 우는 게 아니었다. 억울함,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취급받았다는 모멸감 때문이었다.
“니나노 집도 아니고 어디 밥집에 저런 게. 또라이야?”
그러면서 진영 씨는 묻지도 않은 자기 얘기를 보탰다. 전에 있던 일식집에서는 쌔고 쌨었다고. 수고한다고 만 원짜리 감은 술잔을 건네면서 종아리며, 엉덩이며 대놓고 만지는 놈들. 팔꿈치, 손등으로 가슴께를 슬쩍 눌러보는 새끼들. 윤희를 달래려는 건지, 자기 넋두리인지 분명치 않았다.
“다 돈지랄이지. 그래도 뭐 어때? 내 돈지랄인가? 지들 돈지랄이지. 인당 기십만 원씩 하는 음식 반도 안 먹고 가는 놈들 기분 내는 돈인 줄은 알지만, 그런 팁이 짭짤하긴 했거든. 지갑 열리겠다 싶으면 그릇 놓을 때 일부러 허리 더 숙여서 여기를 슬쩍 보여주면서 배시시 웃어. 그럼 백퍼야.”
저 혼자 신이 나서, 고무장갑 낀 손으로 가슴골쯤을 가리키는 진영 씨의 아련한 표정에 윤희는 치가 떨렸다. 윤희의 표정을 읽은 진영 씨가 다시 성화를 내며 설거지통의 그릇을 거칠게 뒤적였다.
“돈이나 주고 그러던가. 언니, 저거 고소해요. 고소해서 돈이나 벌어.”
눈, 손, 입, 발이 각각 제 몫을 해도 모자란 점심 피크였다. 맨얼굴로 통화하는 손님에게 음식이 나올 때까지 마스크를 써달라고 부탁했었다. 남자는 거슬린 듯 흘겨보더니 마지못해 마스크를 썼다. 그러고 돌아서는데 윤희의 다리 안쪽에 무언가 스치는 느낌이 있었다. 처음에는 이거 뭐지, 정말인가, 싶었다. 워낙 순식간이라 뭐가 닿았는지 아닌지, 분명치 않았다. 음식을 갖다주고 돌아서는데 똑같은 접촉이 있었다. 두 번째는 확실했다.
윤희는 정색하고 따졌다. 차분히 부인하던 남자는 곧 언성을 높였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증거도 없이, 본 사람 있냐, 마스크 잘 안 썼다고 뒤집어씌우는, 이런 일 하려면 심성이라도 고와야… 준비라도 한 듯 터지는 남자의 고함에 사장이 끼어들었다. 손님에게 일방적인 사과를 하진 않았지만 윤희 편을 들지도 않았다. 남자는 CCTV나 보고 얘기하라는 말을 끝으로 한 입 먹은 숟가락을 국밥에 꽂아 둔 채 가버렸다.
사장은 평소처럼 홀과 주방을 지휘했다. 여전히 손님이, 할 일이 몰려있었다. 잠시 멈췄던 직원들도 금세 자기 역할로 돌아갔고 가게는 다시 톱니바퀴처럼 움직였다. 남자가 남긴 국밥을 버리면서 사장은 이 아까운, 멀쩡한, 계산도 안 한 나쁜, 하고 웅얼거렸다. 어디에 더 진심이 있을까? 나를 말리던 말? 아니면 저 혼잣말? 윤희는 조금 더 서러워졌다.
다음날 한가한 짬에 사장은 윤희를 따로 불러 CCTV를 보여줬다. 4개의 카메라 중 윤희와 남자가 잡힌 건 2개였는데, 위에서 내려 찍은 각도도 문제였지만, 화질이 나빠서 분명치가 않았다. 수저와 티슈가 담긴 서랍을 빼려던 것인지, 일부러 추행하려던 것인지, 보기에 따라 어느쪽도 가능했다. 어제 내가 이거 찾는다고 문닫고 한 시간이나 더 있다 갔어. 눈 빠지는 줄 알았다니까. 근데, 닿은 건 확실해요? 윤희는 억울함에 또 한 번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못 해. 증거가 확실해도 잘해야 벌금형이고, 얻는 것도 없이 경찰서니, 법원이니, 쫓아다니느라 일만 못 한다고. 소문나면 우리도 좋을 것 없고.
“똥 밟은 셈 치고 잊어버려요.”
고압적이진 않았다. 같이 일하는 동료로서의 안타까움과 조금이라도 사회를 더 겪어본 입장에서의 충고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일을 더 안 키웠으면 하는 바람과 할 만큼 했다는 생색이 있다는 것도.
“언니, 찾았어요? 잘 잡혔어?”
윤희는 진영 씨의 호들갑이 귀찮기만 했다. 진영 씨는 윤희는 안중에도 없이 혼자서 실없는 말을 떠들었다. 사실 그런 정도는 양반이라고, 윤희가 오기 전에 있었던 누구는 치마 안쪽으로 손가락이 휙 들어왔는데 깜짝 놀라서 들고 있던 뚝배기를 엎을 뻔했다고. 그 언니 코로나로 노래방 망하고 여기 왔거든. 이런 데는 그런 거 없을 줄 알았다면서 욕을 하는데, 와 나 그렇게 욕 잘하는 사람 첨 봤잖아. 진영 씨는 비밀을 전하듯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그때 그 언니가 그 일 문제 삼는 바람에 사장이 고생 좀 했어. 결국 그 언니는 관뒀고.
몸이 힘든 건 견디면 된다고 생각했다. 잊을만하면 불쑥 튀어나오는 개똥 같은 유세와 갑질은 견디기 힘들었다. 일만 잘 해서는 밥벌이를 할 수 없었다. 숙이고 조아리고, 늘 먼저 조심스러워야만 했다. 적선 얻는 것도 아니고 일한 만큼 받는 건데도. 여자라서 더 그랬다. 윤희가 할만한 일들에 폼 나고 힘 안 드는 일은 없었다. 대학 졸업장도, 결혼 전 몇 년의 사회 경험도 쓸모없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어디서나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생 때부터 겪어봤으니까. 그때는 이렇게까지 심각하지도 않았고, 어린 마음에, 자존심 다치는 것쯤은 참고 넘어가야 하는 줄 알았다. 지우를 낳고부터는 참기가 싫어졌다. 윤희가 여자라서 겪은 억울함을 지우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당장의 일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더 버는 게 급했다. 그렇게 벌어서 학원도 보내고, 하고 싶은 것도 하게 해야지. 그래야 지우를 윤희처럼 자존심 안 팔아도 되는 위치에 세울 수 있지 않겠나. 지우가 살 세상 전부를 바꾸는 것보다 그런 억울함 없는 세상으로 지우 하나 밀어 넣는 게 더 현실적인 건 분명했다. 그것도 절대 만만치는 않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고민할 게 없었다. 눈물도 사치였다. 윤희는 마음을 다잡고 사장에게 부탁했다.
“근무시간 늘려 줘요. 저 더 벌어야 해요. 더 잘할게요.”
사장은 뜬금없음과 딱함이 섞인 표정으로 윤희를 바라보다 물었다.
“이번 일은, 어떻게 하고?”
“뭘 어째요? 어쩔 수도 없다면서요.”
그 대답이 종일로 고용되는 데 도움이 될 거였다. 모르긴 해도 나쁘게 작용하진 않을 거였다. 윤희는 그렇게 믿었다.
지우는 며칠째 편의점 앞을 기웃댔다. 유리 너머 카운터에는 이번에도 남자뿐이었다. 안쪽을 조금 더 살피다가 지우는 돌아섰다. 다른 사람을 통하고 싶지는 않았다. 상황설명도 어렵고 돈이 언니에게 정말 전해질까 싶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대로라면 그날 알바 언니는 시제를 맞추려고 자기 돈 천 원을 썼을 것이다.
결심이 서기 전에는 편의점에서 먼 길로 다녔다. 조금 뛰기만 하면 시간 차이는 별로 없었다. 그날 바로 얘기하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상한 꿈도 꿨다. 모르는 사람이 쫓아와 어깨를 확 잡아채는데 발아래가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되더니 끝도 없이 추락하는 꿈. 늦었지만 사실대로 말하고 돌려주고 싶었다. 아림과는 상의하지 않았다. 말해 봐야 바보 취급할 게 뻔했다. 아니면 벌써 잊어버렸거나. 평소와 다름없이 자뻑과 자책을 빠르게 오가는 아림을 보면 그때 일은 지우에게만 중요한 것 같았다. 그래서 용기를 냈는데도 번번이 알바 언니가 없다니! 지우는 어째야 하나 싶었다. 편의점이 아니면 달리 찾아갈 데도 없는데.
“얘! 거기.”
풀이 죽어 골목으로 꺾어 들 때, 부르는 소리에 돌아봤다가 지우는 그대로 얼었다. 그 언니였다. 복장이 달라서 바로 알아보진 못했지만, 그 언니가 분명했다.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기로 마음먹었어도 갑작스런 상황이었다. 어쩔 줄 모르는 지우에게 언니가 먼저 다가왔다. 다행히 화내거나 벌주려는 것 같진 않았다. 지우는 일단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 날 학교에서 지우는 아림이 잃어버렸던 거북이 키링을 꺼냈다. 아침부터 더위에 늘어졌던 아림이 거북이를 보고 금세 신이 났다. 어떻게 된 거? 어디서 찾은 거? 혹시 네가 숨기고 있던 거? 뭐, 몰래카메라 그런? 오 반갑다!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지우가 설명할 틈도 없이 아림의 수다가 이어졌다. 그러니 그 호들갑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북이를 책상 위에 던져버리는 아림을 보고 지우는 또 얼마나 놀랐던지. 이건 또 뭥미?
아림은 눈을 가늘 게 뜨고 앙칼지게 말했다. 나, 이제, 그 오빠하고, 끝났어. 지우는 속으로 대꾸했다. 언제 사귄 적은 있고? 아니, 내가 버리는 거야. 아, 얘 또 왜 이러니. 그러니까 쟤도 더는 필요 없어! 아림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 책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일단 지우는, 편의점 언니를 만난 얘기를 했다. 돈을 돌려줬다고. 그날 편의점 밖까지 쫓아왔던 건 돈이 아니라 열쇠고리 때문이었다고. 급하게 나오면서 떨어졌는데, 알바 언니가 그걸 주워주려던 거라고. 근데 그 언니가, 고맙다고 하더라. 이렇게 내 머리를 헝클면서, 꼭 친언니처럼. 그러고는 자기 가방에 달아 놨던 거북이를 지우에게 줬다고.
지우 말에 조금씩 흥미를 보이던 아림은 예상대로 한심하단 표정을 먼저 지었다. 그러곤 큰 결심을 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이거, 너 가져줄래?”
이건 또 무슨? 가질래, 도 아니고 가져줄래?
오빠가… 저거, 나 좋아서 준 거 아니래. 나 놀린 거래. 내가 뒤뚱뒤뚱 느리다고. 지난 주일에 교회에서 오빠랑 친한 다른 언니가 그랬어. 그걸 좋다고 달고 다녔냐고, 다 비웃는데 너만 모른다고. 힝! 그치만 얘를 버릴 수는 없잖아.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데. 그러니까…
“너랑 같이 있으면, 얘도 달릴 수 있을 거야.”
지우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아림이 거북이를 지우 가방에 매달았다.
얘 혼자는 느림보지만 여기에선 너만큼 빨리 뛸 수 있겠지. 느리다고 맨날 놀림만 받는데, 네 덕에 좀 빨라져 보자.
아림은 비장했다.
얘를 나라고 생각하고 달려. 그럼 나는 너한테 업혀서 뛰는, 아니 나는 거야. 너 같은 토끼는 나 같은 거북이가 있어야 얘기가 완성돼.
아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련한 표정을 지우고 언니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
“봐, 내가 없으니까 괜히 돈도 돌려주고 그러잖아. 칠칠치 못하게.”
지우는 집에 와서 거북이를 한참 들여다봤다. 난 토끼, 넌 거북이. 난 토끼, 넌 거북이….
그렇다면 넌, 내가 잠들었을 때 혼자서 몰래 기어서 나를 앞지를 거잖아. 그래서 날 이겨 먹을 거면서. 이렇게 귀여운 척 해도 소용없어. 내가 왜 널 달고 다녀야 하냐고….
그 밤 지우는 다른 꿈을 꿨다. 아무에게도 쫓기지 않았다.
지우는 무언가에 꼭 안겨 있었다.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보이는 건 하얀 구름바다, 주변에는 온통 하얗고 몽글몽글한 덩어리들이 떠다녔다. 한 입 베어 물고 싶게 찰랑찰랑한 우유푸딩 같았다. 그러면, 내가 날고 있는 건가?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이마에 송글 맺힌 땀이 마르고 노란 고무밴드에서 삐져나온 앞머리가 날렸다. 지우는 자기를 감싸안은 두툼하고 폭신한 팔을 보았다. 양쪽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온 그건 팔이라기엔 짧아서 두 손을 맞잡지도 못했다. 충분히 길다 해도 손가락이 없어서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무섭지 않았다. 지우는 자기가 안전하다는 걸 알았다. 무엇이 됐건, 내 편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팔의 몸통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팔 만큼이나 우람한 어깨, 그 위에 이고 있는 무지갯빛 등껍질, 먼 데를 보며 빙긋 웃고 있는 그건, 거북이었다. 등껍질 양쪽으로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천천히 활공하는.
그제야 지우는 저 아래 까마득한 것들이 구분되었다. 동네가 보였고, 학교가 있었고, 편의점과 엄마의 식당도 보였다. 눈을 더 크게 떠보니, 지우의 방도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던 교무실도 보였다. 지우는 고개를 들어 더 먼 곳을 둘러봤다. 동네보다 더 멀리,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는 곳. 까마득히 보이는 산과 바다 너머에 있을 그곳. 그렇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우가 알고 있는 곳을 벗어나서부터는 허공이었다. 간혹 연약한 불빛이 스쳐 지나는 어둠 속. 그 빛도 어디론가 금세 흩어졌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지우는 실망하지 않았다. 거북이에게 안겨 그렇게 두둥실 떠가는 게 좋았다.
윤희가 저녁일을 마치고 왔을 때 평소와 달리 지우는 먼저 잠들어 있었다. 양쪽 입꼬리가 올라간 행복한 얼굴이었다. 윤희는 지우의 미소를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마스크는 원래, 뜯으면 환불 교환 안 돼요.
핸드폰에서 짜증이 밴 약국 직원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아니 그래도, 꺼내본 것도 아니고… 애가 살 때 미리 말했어요?”
윤희의 목소리에도 만만찮은 화가 담겼다.
뜨거운 여름 해를 피할 그늘도 없는 대로변이었다. 윤희는 양손에 든 짐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월급이 나온 김에 벼르고 간 마트였다. 가져간 장바구니와 마트에서 산 쓰레기봉투를 가득 채우고도 가벼운 건 지우 가방에도 담았다. 그래봐야 눈으로만 집었다 내려놓은 게 더 많았다. 짐 때문에 스피커폰을 켠 탓에 통화는 그대로 주위에 퍼졌다. 지나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돌아보자, 지우가 얼른 포장 뜯긴 마스크를 옮겨 쥐고 윤희에게서 쓰레기봉투를 받았다. 그제야 윤희는 스피커폰을 껐지만, 격앙된 목소리를 낮추지는 못했다. 주변의 시선이나 지우를 생각하면 바로 전화를 끊고 약국으로 들어가 따져야 했지만 되돌아 가야 할 오십여 미터가 까마득했다. 고작 몇 시간 더 일했다고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게다가, 누군가와 얼굴을 맞대고 따지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피곤했다. 사람 대하는 건 이미 넘치도록 하고 왔으니까.
약국에 지우 혼자 보낸 게 잘못이었다. 아니 그 전에, 마트를 나온 뒤에야 때가 탄 지우의 마스크를 알아본 게 더 잘못인가? 진작 알았다면 마트에서 훨씬 싼 덕용을 샀겠지. 다 썼으면 말을 하지, 하는 원망과 더 신경을 더 써야 했다는 자책이 빠르지만 아리게 지나갔다.
천 원이었다, 얄팍한 비말차단마스크 값은. 과자 한 봉지, 아이스크림 하나 값밖에 안 되는 걸 가지고 그런달 수도 있다. 하지만 지우는 방금도 그 과자 하나 아이스크림 하나를 못 집고 보고만 있었다.
또래보다 얼굴이 작은 지우는 성인용 마스크를 쓸 수 없었다. 중형이든가, 대형이라도 끈 조절이 돼야 했다. 진열대 앞에서 망설이는 지우에게 약국 직원이 직접 골라준 거였다, 얼굴에 맞을 거라고. 그렇게 사 온 걸 윤희가 대 보니 지우에게는 턱도 없었다. 그래서 바꾸려는 건데, 실제로 쓴 것도 아니고 꺼내 보기만 한 건데 안 된다니, 윤희는 납득할 수 없었다.
어머니, 마스크 왜 쓰시죠? 바이러스 막으려고 쓰는 거잖아요? 그럼 이렇게 돌려받은 제품 다시 팔 수 없는 거 아시겠네요. 손에도 바이러스가 있고 만지면서 마스크에 묻는데, 그래서 마스크는 완전 밀봉으로 판매하는 거예요. 어머니라면 다른 사람이 뜯어본 마스크 사시겠어요?
안 사지. 나 같아도 안 사. 그래도,
“처음부터 맞는 크기라고 안 했으면 애가 샀겠어요!”
그러니, 환불해 줘야지!
원칙적으로, 포장을 뜯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제품이 불량이라면 몰라도 단순 변심이나 사이즈 문제로 환불은 안 돼요.
따박따박 넘어오는 똑같은 설명 뒤로 조롱 담긴 다른 목소리가 섞였다. 이 아줌마 마스크 처음 사 보는 거야, 뭐야? 윤희는 그때부터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야! 지금 뭐라고 했어?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그런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윤희는 고함을 질렀다. 목소리 크기만큼 윤희는 절박해 보였고 그만큼 더 초라해졌다.
지우는 윤희를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게 마스크를 잘못 사 온 탓이라 그럴 수 없었다. 마스크가 떨어졌다고 마트에서 말했어야 했는데, 아니 그냥 인터넷에 주문하고 올 때까지 쓰던 거 며칠 더 써도 되는데…. 윤희의 따지고 드는 목소리가 눈을 찌르는 석양처럼 날카로웠다. 지우는 얼굴을 찡그렸다.
소득도 없는 몇 마디를 더 보탠 뒤 윤희는 전화를 끊고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지우 손에서 마스크를 뺏어 든 윤희는 한 번 더 지우 얼굴에 대보았다. 윤희는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더니 갑자기 양손으로 마스크 끈을 힘껏 당겼다. 지우가 말릴 틈도 없었다.
“이러면 어쩔 건데!”
윤희는 한쪽 끈이 뜯어진 마스크를 지우에게 내밀었다.
“가서, 쓰려는데 똑 떨어졌다고 해.”
지우는 마스크만 보고 있었다. 차마 윤희를 볼 수 없었다. 고개를 들면 마주치기 싫은 뭔가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화난 얼굴이면 서럽겠고, 간절한 표정이면 슬플 거였다.
“어서 갖다 와. 꼭 돈으로 받아 와. 다른 걸로 바꿔가라면 안 된다고 해.”
지우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너까지 왜 이래. 어서 받아.”
통화 때와 달리 윤희의 목소리는 당장 서 있기도 힘들 만큼 맥이 빠져 있었다. 그래도 지우를 달래야 했다. 너까지. 어르기도 해야 했다. 왜 이래. 꼭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윽박지르기도 해야 했다. 어서.
계속 지우가 버티자 윤희는 결국 소리를 빽 질렀다.
“어서!”
지우는 처음 생강사탕을 빨았을 때처럼 코와 목이 매워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윤희 앞에서는 싫었다. 그럴 수 없었다.
가방끈을 움켜쥔 지우는 그대로 뒤 돌아 집을 향해 뛰었다. 목이 까슬까슬하도록 숨이 차오르면 눈물 같은 건 참을 수 있을 거였다.
“지우야!”
윤희가 부르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지우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지우는 가벼워졌다.
지우가 힘차게 다리를 뻗을 때마다 가방에 달린 거북이도 해맑게 달랑거렸다.